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부터 옷장 앞에... 선거 참관인으로 본 투표소의 하루

윤태정 2026. 6. 8.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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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숙한 분위기에서 최선 다한 날... 참정권 위한 노력 빛 잃게 만든 일, 어찌 수습할지 애가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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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정 기자]

지난 6월 3일 새벽, 나는 옷장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그날은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있던 날이다. 옷차림에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파랑, 빨강, 노랑, 주황을 빼고 보니 흑색 계열의 옷이 안전할 것 같았다. 간편한 복장으로 집을 나섰다. 새벽 5시의 공기는 맑았다. 훈풍 한 줄기가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 오늘은 선거 참관하기 딱 좋은 날이네.'

그렇다. 나는 '선거 참관인' 자격으로 투표소를 향하고 있었다. 사실 그동안 선거할 때마다 보이는 '참관인'이라는 명찰을 달고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무척 궁금했다. 그랬던 내가 이번에 참관인 명찰을 달게 되었다. 선거 현장에 있을 걸 생각하면 가슴이 설렜다.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겠다는 호기심으로 이날을 기다렸다.

마음가짐부터 달라졌던 날
 6·3지방선거일인 3일 서울 서초구 반원초등학교 투표소에서 참관인들이 투표 현장을 지켜보고 있다.
ⓒ 연합뉴스
평생 처음 해보는 일이라 잠이 올 리가 없었다. 공무원인 아들도 새벽 4시에 일어나 택시를 타고 현장으로 떠났다. 선거 현장을 자꾸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나도 모르게 마음가짐이 경건해지고 표정도 진지해졌다. 집을 나서기 전 옷매무새를 다시 고치고 전에 받아 놨던 문자도 한번 더 꼼꼼히 확인했다.
투표 참관인에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투표 참관인의 역할은 투표 용지 교부 상황과 투표하는 모습을 참관하는 것입니다. 투표 간섭, 부정행위 등은 투표 관리관에게 즉시 이의를 제기하고 투표 시작 전 빈 투표함을 확인, 마감 후 투표함을 최종 봉인할 때 참관합니다. 특정 정당이나 후보자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언행은 금지, 투표하러 온 유권자에게 인사를 건네며 영향을 주는 행위 금지, 특정 정당을 연상시키는 색상의 옷 등도 착용 금지입니다.

내가 배정 받은 곳은 집과 가까워서 걸어갈 만한 거리였다. 투표소 인근 '민주주의 꽃은 선거'라고 쓰인 현수막 아래에서 '셀카'로 사진 한 장을 찍었다. 유권자인 동시에 선거 참관인 자격을 얻은 오늘을 역사의 한 페이지로 기록하고 싶었다.

건물로 들어서니 젊은 공무원 한 분이 친절하게 안내해주었다. 실내로 들어와 참관인 명찰을 받고 자리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선거 준비는 이미 완벽하게 이루어진 상태였다. 문득 전날 밤 투표장 설치 작업을 하느라 늦게 들어온 아들의 피곤한 얼굴이 떠올랐다. 아들 생각에 내 시선은 자연스레 공무원들 쪽을 바라보게 되었다.

일렬로 배치된 책상 앞에 두 명씩 짝 지어 앉은 젊은 공무원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진지하고 차분했다. 실내 분위기는 마치 아무 일 없이 선거가 잘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듯 엄숙하고 경건하기까지 했다. 투표의 모든 준비를 주도하는 분은 투표 관리관이었다.

우리 참관인 일곱 명은 사인을 한 뒤에 투표함 주위로 이동하여 살폈다. 투표함 뚜껑을 열고 함이 비었는지 확인하고, 봉인을 꼼꼼하게 하는 모습까지 지켜봤다. 다음으로 선거 종사원 모두가 일어나서 오른손을 들고 선서를 했다. '투명하고 공정하게 진행하겠다'는 선서였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 시간은 흘러 시계가 오전 6시를 가리켰다.

"현재 시각 6시, 지금부터 투표를 시작하겠습니다."

관리관의 선언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 젊은 유권자 한 명이 들어와 투표를 개시했다. 이번 선거는 뽑아야 할 표가 많아 1차 기표 후에 함에 넣고, 다시 2차 투표 용지를 받아 기표한 뒤 함에 넣어야 했다. 연로하신 어르신들을 비롯해 일부 유권자들은 연신 고개를 갸우뚱하며 질문을 쏟아냈다. 그럴 때마다 선거 종사원들은 빠르고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었다.

