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가 멈추는 날… 사람은 함께 멈추지 않는다

2026. 6. 10.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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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의 지구 사용 설명서] 지구의 자전이 멈춘다면
게티이미지뱅크


이스라엘 백성이 아모리 사람들과 싸우던 날이었다. 전투는 길어졌고 날은 저물어가고 있었다. 그때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아뢰며 외쳤다.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 성서는 그날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 거의 종일토록 지지 않았다고 기록한다.

고대 사람들의 눈에는 해가 움직였다. 아침이면 해가 동쪽에서 떠오르고 저녁이면 서쪽으로 졌다. 그러니 낮이 길어지는 사건은 당연히 “해가 멈춘 일”로 표현됐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안다. 낮과 밤을 만드는 것은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기 때문이 아니라 지구가 스스로 돌기 때문이다. 지구가 하루에 한 바퀴씩 자전하기 때문에 우리는 아침과 낮, 저녁과 밤을 경험한다.

그렇다면 상상해 보자. 정말로 해가 하늘에서 멈춘 것처럼 보이려면 지구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할까. 과학의 언어로 말하면 지구의 자전이 멈추거나 극도로 느려져야 한다. 그런데 지구 자전이 멈춘다는 것은 단순히 하루가 조금 길어지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지구 전체의 시간표가 무너지는 일이다.

지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조용히’ 돌고 있다. 우리는 그 움직임을 거의 느끼지 못하지만 실제로 그 속도는 엄청나다. 적도에서는 시속 약 1670㎞(초속 465m), 서울에서는 시속 1325㎞(초속 368m)다. 비행기보다도 빠른 속도로 지구 표면이 동쪽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 셈이다.

만약 이 거대한 회전이 갑자기 멈춘다면 어떻게 될까. 땅은 멈추지만 땅 위의 모든 것은 관성 때문에 계속 동쪽으로 돌아가려 할 것이다. 자동차가 급정거하면 몸이 앞으로 쏠린다. 지구가 급정거하면 그 규모는 자동차가 아니라 행성이다. 사람과 동물, 나무와 건물, 바다와 공기 모두 지금까지 움직이던 방향으로 쓸려 나간다.

그 결과는 재난 영화보다 훨씬 심각하다. 땅 위의 생명체는 살아남기 어렵다. 바다는 대륙 위로 밀려오고 대기는 거대한 폭풍이 된다. 우리가 바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공기의 움직임이다. 지구가 멈췄는데 공기는 계속 움직이려 한다면 그것은 보통 바람이 아니다. 행성 전체를 휩쓰는 폭력적인 공기의 질주다. 산과 숲과 도시가 한꺼번에 휩쓸린다.

바다도 마찬가지다. 바닷물은 얌전히 제자리에 남아 있지 않는다. 지구가 돌고 있는 동안 바닷물도 함께 돌고 있다. 지구가 갑자기 멈추면 바다는 거대한 물덩어리가 되어 대륙을 향해 밀려간다. 낮은 평야와 강 하구, 섬들은 순식간에 물에 잠긴다. 인류 문명은 해안 가까이에 많은 도시를 세워 왔다. 자전의 급정지는 곧 문명의 급정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은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없다. 지구 같은 거대한 행성의 자전이 갑자기 멈추려면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큰 힘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상상만으로도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지구의 자전은 그냥 배경이 아니다.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 모든 것이 그 회전 위에서 안정돼 있다.

그렇다면 지구가 아주 천천히 멈춘다면 괜찮을까. 관성으로 모든 것이 날아가는 재앙은 피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지구는 더 이싱 우리가 알던 지구가 아니게 된다. 먼저 24시간짜리 하루가 사라진다. 지금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고 낮에 활동하고 밤에 잠든다. 식물은 낮에 햇빛을 받아 광합성을 하고 밤에는 다른 방식으로 에너지를 사용한다. 동물들은 낮과 밤의 리듬에 맞추어 사냥하고 숨고 이동한다. 인간의 몸도 24시간 리듬에 맞추어 체온과 호르몬과 수면을 조절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자전이 멈추면 24시간 리듬도 사라진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동안 태양의 위치는 아주 천천히 변하므로 한 지역에는 몇 달씩 낮이 이어지는 동안 반대쪽에는 몇 달씩 밤이 계속된다. 계속 낮인 곳은 땅이 달아오르고 물이 증발하며 계속 밤인 곳은 기온이 떨어지고 물이 언다. 지구는 한쪽은 너무 뜨겁고 다른 쪽은 너무 차가운 극단적인 행성으로 변한다.

