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국의 땅’ 美서 경기 치르는 이란…4년전처럼 국가 안 부를까

유엔(UN·193개)보다 회원국이 많은 세계 최대 규모 국제기구가 국제축구연맹(FIFA·211개)이다. 이런 FIFA가 가장 신경 쓰는 게 ‘탈정치’다. 특히 4년마다 열리는 월드컵에선 정치적 메시지를 내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규제한다. 전 세계인의 축제가 축구 이외 요인으로 혼란해지는 걸 막기 위해서다.
12일(한국시간) 개막하는 2026 북중미 월드컵에서도 FIFA 기조는 여전하다. 그럼에도 세계가 정치적으로 주목하는 팀이 있다. ‘적국’ 미국에서 경기를 벌이는 이란 축구대표팀이다. 이란과 미국이 지난 2월 28일부터 벌이는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쟁 종식을 위한 양해각서(MOU) 체결을 놓고 양국은 줄다리기 중이다.
선수·감독만 비자 준 미국…축협회장 등 14명 거부

대회 시작 전부터 이란과 미국은 ‘축구 외교전’ 중이다. 이란 축구협회는 최근까지 경기 장소를 멕시코로 변경해 달라고 FIFA에 요구했다. 미국의 자국 공격에 대한 항의표시와 안전 보장을 명분 삼았다.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경기는 미국에서 치르되, 베이스캠프는 애리조나주 투손에서 미국과 가까운 멕시코 티후아나로 바꿨다.

미국 측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대회가 임박했는데도 이란 대표팀에 비자 발급을 미루다 지난 6일에서야 움직였다. 26명의 선수를 비롯해 감독 등 필수 스태프에게만 비자를 내줬다. AP통신과 이란 언론에 따르면 이란 축구협회 사무총장과 대표팀 단장, 미디어 담당관 등 선수단 14~15명이 비자를 받지 못했다. 메흐디 타지 이란축구협회장도 비자 발급이 거부됐다고 뉴욕타임스가 전했지만, 이란 매체는 타즈 회장은 비자를 신청하지 않았다고 했다.
미국 정부 관계자는 “제도를 악용해 허위 명목으로 테러리스트가 미국에 잠입하는 걸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 3일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IRGC) 등 스포츠와 무관한 자들이 축구 대표팀에 섞여 미국 땅을 밟는 걸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타지 회장과 대표팀의 핵심 선수인 메흐디 타레미(올림피아코스), 에산 하지사피(세파한) 등 IRGC 복무 이력이 있는 이들의 미국 입국이 거부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주튀르키예 이란대사관은 “미국은 이란 축구 국가대표팀을 향한 의도적이고 차별적인 대우를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며 반발했다. 비자가 막힌 스태프들은 일단 베이스캠프인 티후아나에서 비자를 재신청할 계획이다.
양국이 축구 경기로 또 다른 ‘전쟁’을 치를 가능성도 있다. 이란과 미국(D조)이 각각 조 2위를 해 조별리그를 통과한다면 32강 토너먼트에서 맞붙게 된다.
이란 선수들 국가 부를까


지난 3월 호주에서 열린 여자 아시안컵에서도 이란 선수들은 한국과 경기에서 국가를 부르지 않았다. 지난해 말 반정부 시위 과정에서 시민들을 유혈 진압한 정부에 항의하는 의미에서다. 대회 후 정치적 탄압을 우려한 선수 2명은 호주로 망명했다.
이번 월드컵에선 상황이 다를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본 만큼 이란 내에서도 항전 의지와 반미 여론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IRGC 등 정권 수뇌부도 선수들의 반정부 행동 차단에 적극적이다. 간판 공격수인 사르다르 아즈문(샤바브 알 아흘리)는 지난 1일 발표된 이란 대표팀 최종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로이터통신 등 외신들은 이란 정부가 대표팀 승선을 막은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최근 아즈문이 미국의 우방국인 아랍에미리트(UAE)의 모하메드 빈 라시드 알 막툼 부통령(두바이 국왕)과 만난 사진을 공개한 것을 문제 삼았다고 알려졌다. 아즈문은 카타르 월드컵 당시에도 소셜미디어(SNS)로 히잡 시위를 지지한 바 있다.
팔라비 왕조 국기 경기장 나부끼나

일단 FIFA는 정치적·차별적 메시지를 금지하는 행동 수칙을 근거로 경기장에 79년 혁명 이전 왕정 시절 이란 국기와 관련 의류 반입을 허용하지 않기로 했다. 해당 국기는 현재 이란 국기와 같은 적·백·녹 삼색 무늬지만 중앙에 팔라비 왕조를 상징하는 사자와 태양 문양이 있다.
중동 전문가 카림 사자드푸르는 스포츠 전문매체 디애슬래틱에 “LA에서 사자·태양 문양 국기를 금지하는 건 미국 경기장에서 성조기를 막는 것과 비슷하다”며 “이란계 미국인들에게 이 국기는 조국에 대한 애정이자 현 이란 정부에 대한 반대 의사를 동시에 의미하기에 대규모 반발을 초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승호 기자 wonder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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