똑같은 안내를 수백, 수천 번 반복하는 젊은 공무원들의 모습을 보며 마음에 짠한 바람이 불었다. 저 말을 12시간 내내 반복해야 할 그들의 목도 걱정되었다.

'같은 말을 계속하자면 얼마나 목이 아플까. 종일 계속 반복해야 할텐데…'

젊은 청년들의 엄마가 이 광경을 봤다면 나처럼 그들의 고충을 염려할 게 분명했다. 정치인들의 거창한 구호 뒤에 묵묵히 애쓰는 노동의 가치도 알아봐 달라는 구호라도 외치고 싶었다.

투표자 중에 특별한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이전에 제자였던 아이가 고3 학생이 되어 유권자로 투표장에 나타나 깜짝 놀랐다. 비록 대화는 주고받지 못했으나 눈빛으로는 안부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잘 자라준 모습이 기특하여 잠시 어렸을 때 얼굴도 떠올려보았다. 뒤이어 앳된 유권자들의 발길을 보면서 민주주의의 세대 교체를 실감할 수 있었다.

투표소에 가기 전, 참관인으로서 할 일을 더 꼼꼼하게 챙기려고 인터넷을 찾아보았다. 특별히 어려운 일은 없고, 지정된 좌석에 앉아 선거권자들이 투표하는 과정을 똑바로 지켜보면 되었다. 하지만 봉사 활동이 아닌 돈을 받고 하는 일이라 책임감 있게 임했다. 과오 없이 오후 참관인과 임무를 교대하고 투표소를 나왔다.

집으로 가는 길에 왠지 모를 뿌듯함이 온몸을 감싸 안았다. 민주주의의 가장 기초적인 투표의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자랑스러웠다. 역사의 현장에서 유권자들의 투표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또 각 대표를 뽑기 위해 얼마나 철저한 준비를 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사는 사회를 더욱 좋게 만들기 위해 앞장서야 할 대표를 뽑는 일에 얼마나 많은 자원이 필요했는지. 시간, 노동, 인력, 자본을 쏟아부어 마련된 이번 선거였다. 이토록 공들여 뽑힌 국민의 대표가 헛된 생각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오로지 국민만 생각하고 올바르게 활동해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우리나라가 힘차게 잘 돌아가도록, 민주주의 테두리 안에서 서로 대립하지 말고 협력하여 발전할 하기를 바랐다.

공동체의 권리가 안전하게 굴러가도록 관리하는 일... 그런데 어찌 이런 일이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투표일인 3일 부산 해운대구 중2동 행정복지센터 2층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시민들이 투표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그런데 선거가 완전히 끝나기도 전에 들려오는 뉴스에 마음이 녹아내렸다. 아무 사고 없이 완벽하게 잘 이루어졌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다른 곳에서 문제가 발생했다(관련 기사 : "용지 부족 50곳·투표 중지 22곳"...노태악 선관위원장 사퇴). 우리는 지금 계속되는 선거 후폭풍에 시달리고 있다.

내가 있던 그 투표 현장에는 공정하고 투명한 선거를 위해 고생했던 공무원들과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기 위해 권리를 다한 유권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노력이 빛을 잃는 것 같아 마음 한편이 헛헛하다. 도대체 이런 일이 왜 발생한 걸까. 각자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국민의 참정권을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공동체를 위해 권리를 행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권리가 안전하게 굴러갈 수 있도록 관리를 철저히 하는 일이다. 신중을 기하고 철저하게 준비해야 할 곳에서 커다란 허점이 발생했다. 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 일어났다고 믿기 어려운 어처구니없는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머리를 맞대고 화합을 외쳐도 부족한데 다시 분열로 치닫게 한 빌미가 되었으니 어찌 수습할지 애가 탄다.

제도가 흔들릴 때일수록 나부터 평정심을 유지해 마음을 잘 붙들어야겠다. 그날 아침, 흑색 계열의 옷을 찾아 입었던 나의 자부심을 지키고 싶다. 유권자의 소중한 한 표를 안전하게 행사할 수 있도록 민첩하게 움직이던 공무원들의 사명감이 희석되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참관한 투표소의 공무원들과 이웃들은 정직하고 공정하게 권리와 의무를 행사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땀 흘리며 일한 그들의 사명감을 다시금 생각해 본다. 12시간 동안 목이 쉬어라 똑같은 내용의 말로 유권자들을 안내하던 그 수고와 유권자들의 소망이 제발 헛되지 않았으면. 아무쪼록 하루빨리 수습이 되어 국가의 위신이 바로 섰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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