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0년 전 바닷길을 열다' 지중해 발효의 기원
왜 우리는 '세계의 발효'를 찾아 나섰을까. 발효는 인류가 발견한 가장 오래된 '푸드 테크(Food Tech)' 중 하나다. 경주에서 전통 장독으로 액젓, 간장, 된장을 만드는 식품기업 '진아에프앤씨'의 송연실 대표와 이찬재 실장(서울대 푸드테크학과 석사과정)은 세계의 발효문화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궁금했다. 스페인 레스칼라의 엠푸리에스와 타리파의 바엘로 클라우디아, 안달루시아의 하몬과 치즈 마을, 그리고 아프리카의 발효 현장까지. '세계의 발효를 찾아서'는 인간이 자연의 시간과 미생물을 빌려 음식을 만들어 온 문명의 흔적을 따라가는 탐사 기록이다. <기자말>
[이찬재·송연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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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페인 레스칼라(L'Escala) 엠푸리에스(Empuries) 유적지에서 고대 지중해 발효 문명의 흔적을 살펴보고 있는 송연실 진아에프앤씨 대표(왼쪽)와 이찬재 실장. 뒤로 펼쳐진 코스타 브라바의 푸른 지중해는 한때 액젓을 실은 무역선들이 오가던 고대 발효의 바닷길이었다. |
| ⓒ 이찬재 |
야자수가 줄지어 선 이 아름다운 해안의 이름은 '코스타 브라바(Costa Brava)'. 스페인어로 '거친 해안(Wild Coast)'이라는 뜻이다. 스페인에서도 손꼽히는 절경으로 이름난 이곳은 부드러운 모래사장이 끝없이 펼쳐지는 여느 휴양지와는 전혀 다른 풍경을 지닌다. 깎아지른 절벽과 바위 해안이 굽이굽이 이어지고, 그 거친 틈새마다 작은 만(灣)과 수백 년 된 어촌 마을들이 숨어 있는, 지극히 야성적인 땅이다.
그러나 경주에서 전통 방식으로 장독에 액젓을 담그는 사람에게 이 거친 바다는 풍광 좋은 관광지만이 아니었다. 무려 2500년 전, 고대 그리스 상인들의 무역선들이 항아리에 발효 액젓을 가득 싣고 험난한 파도를 넘나들던 지중해 발효 무역의 핵심 항로였기 때문이다. 현대 투싼의 SUV 가속 페달을 밟으며 해안선을 달리다 보니, 수천 년 전 돛을 펄럭이며 액젓을 실어 나르던 고대의 돛단배들도 꼭 이 짠 바닷바람을 맞으며 같은 해안을 통과했으리라는 생각에 묘한 흥분이 일었다.
거대한 사각 돛을 활짝 펼친 채 지중해의 바람을 가득 안고 항구로 들어오던 그리스 무역선. 그 선창 깊은 곳에는, 지중해의 천연 소금에 절여져 콤콤하고 진한 우마미(감칠맛)를 품은 수천 개의 액젓 항아리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을 것이다.
수천 년 전부터 이 길은 바다와 시간, 그리고 인류가 하나로 연결되던 오래된 지중해의 '발효 로드(Fermentation Road)'였다. 한반도 경주에서 전통 왕신 장독대를 지키며 멸치와 천일염만으로 액젓을 담그는 사람으로서, 지구 반대편 지중해 바닷길 위에서 2500년 전 발효 장인들의 숨결을 좇는 여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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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페인 카탈루냐 레스칼라의 엠푸리에스(Empuries) 유적지 전경. 바다를 따라 형성된 구역은 기원전 6세기 그리스인들이 세운 항구도시 엠포리온(Emporion)이고, 내륙의 광활한 평원에는 이를 계승·확장한 로마 도시가 자리하고 있다. |
| ⓒ 이찬재 |
유적지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한 공간 안에 두 개의 거대한 문명이 겹쳐져 있는 놀라운 풍경과 마주했다. 기원전 6세기경, 바닷길을 통해 지중해 무역을 맹렬히 개척하던 고대 그리스인들은 바로 이 해안에 '시장(Market)'을 뜻하는 '엠포리온(Emporion)'을 세웠다. 배를 대기 좋은 이 항구를 거점으로 삼아 현지 이베리아 부족과 활발히 교류하며, 와인·올리브유·소금·발효 액젓 같은 고가의 식품을 거래하는 거대한 교역로를 다져 나갔다.
