[남산길 산책]서울까지 오지 않아도 좋은 예술을 만나는 시대
'지방 미술관'을 넘어, 세계를 담는 지역의 얼굴

문화의 수준은 한 도시의 미술관 수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좋은 예술을 누가, 어디서, 얼마나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느냐다. 최근 퐁피두센터의 한국 거점이 문을 열고 국제적 전시를 국내에서 접할 수 있게 된 일은 반가운 변화다. 동시에 한국의 주요 전시와 미술 담론이 오랫동안 수도권에 집중돼 있던 흐름이 지역으로 확장되는 움직임도 주목할 만하다.
원주 뮤지엄 산, 국립현대미술관 청주, 부산현대미술관 등에서는 이미 국내외 작가들의 전시가 지역 관람객을 만나고 있다. 2026년 제16회를 준비하는 광주비엔날레 역시 광주에 혁신적 예술문화가 뿌리내리게 한 주요 플랫폼이다. 문화창조경제 시대에 예술은 더 이상 수도권의 전유물로 머물 수 없다. 지역 시민이 일상 가까이에서 문화적 자산을 향유할 때, 예술은 도시의 생활 기반이자 성장 자원이 된다.
실제로 한국의 미술관은 빠르게 늘었다. 문화체육관광부 통계에 따르면 2025년 등록 미술관은 290관으로, 최근 10여 년간 2배 이상 증가했다. 이제 질문은 '얼마나 많은 미술관을 지을 것인가'에서 '그 미술관이 어떤 도시의 얼굴이 될 것인가'로 옮겨가야 한다. 미술관의 숫자가 늘어났다고 문화창조경제가 저절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해외에서는 이미 문화 분산과 지역 향유가 도시 경쟁력의 중요한 전략으로 자리 잡았다. 프랑스 루브르 랑스가 대표적 사례다. 루브르 박물관은 파리에 집중된 국가 컬렉션을 더 넓은 관람객에게 열기 위해 랑스에 분관을 냈다. 루브르 측은 루브르 랑스가 국가 컬렉션을 모두에게 접근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프랑스 문화부의 문화 분권 정책을 상징한다고 설명한다.
최근 필자가 방문한 아오모리도 그런 생각을 다시 하게 한 도시였다. 아오모리는 도쿄나 오사카처럼 세계 관광객이 몰리는 대도시가 아니다. 일본 북쪽에 자리한 이 도시의 현립미술관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지방 미술관'이라는 말이 얼마나 낡은 표현인지 다시 생각하게 됐다.
미술관의 중심 공간에는 마르크 샤갈이 발레 '알레코'를 위해 제작한 대형 무대 배경화가 천장 가까이까지 압도적으로 펼쳐져 있었다. 단지 큰 작품이 있다는 사실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한 지역 미술관이 세계미술사의 거장을 자기 공간의 중심에 당당히 세워두고 있다는 점이었다. 관람객은 아오모리에서 샤갈을 만나고, 이어 아오모리 출신의 세계적 작가 요시토모 나라를 만난다.

이러한 해외 사례들이 말하는 핵심은 분명하다. 문화는 중앙에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지역으로 흘러가야 한다. 지역에 도착한 예술은 단순한 전시에 머물지 않고 교육, 관광, 커뮤니티, 지역 브랜드, 창조산업의 기반이 된다. 좋은 작품을 지역에서 만나는 일은 시민의 문화 향유권을 넓히는 동시에, 지역이 스스로의 품격과 매력을 키우는 과정이다.
지역 미술관의 과제는 서울의 좋은 전시를 지역으로 가져오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나 최종 목표는 지역이 자기만의 작가와 콘텐츠를 세계적 문화자산으로 키우는 것이다. 좋은 전시의 이동은 출발점이고, 지역 고유의 예술 생태계를 만드는 일이 그다음 과제다.
이런 맥락에서 강원 철원 아트하우스에서 열리는 특별기획전 '찬란한 빛과 예술혼'은 의미 있는 사례다. 철원문화재단이 주최·주관하고, 아트토큰이 운영하는 아트큐브2R2 갤러리가 전시 기획과 협력에 참여한 이번 전시는 박래현, 천경자, 방혜자, 윤석남 등 한국 근현대미술의 흐름 속에서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한 여성 거장들의 작품을 조명한다. 앞서 서울 강남 아트큐브2R2 갤러리에서 선보인 여성미술 기획전이 철원으로 확장됐다는 점에서도, 수도권 중심 전시 콘텐츠가 지역으로 이동하는 실험이라는 의미가 있다.
철원에서 열리는 '찬란한 빛과 예술혼'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박래현의 실험적 조형, 천경자의 독창적 채색화, 방혜자의 빛에 대한 철학, 윤석남의 여성과 기억의 서사는 한국 미술사의 중요한 자산이다. 이 작품들이 서울의 특정 공간에 머물지 않고 철원 시민과 지역 관람객을 만날 때, 전시는 새로운 사회적 의미를 얻는다. 예술은 이동하고, 지역은 감응하며, 관람객은 자신이 사는 곳에서 한국 미술사의 중요한 장면을 직접 경험한다.
문화의 미래는 더 많은 사람이 더 가까운 곳에서 좋은 예술을 만날 수 있을 때 열린다. 철원 전시는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지만 중요한 출발점이다. 서울까지 가지 않아도 한국 미술사의 빛나는 작품을 만날 수 있는 도시, 지역의 일상 속에서 예술적 자부심이 자라나는 사회. 그것이 문화창조경제 시대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다.
홍지숙 아트토큰 대표·융합 콘텐츠 기획자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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