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극장 사로잡은 '참교육', 그 도파민의 정체
[박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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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넷플릭스 시리즈 <참교육> 스틸컷 |
| ⓒ 넷플릭스 |
이 환호를 단순한 취향으로 넘길 수는 없다. 사람들이 사적 제재에 열광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현실의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매일의 뉴스가 교권 추락과 소년범죄를 중계하고 법은 피해자를 충분히 지키지 못한다. 무력감은 분노가 되고 분노는 출구를 찾는다. <참교육>은 그 출구를 정확히 겨냥했다. 국가가 공인한 '체벌 면허'라는 판타지. 그 달콤함이 지금 안방극장을 사로잡은 도파민의 정체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정의인가, 아니면 잘 설계된 분노의 상품인가.
복잡함을 삼켜버린 카타르시스의 쾌감
<참교육>은 홍종찬 감독의 창작물이 아니다. 채용택·한가람의 네이버 웹툰을 원작으로 한 실사화다. 그리고 원작 웹툰의 흥행 공식은 처음부터 '타격감'이었다. 가해 학생이 마침내 쓰러지는 그 한 컷의 쾌감이 이 웹툰이 팔린 이유였다. 홍종찬 감독은 그 재료를 물려받았다.
흥미로운 지점은 여기다. 그는 전작 <소년심판>(2022)에서 정반대의 문법을 보여준 감독이다. 수갑 찬 아이를 값싼 구경거리로 소비하지 않으려 카메라를 절제했고, 판사 심은석(김혜수 분)의 차가운 분노와 차태주(김무열 분)의 뜨거운 고뇌를 부딪치게 했다. 그 법정은 처벌의 공간이 아니라 소년을 괴물로 키운 가정과 사회가 드러나는 거울이었다.
<참교육>이 <소년심판>보다 후퇴했다면 그 이유는 흔히 말하는 "빌런이 평면적이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이 드라마는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한다. 박대석을 죽음으로 몬 류준형은 유력 정치인 아버지의 어긋난 부성 속에서 비뚤어진, '가해자가 된 피해자'다. 전교 1등 박현웅은 가해자처럼 보이지만 실은 입시 비리에 가담한 교사가 빚어낸 희생자다. 소년들을 괴물로 만든 사회적 뿌리는 분명히 화면 안에 있다.
문제는 그 뿌리를 다루는 태도다. <소년심판>이 그 뿌리 앞에서 멈춰 서서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었다면, <참교육>은 그 뿌리를 '응징을 위한 설정값'으로 소비한다. 어긋난 부성이 키운 또 하나의 피해자라는 그 사연은, 나화진의 분노가 불길로 타오르는 순간 카타르시스의 연료로 환산되어 증발한다. 구조를 응시하던 시선이 구조를 때려 부수는 쾌감으로 대체된 것이다. 후퇴는 복잡성의 부재가 아니라 복잡성을 카타르시스에 종속시킨 데 있다.
종속되는 것은 가해자의 사연만이 아니다. 이 드라마에는 분명한 선의가 있다. 어른은 아이를 외면하지 말고 지켜야 하며, 피해자는 혼자 삭이지 말고 믿을 만한 어른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고, 교육부로 대표되는 시스템은 교사와 학생을 고립시키지 말고 책임 있게 지원해야 한다. 작품은 이런 메시지를 또렷이 내건다.
다만 그 선의조차 결국 같은 자리로 흘러간다. 화면이 공들여 머무는 곳, 시청자가 환호하는 순간은 보살핌이나 지원이 아니라 응징의 장면이다. '어른이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명분은 폭력을 멈추는 자리에 서는 대신, 폭력에 정의의 옷을 입히는 장치가 된다. 선언된 주제는 보호이지만 형식이 보상하는 주제는 응징이다. 선의는 카타르시스의 연료가 될 때에야 비로소 화면 위에서 타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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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넷플릭스 시리즈 <참교육> 스틸컷 |
| ⓒ 넷플릭스 |
한쪽에는 폭력의 시대를 통과한 이들이 있다. 주로 장년이다. 교사의 매가 일상이던 교실, 교련 수업 중 제식이 틀렸다고 뺨이 날아가던 운동장을 그들은 기억한다. 이들이 이 시리즈 '체벌 면허'를 불편해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폭력으로 사람을 길러낸다는 실험은 이미 한 세대 전체를 대상으로 치러졌고 결과는 실패였기 때문이다. 매가 일상이던 그 공간에서도 약자는 짓밟혔고 아이들은 폭력을 질서로 배웠다. 그러니 이들에게 나화진의 주먹은 새로운 정의가 아니라 효과 없음이 증명된 과거로의 퇴행처럼 보인다.
맞은편의 형성 경험은 정반대다. 주로 젊은 세대다. 이들이 통과한 것은 폭력의 과잉이 아니라 권위의 공백이다. 교사를 조롱하는 영상이 조회수를 올리고, 2023년 서울 서이초등학교의 젊은 교사가 세상을 떠난 일을 계기로 수만 명의 교사가 검은 옷을 입고 거리로 나섰다. 한때 70%를 넘던 교직 만족도가 20%대로 주저앉았다. 이들에게 교실은 권위가 폭주하는 곳이 아니라 누구도 가해자를 멈춰 세우지 못해 교사도 학생도 함께 다치는 곳이다. 이들이 이 시리즈에 통쾌함을 느끼는 건 폭력이 좋아서가 아니다. 마침내 누군가를 '지킬 힘'을 가진 어른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력의 시대를 사는 이들의 절박한 응답이지 단순한 감정의 폭발이 아니다.