이후 기원전 3세기경, 제2차 포에니 전쟁을 거치며 로마가 이베리아 반도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이곳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다. 로마는 카르타고에 대응하기 위해 엠포리온을 군사 거점으로 활용했지만, 흥미롭게도 그리스인들이 닦아놓은 해상 교역 시스템과 발효 시설을 파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위에 자신들 특유의 거대한 행정력과 고도화된 산업 체계를 덧붙여 신도시로 확장해 나갔다.
현재의 유적지를 살펴보면, 바닷가와 맞닿은 아래쪽에는 아기자기한 규모의 그리스식 도시 흔적이 남아 있고, 박물관이 자리잡은 언덕 위로는 웅장한 로마식 도로와 화려한 목욕탕, 원형 투기장, 신전이 펼쳐진다. 그리스인들이 모험심으로 바닷길을 열었다면, 로마인들은 그 길 위에 액젓의 대량 생산부터 지중해 전역 유통까지 아우르는 치밀하고 조직적인 제국의 산업 도시를 완성해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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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엠푸리에스 유적지 안내판에 소개된 그리스~로마 시대 가룸 생산 공장. 가운데 안뜰에서는 생선을 손질하고 소금에 절였으며, 주변의 석조 발효조(Cetariae)에서는 지중해의 태양과 바닷바람 속에서 액젓이 숙성됐다. 발효조 내부에는 오푸스 시그니눔(Opus Signinum) 방수 코팅이 적용돼 있었다. |
| ⓒ 이찬재 |
고대인들에게 가룸은 오늘날 우리가 떠올리는 단순한 소금 대용품이나 액젓을 훨씬 넘어서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고대 로마의 유명한 요리서 <아피키우스(Apicius)>에 따르면, 채소 볶음·고기구이·해산물 요리·곡물 수프는 물론이고 전채 요리부터 와인 소스, 달콤한 디저트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식탁에 감칠맛을 불어넣는 마법의 조미료로 가룸이 쓰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액젓을 담그던 레시피 자체에 숨어 있다. 오늘날 동남아시아와 한국의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저가 액젓이 부패를 막기 위해 보통 25% 이상의 높은 염도로 숙성되는 반면, 고대 그리스·로마의 레시피는 생선 무게의 단 15% 정도에 불과한 소금만을 사용해 약 3개월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발효시켰다. 이 과정에서 생선 내장에 든 자체 단백질 분해 효소(자가소화효소)가 활성화되며 생선 살과 기름을 스스로 발효시켜, 훨씬 더 깊고 풍부한 감칠맛을 지닌 영롱한 호박색 액젓이 탄생할 수 있었다.
염도가 낮고 풍미가 살아 있던 고대의 가룸은 끓이거나 볶는 용도보다는, 와인과 섞은 오이노가룸(Oenogarum), 올리브유와 섞은 올레오가룸(Oleogarum), 식초와 섞은 오시가룸(Oxygarum) 형태로 식탁 위에서 '고급 테이블 드레싱 소스'로 뿌려 먹는 미식의 영역이었다. 염도가 높아 간을 맞추는 데만 쓰이는 현대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액젓으로는 결코 재현할 수 없는 세계다. 인류는 이미 2500년 전부터 단순히 생선을 보존하는 차원을 넘어, 효소와 미생물을 다스려 음식의 풍미를 증폭시키는 고도의 '감칠맛 과학'을 식탁 위에서 누리고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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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엠푸리에스 유적지에 남아 있는 고대 로마의 액젓 발효조. 현재는 돌벽과 바닥 일부만 남아 있지만, 2500년 전 이곳은 생선과 소금이 만나 가룸을 만들던 거대한 발효의 현장이었다. |
| ⓒ 이찬재 |
멀리서는 그저 무너진 집터처럼 보였지만, 가까이 다가가 단면을 들여다볼수록 단순한 저장 창고가 아닌, 치밀하고 과학적으로 설계된 대규모 발효 산업 시설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고대의 발효 탱크는 흙을 대충 파내 만든 '액젓 구덩이'가 아니었다. 무거운 돌과 석회로 견고하게 축조된 깊은 직사각형 또는 정사각형 구조물이었으며, 무엇보다 천장 없이 하늘을 향해 활짝 열린 개방형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이 개방형 설계는 지중해의 강렬한 태양 빛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코스타 브라바에서 불어오는 서늘하고 짭조름한 해풍이 탱크 위를 자연스럽게 통과하도록 치밀하게 의도된 것이었다. 외부와 차단된 육중한 스테인리스나 콘크리트 탱크로 온도와 위생을 완벽히 통제하는 현대 식품 공장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이다. 고대인들은 자연을 차단하는 대신, 자연환경의 온도 변화와 공기의 흐름 그 자체를 발효 시스템의 핵심 부품으로 끌어안았다. 소금, 태양열, 해풍의 조합은 생선 내부의 자가소화효소가 최적으로 작동하는 환경을 만들어냈다.
