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기록물이 아니라, 등재될 이유를 써라"
[김슬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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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 발표 후 질의 응답을 응하는 발표자들 (왼쪽부터 김귀배, 이현경, 정종화) |
| ⓒ 김슬옹 |
이날 워크숍의 화두는 분명했다. 신청서 작성의 효율성을 높여 실무 부담을 덜고, 국제 기준에 부합하는 논리 구조로 등재 성공률을 끌어올리며, 무엇보다 심사위원과 신청기관 사이의 간극을 좁히자는 것이다. 기록유산을 아끼는 마음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마음을 유네스코가 읽을 수 있는 언어로 옮기는 기술, 이날 세 발표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짚어낸 것이 바로 그 '제대로 옮기기'의 기술이었다.
김귀배 부위원장 "국제자문위원은 한국 전문가가 아니다"
첫 발표는 김귀배 세계기록유산한국위원회 부위원장이 맡았다.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서 작성 실무 가이드'라는 제목 그대로, 신청서 양식의 1번 항목(제목)부터 11번 항목(신청을 지지하는 기타 정보)까지 조목조목 짚어 내려간 축조 해설이었다.
김 부위원장은 시작 전 유의사항부터 못 박았다. 반드시 최신 버전의 등재 신청 양식을 사용할 것, 일반 가이드라인(General Guidelines)과 등재 안내서(Register Companion), 작성 지침(Guiding Notes)을 모두 활용할 것, 그리고 최근 성공한 국내 등재 사례를 예시로 삼아 자문을 받을 것. 그중에서도 청중의 표정을 바꿔 놓은 한마디는 이것이었다. "국제자문위원은 한국 역사와 문화 전문가가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에게 자명한 가치도 바깥의 눈에는 낯설다는 것, 신청서는 바로 그 낯선 눈을 향해 쓰는 글이라는 것이다.
등재 절차의 골격도 명료하게 정리됐다. 등재 공고는 2년마다 나오고, 국가당 최대 2건까지 신청할 수 있되 공동 등재는 수량 제한이 없다. 누구나 신청할 수 있으나 제출은 반드시 MoW 국가위원회를 통해야 하고, 소유자와 보관자의 동의는 필수다. 제출된 신청서는 등재소위원회(RSC)의 평가와 질의, 국제자문위원회(IAC)의 권고를 거쳐 유네스코 집행이사회가 최종 승인한다. 김 부위원장은 "등재 과정은 최소 2년이 소요된다"라고 강조했다.
좋은 신청서의 기준으로는 4C를 제시했다. 모든 항목이 채워져야 하고(Complete), 정보가 올바르고 증명 가능해야 하며(Correct), 논리가 분명하고 쉬워야 하고(Clear), 불필요한 사족 없이 핵심만 간결하게(Concise) 담겨야 한다는 것이다. 200단어 이내로 쓰는 요약(Summary)은 "다른 모든 섹션을 완료한 후 가장 마지막에 작성하라"라는 실전 요령도 곁들였다.
항목별 해설에서도 실무자들이 놓치기 쉬운 대목들을 짚었다. 희귀성(7.2.1)에 대해서는 "희귀함과 독특함은 동일한 의미가 아니다"라며 "겸손할 필요는 없지만 과장하지 말라"라고 했고, 위험 평가(9.0)에 대해서는 "유네스코는 실제 상황을 알아야 한다"라며 솔직한 기술을 주문했다. 유네스코의 글로벌 우선 순위인 성평등(7.1.4) 항목은 기록유산이 여성의 역사적 역할과 삶에 대해 무엇을 알려주는지 상세히 기술하라고 했다. 전문가 추천(6.7)에 적는 최대 3명의 독립 전문가 이름과 연락처는 공개되지 않는다는 점, 이해관계자 협의(8.0)에는 지지 서한(Letters of support)을 추가하라는 점도 일러두었다.
기억은 박제된 과거가 아니다... 이현경 위원의 '세계적 중요성' 작성 전략
두 번째 발표자인 이현경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한국위원회 위원은 신청서 전체의 심장이라 할 '세계적 중요성(World Significance)' 서술에 발표 전체를 바쳤다. 세계적 중요성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 그리고 빈번히 일어나는 실수를 어떻게 만회할 것인가 세 가지 물음이 발표의 뼈대였다.