그래서 이 충돌의 핵심은 '폭력은 옳은가 그른가'가 아니다. 다만 분명히 해 둘 것이 있다. 이 갈림은 나이의 문제라기보다 어떤 교실을 통과했느냐의 문제다. 폭력의 시대를 산 이는 대체로 장년이고 권위 공백의 시대를 산 이는 대체로 젊지만, 경계는 출생연도가 아니라 각자가 입은 상처에 그어진다. 두 자리는 거울처럼 뒤집힌 상처에서 출발한다. 한쪽은 권위의 폭력에 데었고 다른 쪽은 권위의 부재에 베였다. 한쪽은 "매로는 안 된다"를 몸으로 배웠고 다른 쪽은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다"를 몸으로 겪는다. 둘은 사실상 다른 질병을 이야기하고 있다. 진짜 다툼은 폭력의 정당성이 아니라 누구의 현실이 문제의 기준이 될 것인가를 두고 벌어진다.
여기서 양쪽 모두 경계해야 할 함정이 있다. 한쪽에서는 "우리가 다 겪어봐서 안다, 매로는 사람 못 만든다"는 확신이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그러나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것은 지혜가 아니라 "라떼는 말이야"가 된다. 젊은 세대가 염증을 느끼는 건 비폭력이라는 가치 자체가 아니다. 지금 자신이 겪는 고통이, 더 혹독했다는 남의 과거 앞에서 번번이 무효 처리되는 그 경험이다. 거꾸로 다른 한쪽은 현실이 절박하다는 이유로 자기 상처만을 유일한 척도로 세운다. 어느 교훈이든 훈계로 내려놓는 순간 상대는 귀를 닫는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그 유혹에서 자유롭지 않다. 내가 통과한 시대의 결론을 정답으로 믿고 싶고, 동시에 마음 한구석에서는 화면 속 응징의 쾌감에 끌린다. 확신은 그렇게 단단하지 않다.
이 시리즈의 진짜 쓸모는 여기에 있다. 작품은 두 세대가 서로를 얼마나 못 알아보는지를 드러낸다. 비극은 어느 한쪽이 틀렸다는 데 있지 않다. 양쪽 모두 실재하는 상처를 가리키는데, "라떼"와 "염증"이 맞부딪치는 소리에 묻혀 어느 상처도 치료받지 못한다는 데 있다. 세대가 서로를 처단할 괴물로 지목하기 시작하면, 정작 둘을 함께 베고 있는 그 시스템만 무사히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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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넷플릭스 시리즈 <참교육> 스틸컷 |
| ⓒ 넷플릭스 |
작중 인물의 이 대사가 시리즈의 논리를 압축한다. 현실이 괴물 같으니 더 큰 괴물을 불러 처단하겠다는 선언이다. 그러나 괴물을 잡으려 더 큰 괴물을 소환하는 순간, 우리는 법치라는 사회적 합의 자체를 잃는다. 서두의 빅브라더는 그렇게 완성된다.
더 위험한 것은 이 '괴물 사냥'이 화면 밖에서 되풀이된다는 사실이다. 상대를 이해할 대상이 아니라 처단할 괴물로 규정하는 문법을, 우리는 정치에서, 성별 사이에서, 그리고 세대 사이에서 매일 연습한다. 장년은 젊은 세대의 분노를 철없는 치기로, 젊은 세대는 장년의 우려를 고리타분한 훈계로 처단한다. 그렇게 서로를 괴물로 지목하는 동안, 정작 둘을 함께 베어 온 그 시스템만 멀쩡히 살아남는다. 우리가 손봐야 할 상대는 처음부터 서로가 아니었다.
이 시리즈가 안긴 통쾌함의 크기는, 결국 그 시스템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무력감의 크기였다. 그러니 <참교육>은 우리 사회를 향한 고발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스스로 써 내려간 진단서에 가깝다.
진단서를 받았다면 처방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 처방은 세대를 심판하는 일이 아니라 바로 그 시스템을 보완하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진단서를 쥐고도 자꾸 방법부터 묻는다. 체벌이냐 학생 인권이냐, AI 도입이냐 평가 개혁이냐. 정작 '무엇을 위한 교육인가'라는 목적은 비워둔 채 도구만 갈아 끼우니, 어떤 방법을 들여도 제도는 해마다 뒤집히고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한다. 순서가 틀렸다. 교육이 향할 목적과 방향이 먼저 서고 거기에 맞춰 교실의 환경을 갖추려는 노력이 앞설 때에야 비로소 어떤 도구도 제자리를 찾아 정책으로 뿌리내린다.
그러니 화면 속 괴물을 어떻게 응징하는지 구경하거나 옆 세대를 향해 삿대질하는 데 몰두하기 전에 우리는 아이들의 교실과 공부방부터 들여다봐야 한다. 거기서 우리가 아이들을 어떤 사람으로 길러내려 하는지, 그리고 교사와 부모와 제도가 무엇을 떠받쳐야 하는지부터 물어야 한다. 그 물음에 답이 설 때에야 방법도 제 몫을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진짜' 교육은 거기서 시작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필자의 브런치(@4indie)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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