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위원회는 끝났다"…亞 영화 자본, 사모펀드·정부로 재편
코로나 뒤 은행·헤지펀드 이탈한 자리, 새 자본이 채워
영화산업의 자금 지형이 바뀌고 있다. 한때 대기업 계열 투자사와 제작위원회가 주도하던 영화 투자 시장에 사모펀드와 독립 투자사, 정부 자금이 새 축으로 떠오르고 있다. 극장 흥행 수익에 의존하던 투자 방식에서 벗어나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판권과 웹툰·게임 등 지식재산(IP) 확장 수익까지 겨냥하는 구조로 재편되면서 아시아 영화산업의 자금 조달 모델이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10일 영화업계에 따르면 이러한 변화는 한국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사모펀드 ATU파트너스는 나홍진 감독의 신작 '호프'에 150억원을 투자했다. 지난 1월 160억원 규모로 결성한 특수목적법인(SPC) 'ATU컬처테크 6호 사모투자'를 재원으로 활용했다. 프로젝트 펀드를 조성해 영화에 투자한 첫 사례로, 한국성장금융투자운용과 MG캐피탈 등이 출자자로 참여했다.
ATU파트너스는 모태펀드와 한국성장금융투자운용의 위탁운용사로 잇달아 선정되며 콘텐츠 전문 사모펀드로 입지를 넓혀왔다. 단순한 극장 매출을 넘어 글로벌 OTT 판권, 웹툰·게임·MD(상품) 사업 등으로 수익원을 확대하는 'IP 확장형 투자 모델' 구축을 목표로 하고 있다.
호프는 비무장지대(DMZ) 인근 가상의 항구 마을 호포항에서 미지의 존재를 추적하던 중 마을이 파괴 위기에 놓이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나홍진 감독이 연출과 각본, 제작을 맡았으며 황정민·조인성·정호연 등이 출연한다. 제작비는 500억원 이상이 투입됐다고 알려졌다.
사모펀드가 이처럼 대형 프로젝트 투자에 나선 배경에는 기존 기관투자자들의 이탈이 자리하고 있다. 2019년 영화 '기생충'에는 우체국금융, KDB캐피탈, IBK캐피탈, 하나금융투자 등 기관투자자와 헤지펀드가 대거 참여했다. 그러나 코로나19 이후 극장 시장이 급격히 위축되고 '외계인' 등 대작들이 잇따라 흥행에 실패하면서 신한은행과 대성프라이빗에쿼티 등 주요 투자자들이 시장에서 발을 뺐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현재 민간 영화 투자 펀드는 약 열 곳 정도다. 정부도 영화산업 회복을 위해 810억원 규모의 긴급 자금을 투입했다. 투자업계 관계자는 "대기업 계열 투자사의 투자 규모가 줄어들면서 새로운 자금 조달 방식이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며 "IP 확장형 투자 모델 역시 아직 초기 단계인 만큼 시장에 안착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변화는 한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도에이에서 10년 이상 배급·제작 업무를 맡았던 기이 무네유키가 지난해 K2픽처스를 설립하고 K2P 필름펀드를 출범시켰다. 수십 년간 유지돼 온 제작위원회 체제에서 벗어나 외부 자금을 유치하면서도 IP는 자사에 귀속시키는 구조다. MUFG은행, 모리트러스트 등 약 10개 기관투자자로부터 400억원 규모의 자금을 조성했으며, 향후 최대 900억원의 차입을 추가로 추진할 계획이다.
태국에서는 전기장비 수입업으로 자산을 축적한 차얌폰 태라타나차이가 가족기업 형태의 시네마22를 설립해 아시아 예술영화에 꾸준히 투자하고 있다. 지난해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대상을 받은 '쓸모 있는 귀신'과 부탄 영화 '총을 든 스님' 등이 대표 투자작으로 꼽힌다.
정부 차원의 지원 경쟁도 확대되는 추세다. 싱가포르 정보통신미디어개발청(IMDA)은 동남아 공동제작 지원 사업을 통해 말레이시아 영화 '호랑이 소녀', 베트남 영화 '돈 크라이 버터플라이' 등의 성과를 냈다. 일본은 태국과 말레이시아에 이어 해외 촬영 유치를 위한 제작비 환급(리베이트) 제도를 도입했다. 최근에는 MUFG은행과 도쿄해상일동화재보험에 영화 제작 가치 평가를 위한 공통 기준 마련을 의뢰했으며, MUFG은행은 내년부터 영화 프로젝트 대출 사업에 본격 진출할 계획이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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