이 위원은 먼저 제도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유네스코는 인류의 집단적 기억상실을 막기 위해 1992년 세계기록유산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그해 보스니아 사라예보의 국립대학도서관이 포격으로 불타며 150만 권의 책이 잿더미가 된 사건은 이 프로그램이 왜 필요한지를 비극적으로 증명했다. "전쟁이 인간의 생각에서 비롯되듯, 평화를 지키는 힘도 인간의 생각 속에서 길러져야 한다"라는 유네스코 헌장의 정신이 이 제도의 바탕에 흐른다는 것이다.
이 위원이 제시한 세계적 중요성의 세 축은 명쾌했다. 첫째 세계 역사와 문화에 대한 영향력, 둘째 세계사적 맥락 속의 재해석, 셋째 현재와 미래에 걸친 지속적인 영향력. 이 세 축의 중심에 유네스코의 정신과 철학이 놓인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프로그램 명칭에 대한 해석이었다. 유네스코는 왜 '기록유산'이나 '세계사'가 아니라 '세계의 기억(Memory of the World)'이라 이름 붙였는가. 역사가 지나간 과거를 객관적으로 고착화한 텍스트에 가깝다면, 기억(Memory)은 현재를 살아가는 인류가 끊임없이 보존하고 접근하며 재해석해 나가야 하는 역동적이고 실천적인 대상이라는 것이다. 기록유산은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현재적 유효성'을 지닌 생명력 있는 자산이라는 선언이다. 따라서 세계적 중요성을 논증할 때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해당 기록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어떠한 현재적 의미와 가치를 던지는가"가 된다.
이 위원은 2025년 국제목록에 등재된 74건의 기록유산을 분석하며 최근 경향을 보여줬다. 과학 기록유산이 14건에 이르고, 앙골라·아루바·카보베르데 등이 신청한 노예제 기억 컬렉션처럼 역사적으로 소외된 계층과 여성 아카이브가 약진했으며, 제네바 협약이나 세계인권선언 같은 국제 협력·보편 인권 문서가 주목받았다는 것이다. 캐나다·체코·프랑스·독일·폴란드·스페인·스위스·영국 8개국이 공동 신청한 '유럽 전쟁기 아동들의 그림과 글: 1914~1950년'은 아이들의 눈으로 기록된 전쟁이 어떻게 '미래 세대를 위한 평화교육 텍스트'로 재해석되는지를 보여주는 모범 사례로 소개됐다. 쿠웨이트의 이카로스 비문,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가 공동 등재한 '카르티니 서한과 아카이브: 양성평등을 위한 투쟁', 캐나다의 존 피터스 험프리 기록군 등 실제 신청서의 소장 경위(Provenance)와 성평등 서술 원문도 함께 검토됐다.
서술 방법론으로는 '기록유산에 기초한 주제→키워드 3~4가지→스토리텔링'의 단계를 제안하며, 주제는 인권·화해·협력·기후위기 등 인류에 대한 평화적 공헌, 곧 유네스코 정신에 부합해야 한다고 했다. 끝으로 네 가지 주의사항이 이어졌다. 영문 번역을 고려해 각 문단의 핵심 주장을 맨 앞에 두는 두괄식 논리 구조를 갖출 것, '세계 최고'니 '비할 데 없는'이니 하는 감상적 수식어를 배제하고 데이터와 역사적 사실로 담백하고 명확하게 증명할 것, 유산의 가치를 유네스코 이념에 억지로 짜 맞추거나 과장하지 말고 사실에 기반해 해석할 것, 그리고 결론부인 7.3 섹션은 앞선 논증의 요약·정리로만 기능해야 하며 새로운 사실이나 독자적 논거를 처음 등장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종화 팀장 "평가자는 문화적 외부인이다"
마지막 발표는 정종화 세계기록유산 한국위원회 위원(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장)의 '등재신청서 작성 사례 분석'이었다. 앞선 두 발표가 지도를 그렸다면, 정 위원의 발표는 실제 신청서 문장을 펼쳐 놓고 첨삭하는 임상 강의에 가까웠다.