발효 탱크의 구조를 유심히 살피며, 나는 이 2500년 전의 돌 탱크가 품고 있는 철학이 한국의 전통 장독 발효와 본질적으로 맞닿아 있음을 깨달았다. 위생과 생산 효율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현대의 폐쇄 시스템에서는 속도와 대량생산의 이점을 얻을 수 있을지언정, 바람과 계절이 불어넣는 복합적인 풍미는 얻기 어렵다.
좋은 생선에 천일염을 버무리고, 햇빛과 바람 속에서 자연에 곁을 내어주며 천천히 시간을 익혀내는 방식. 고대인들은 소금이 단순히 부패를 막는 보존제가 아니라, 나쁜 부패균을 억제하고 이로운 효소를 활성화해 최적의 감칠맛을 끌어내는 미식의 열쇠라는 사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2500년 전 지중해의 태양 아래 익어가던 돌 발효 탱크와, 한국의 장독 속에서 자연과 호흡하며 익어가는 액젓은 2000년의 시간 차에도 불구하고, 대자연의 시간을 빌려 위대한 맛을 창조한다는 점에서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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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엠푸리에스 유적지의 그리스 시대 액젓 발효조 내벽. 붉게 남아 있는 흔적은 오푸스 시그니눔(Opus Signinum) 방수 코팅층으로, 가룸이 새어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적용된 당시 최첨단 FOOD TECH의 산물이다. 이는 고대 지중해 발효산업의 기술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로 평가된다. |
| ⓒ 이찬재 |
지중해의 햇살과 시간을 듬뿍 머금고 호박색으로 익어가는 맑은 가룸은 당대 최고의 부가가치를 지닌 귀족들의 사치품이었다. 이 귀한 액체가 돌 틈이나 땅으로 스며들어 한 방울이라도 손실되는 것을 막기 위해, 고대인들은 수조 내벽에 정교한 방수 처리를 했다. 발효 탱크 유적의 단면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붉은빛이 감도는 독특한 마감층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장식용 도료가 아니었다. 잘게 부순 도자기 조각과 붉은 토기 가루를 구운 석회, 모래, 흙과 정교한 비율로 혼합해 수조의 벽면과 바닥에 두껍고 꼼꼼하게 발라 올린 것이다. 물과 염분의 침투를 완벽히 차단하는 이 고대의 방수 코팅 기술을, 오늘날 고고학자들은 '오푸스 시그니눔(Opus Signinum)'이라 부른다.
현대의 대형 식품 공장들이 시멘트 탱크의 누수를 막고 위생을 확보하기 위해 무독성 에폭시 수지나 특수 화학 코팅을 쓰는 것처럼, 이들은 무려 2500년 전에 이미 도자기 가루를 이용해 액체 발효 식품 전용의 산업용 표면 처리를 상용화하고 있었다.
이 붉은 방수층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당시 엠푸리에스에서의 가룸 생산이 어촌 마을 아낙네들의 가내 수공업 수준이 아니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것은 고도의 건축 공학과 화학적 이해, 그리고 대량 생산을 위한 산업 시스템이 총동원된 당대 최고의 푸드테크(Food-tech)였다.
흙을 불에 구워 만든 도자기를 다시 부수어 가루로 내고, 그것을 석회와 섞어 미생물이 살아 숨 쉬는 발효의 요람을 코팅했다는 사실은 매우 상징적이다. 흙과 불, 그리고 그릇.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발효라는 위대한 화학적 변화를 통제하기 위해 늘 '도자기(세라믹)'라는 매개체를 곁에 두어 왔다.
이곳 엠푸리에스의 붉게 코팅된 돌 구덩이에서 시작된 발효의 시간은, 이제 지중해 전역으로 퍼져나가기 위해 또 다른 거대한 도자기 속으로 옮겨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로 로마 제국의 혈관을 타고 흐르던 물류 패키지, '암포라(Amphora)'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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