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들 사이에 낀 중견국’…韓-유럽 머리 맞댔다

윤지원 2026. 6. 10. 18:48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지난 5월 15일 베이징 중난하이 방문 중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오른쪽)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회담하며 손짓하고 있다. AFP

" 그 어떠한 국가도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출범으로 고조된) 지정학적 불안정성을 홀로 해결할 수는 없다. (유홍림 서울대 총장) "
미·중 패권 경쟁이 심화하는 가운데 한국과 유럽의 석학 및 전·현직 관료들이 모여 전략적 생존 공간을 모색했다. 10일 서울대학교 국가미래전략원(원장 강원택)이 주최하고 중앙일보가 후원하는 국제 심포지엄이 ‘급변하는 국제질서 속 한국과 유럽의 협력’을 주제로 열렸다.

행사를 기획한 강원택 원장은 개회사에서 “러·우 전쟁은 유럽의 안보 이슈에 그칠 것 같았지만, 북한은 파병을 했고 한국은 유럽의 재무장을 돕고 있다”며 “자유민주주의를 핵심 가치로 하는 유럽 국가들은 포퓰리즘과 극우 정치의 출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고, 한국은 2년 전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도전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양측이 처한 현실의 유사점을 지적하며 연대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번 행사는 최근 국제정치 무대에 충격을 안긴 ‘그린란드 사태’를 계기로 기획됐다. 지난해 초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북극 전략의 하나로 그린란드 병합을 강하게 요구하며 이에 반대하는 유럽 국가들을 상대로 보복 관세와 무력 사용 가능성까지 시사했다. 이에 유럽 내에선 자국 안보를 기존 대서양 동맹에만 의존할 수 없단 위기감이 고조됐다.

이같은 동맹 관계의 거래주의적 재편 추세는 한국에서도 당면 과제다. 트럼프 행정부는 관세 카드를 지렛대 삼아 지난해 11월 한·미 정상 간 합의물인 조인트 팩트시트(JFS)에서 3500억 달러(약 531조 200억 원) 규모의 대미 투자와 국방비 증액 등 막대한 안보 청구서를 관철했다.

이날 기조연설에 나선 게오르크 슈미트 주한 독일대사는 ‘고래들 사이에 낀 중견국’을 화두로 던졌다. 그는 현재 세계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및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 약화 위협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중국의 ‘제조 2025’ 전략에 따른 산업 공세 등 ‘자이텐벤데(Zeitenwende·시대적 전환)’에 직면했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미국의 안보 우산이 축소되면서 유럽이 더 많은 안보 책임을 떠안게 됐다. 러·우 전쟁 종전시 우크라이나 재건은 유럽과 한국에게 기회로 주어질 시장”이라고 강조했다. 또 “과거 중국에 의존하던 많은 독일 기업들이 이제는 예측가능성과 안전성을 찾아 한국과의 공급망 연결고리를 강화하고 있다”며 양측이 연대할 수 있는 접점을 짚었다.

엘리자베스 요한슨 노게스 브뤼셀 자유대 교수도 “트럼프 행정부가 국제법이 아닌 개인적 판단으로 일방주의적 행보를 보이며 다자주의 체제를 약화시키고 있다. 유럽은 독자적인 안보를 조직해야 하는 난제에 직면했다”고 우려했다. 이어 “EU의 자산인 조정과 조율을 바탕으로 한국, 캐나다, 호주 등 유사한 입장을 가진 나라들끼리 국방·사이버 보안 협력을 대폭 확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10일 서울대학교 국가미래전략원(원장 강원택) 주최 ‘급변하는 국제질서 속 한국과 유럽의 협력’이란 국제 학술대회가 열렸다


이날 ‘대북정책’을 놓고 머리를 맞댄 자리에선 한·미·일이 기존 비핵화 목표인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핵 폐기)란 틀을 탈피해 현실적인 공존을 도모해야 한다는 논쟁적인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안토니오 피오리 이탈리아 볼로냐대 부교수는 “핵 보유를 헌법에 명시한 북한에 즉각적 비핵화만을 요구하는 것은 현실성이 떨어지며 정책적 마비를 초래한다”고 비판했다. 대안으로 그는 ‘차가운 평화(Cold Peace)’를 제안하며 “상시 소통 채널을 구축하고 군비 통제 협상 등 위기관리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반면 국내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이런 구상은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하는 결과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외교부 1차관을 지낸 최종건 연세대 교수는 “CVID가 현재 선언적 목표에 머물러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북한의 전략적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면서도 “한반도 비핵화라는 최종 목표 자체를 폐기해서는 안 되며, 양보 없는 억지력 유지가 필수적”이라고 선을 그었다. 마상윤 가톨릭대 교수도 “북한과의 거래적 관계 하에서 북한이 한·미 연합훈련 중단이나 주한미군 철수 등 안보적 대가를 요구할 경우 한국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이날 심포지엄에 이어 11일엔 유럽에서 활동 중인 한국학 연구자들이 참여하는 전문가 라운드테이블이 서울대 우석경제관에서 열린다. 유럽의 시각에서 한국의 정치·외교적 위상을 진단하고, 정책 협력의 새 경로를 탐색하는 자리가 될 예정이다.

윤지원 기자 yoon.jiwon1@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