정 위원이 제시한 작성의 제1원칙은 이날 워크숍 전체를 관통하는 경구가 될 만했다. "'좋은 기록물'이 아니라 '등재될 이유'를 써야 한다." 기록물의 훌륭함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기록물이 사라진다면 인류 또는 특정 지역의 기억에서 무엇이 결핍되는가를 입증하라는 것이다. 신청서 전체를 하나의 중심 논지로 꿰고, 각 항목이 그 논지를 서로 다른 각도에서 증명하도록 설계하라고 했다. "그 사건·인물·사업이 중요하다"가 아니라 "그 중요성이 이 기록물을 통해 어떻게 증명되는가"를 물어야 하며, 과장보다 입증-기록물이 지닌 증거성·대체불가능성·세계적 의미를 보여주라는 주문이었다.
작성 시 유의점 네 가지도 구체적이었다. 평가자는 문화적 외부인이라고 전제하고 쓸 것, 주장의 무게는 외부 검증으로 강화할 것, 역사적 가치는 현재적 생명력과 연결할 때 설득력이 커진다는 것, 그리고 희귀성은 단순 수량이 아니라 구조적 희귀성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희귀성 항목에서는 "'드물다'라고 쓰는 것이 아니라 무엇과 비교해서 어떻게 드문가"를 따져 물었다. 동시대에 유사한 기록물이 있는가, 같은 장르·매체·주제의 기록물과 무엇이 다른가, 기존 등재 사례와 어떻게 구별되는가.
특히 완전성(7.2.2) 항목의 처방은 일부만 전하는 기록유산을 준비하는 기관들에 실질적인 지침이 됐다. "일부만 남아 있다"는 표현으로 문장을 시작하는 것 자체가 약점이 되므로, 결락을 솔직히 인정하되 대표성과 체계성으로 방어하고, 흐름 파악 가능성을 보완하라는 것이다. 보존·접근 계획에서는 DB와 디지털 큐레이션을 강조하고 위험 인식과 장기 수장 계획을 균형 있게 제시하라고 덧붙였다.
정 위원은 최근 국제목록 등재 경향도 다섯 가지로 간추렸다. 세계적 중요성을 보편 주제와 연결하는 흐름(특정 국가의 기록이라도 설명은 국가사에 머무르지 않고 인류가 공유하는 역사적 문제를 새롭게 보이게 하는가), '위대한 인물'보다 그동안 덜 기록되었거나 억압되었던 '기억의 공백을 메우는 기록'에 대한 강조, 매우 중요한 평가 축으로 떠오른 여성의 기여, 문화 간 교류와 지식의 이동, 그리고 단순 보존을 넘어 교육·디지털 접근·국제적 공유 같은 '현재적 활용'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워크숍이 남긴 것
발표 후 이어진 질의응답에서는 다수 기관에 기록물이 흩어져 있을 때의 신청 기록물 선정, 등재신청서 영문 번역 시 유의점과 번역 지원 가능 여부, 국내 후보 선정 기준과 시의성 고려 여부, 탈락 후 재지원 횟수 제한 등 추진기관들의 절실한 물음이 쏟아졌다.
세 발표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결국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우리 기록의 가치를 '우리 안의 언어'가 아니라 '세계의 언어'로 다시 쓰는 일이라는 것이다. 한국은 훈민정음 해례본(1997년 등재)을 비롯해 세계가 인정한 기록유산의 나라다. 그러나 이날 워크숍이 일깨운 것처럼, 그다음 기록이 세계의 기억이 되려면 자부심만으로는 부족하다. 문화적 외부인의 눈으로 자신을 다시 보고, 과장 대신 입증으로, 나열 대신 논증으로 말하는 훈련 – 그것이 등재를 준비하는 모든 기관 앞에 놓인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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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기록유산 등재추진기관 대상 역량강화 워크숍 |
| ⓒ 김슬옹 |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2026년 6월 5일 유네스코회관에서 열린 국가유산청 주최 ‘세계기록유산 등재추진기관 대상 역량강화 워크숍’을 직접 참관하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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