바람과 바다의 흐름도 크게 달라진다. 지구가 자전하기 때문에 공기와 바닷물은 곧장 움직이지 않고 휘어진다. 이것을 코리올리 효과라고 한다. 태풍이 회전하고 무역풍이 불고 해류가 방향을 바꾸는 데에는 지구 자전이 깊이 관여한다. 자전이 멈추면 지구의 대기와 해양 순환은 지금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인다. 기후는 낯선 질서를 갖게 되고 우리가 알고 있는 계절풍과 해류와 날씨의 규칙도 모두 무너진다.

바다의 모양도 달라진다. 지구는 완전한 모양의 공이 아니다. 자전 때문에 적도 쪽이 조금 부풀어 오른 모양이다. 그래서 바닷물도 지금의 지구 모양과 회전에 맞춰 분포하고 있다. 자전이 사라지면 긴 시간에 걸쳐 바닷물은 새로운 균형을 찾아 이동할 것이다. 어떤 곳은 바다가 물러나고 어떤 곳은 물에 잠길 수 있다. 지구 지도가 다시 그려지는 셈이다.

생명에게 가장 큰 문제는 시간의 상실이다. 생명은 공간 속에서만 살지 않는다. 생명은 시간 속에서도 산다. 꽃은 피어야 할 때를 알고 새는 이동해야 할 때를 알고 곤충은 깨어나야 할 때를 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는 손목시계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몸 안에 있는 생체시계에 맞춰서 산다. 지구의 자전은 그 생명의 시계를 맞추는 가장 오래된 박자다.

자전이 멈추면 식물의 광합성 리듬이 무너지고, 동물의 활동 리듬이 흔들리고, 바다 생물의 산란과 이동도 영향을 받는다. 농업도 큰 타격을 받는다. 인간은 전등을 켜고 에어컨과 난방을 사용할 수는 있지만, 지구의 기후와 물과 생태계 전체를 대신 만들 수는 없다. 문명은 기술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지구의 안정된 리듬 위에 서 있다.

우리는 지구가 돈다는 사실에 별 관심이 없다. 그러나 해가 뜨고 지는 이 평범한 반복이야말로 생명을 살리는 거대한 장치다. 지구의 자전은 우리에게 시간을 나누어 준다. 낮에는 햇빛을 받고 밤에는 식는다. 너무 뜨거워지기 전에 어둠이 오고, 너무 차가워지기 전에 다시 아침이 온다. 지구는 돌면서 생명을 달래고 조절한다.

여호수아서의 이야기는 신앙의 언어로 읽어야 할 장면이다. 그것은 고대 전쟁터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외면하지 않으셨다는 고백이다. 과학의 언어로 그 장면을 그대로 계산하면 지구는 견딜 수 없는 재앙을 맞는다. 그날 이스라엘 백성은 시간이 자신들의 손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해와 달도, 낮과 밤도 인간의 계산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고백이 그 이야기 속에 담겨 있다.

과학은 우리에게 지구가 얼마나 정교하게 움직이는지 알려 준다. 신앙은 그 질서를 당연하게 여기지 말라고 말한다. 지구가 오늘도 돈다는 사실은 너무 평범해서 잊기 쉽지만, 그것은 생명을 위한 놀라운 조건이다. 아침이 오고 저녁이 오고 다시 밤이 지나 새날이 오는 일, 그 반복 속에서 우리는 먹고 자고 사랑하고 기도하며 살아간다.

오늘도 지구는 조용히 돈다. 그 회전 덕분에 하루를 얻는다. 여호수아의 하늘에서는 태양이 멈춘 듯 보였지만, 우리의 하늘에서는 오늘도 태양이 떠오르고 저문다. 어쩌면 이 평범한 자전이야말로 날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창조의 선물인지 모른다. 오늘도 지구 자전으로 아침을 맞게 하시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일이다.

이정모 전 국립과천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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