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반당한 혁명', 미완의 통일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김상목 2026. 6. 6.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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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위대한 환상>

[김상목 기자]

 <위대한 환상> 스틸
ⓒ 일미디어
이탈리아 통일운동이 본격화하던 1860년, 주세페 가리발디는 시칠리아 원정을 개시한다. 천 명의 의용군을 이끌고 상륙한 가리발디는 신뢰하는 오르시니 대령에게 특별 임무를 맡기고 원정의 성패가 달린 중심도시 팔레르모 입성을 도모한다. 오르시니의 부대에는 시칠리아 출신이나 오래 북부에서 살던 두 사람, 도메니코 트리코와 로사리오 스피탈레가 있다. 모병에 호응해 자원입대했지만, 실은 이탈리아 통일 대의는 안중에 없이 각자 꿍꿍이가 있었다.

리소르지멘토, 이탈리아 통일로 가는 길

찬란한 고대 문명을 꽃피우며 지중해 세계와 유럽 대부분을 통합했던 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본거지인 이탈리아는 천여 년 넘게 분열과 외세 지배에 시달렸다. 르네상스로 상징되는 부와 문화는 누렸지만, 역으로 이를 탐낸 거듭된 강대국의 침략으로 신음해야 했다. 마키아벨리는 조각조각 쪼개진 이탈리아 상황을 개탄하며 강철 같은 군주가 대의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군주론'을 집필했고, 프랑스 혁명 이후 민주주의와 민족자결 열풍이 불어닥친다.

하지만 통일 운동은 단일한 입장과 세력은 아니었다. 북부 상업도시, 중부 교황령, 남부 봉건 왕국 사이 경제·사회 격차는 다른 나라라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유럽의 노른자 이탈리아 이권을 둘러싼 주변 강대국의 간섭도 심각했다. 여기에 맞서 통일로 향하는 해법 역시 주도 세력에 따라 천양지차 색깔을 띨 수밖에 없었다. 북부 사르데냐 왕국을 중심으로 한 보수 왕당파 주도의 통일 운동과 프랑스 혁명 이후 시민세력이 주도한 통일 운동 사이 간극은 컸다.
 <위대한 환상> 스틸
ⓒ 일미디어
흔히 역사책에서 이탈리아 '건국 3걸'로 꼽히는 인물 중 파블로 카보우르는 사르데냐 왕국 수상으로 '위로부터 통일'의 설계자, 주세페 마치니와 가리발디가 시민세력의 대표자로 구분된다. 시민세력은 비밀결사를 통해 여러 차례 봉기를 시도하지만, 외세와 결탁한 기존 지배 세력에 번번이 패한다. 이제 주도권은 카보우르가 이끄는 사르데냐 왕국에 넘어간다. 그는 외교술을 발휘해 프랑스에 영토를 할양하는 양보를 끌어낸다. 그렇게 북부는 어렵사리 통합된다.

하지만 중부엔 교황령이 버티고 있었고 우군 프랑스도 로마는 건드리지 못하게 막는다. 남부는 부르본 왕조 양시칠리아왕국이 버티고 있다. 카보우르의 구상은 암초에 부딪힌다. 이때 주세페 가리발디가 활약한다. 고작 천 명의 의용군을 이끌고 시칠리아 상륙을 감행한 것. 계란으로 바위 치기지만, 봉건제에 신음하던 주민들은 열광적으로 가리발디를 해방자로 받아들인다. 부르본 왕조가 쫓겨난 영토를 사르데냐가 통합하며 오늘날 이탈리아의 원형이 완성된다.

이탈리아 통일의 결정적 분기점, 돋보기로 들여다보기
 <위대한 환상> 스틸
ⓒ 일미디어
영화는 이 신화적인 원정, 통일의 결정적 분기점을 배경으로 삼았다. 하지만 '국뽕' 흥건한 장렬한 시대극은 제작진의 관심이 아니다. 가리발디가 붉은 셔츠를 차려입은 의용군과 함께 시칠리아의 중심도시 팔레르모에 무혈 입성하며 해방자란 환호를 듣는 역사적 순간은 그저 소문으로만 등장할 뿐이다. 시작부터 끝까지 이야기의 중심축은 가리발디의 작전기동을 은폐하고 적의 주력군을 유인하기 위해 전멸을 각오한 오르시니의 별동대가 겪는 고난에 있다.

역사책에선 가리발디의 위명이 워낙 높아서 마치 홍해가 열리 듯 가는 곳마다 적군은 혼비백산 달아나고 무혈입성한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치밀한 고증과 적절한 각색을 가미한 영화는 실제 시칠리아 원정 상황일지를 재연하듯 매일 전황을 업데이트하며 당시 상황을 관객이 목격하듯 간접체험하도록 이끈다. 남한보다 넓은 이탈리아 남부를 통째 장악한 왕국을 해방하는 여정이 마냥 신화적일 리 없다. 영화는 당시 시칠리아의 복잡한 상황을 실감나게 구현한다.

시칠리아 하면 무엇부터 떠오를까? 영화 좀 보는 이들은 자연스레 '마피아'가 머릿속에 등장할 테다. 당시에도 그랬다. 현대 마피아가 자신들의 기원을 중세 비밀결사, 의적으로 포장하는 것과 딴판으로 시칠리아 마피아는 지주와 귀족의 '마름' 노릇하며 주민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가리발디의 군대가 부르본 왕조에 거듭 승리하자 지역 기득권층은 재빨리 태세를 전환하며 그들의 기존 특권을 보장받길 바란다. 그들은 협력과 원조를 제안하며 의용군을 회유한다.

배경에 가깝게 묘사되는 가리발디 장군 활약상은 영화 속 오르시니 대령이 대신한다. 억압받는 민중의 해방이라면 이탈리아를 넘어 전 유럽, 라틴아메리카까지 가리지 않던 가리발디의 완벽한 분신인 오르시니는 시칠리아 유력 가문 출신임에도 단호하게 토호세력과 마피아의 제안을 거부한다. 진정한 이탈리아 통일은 빈곤에 허덕이는 시칠리아 민중의 열망을 실현하는 것에서부터 실현된다는 확고한 믿음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기득권 집단의 이해와 반한다.

상상력이 역사의 여백을 채우다, 평범한 이들의 활약상
 <위대한 환상> 스틸
ⓒ 일미디어
대지주와 토착 귀족은 사태 추이를 살피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들의 대리인은 마피아 보스다. 그들은 오르시니에게 자신들의 제안을 수용하지 않으면 협조할 수 없다며 은근히 협박한다. 지역 기득권 세력이 원하는 건 자신들의 지배력, 즉 대농장 소작농 체계와 자원 독점 및 정치적 발언권 유지다. 하지만 오르시니 입장에선 혁명의 대의를 부정하고 군주만 바뀔 뿐이다. 단호히 유혹을 거부하자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듯 비협조로 일관한다.

정규군이 아닌 의용군 집단에게 지역 사회의 지지와 군수 지원은 사활이 걸린 문제다. 이게 난관에 봉착한 것. 오르시니의 부대는 보급도 부상자 치료도 힘들다. 하지만 토호들이 무지렁이 농민이라 비웃으며 노예처럼 대하던 가난한 주민들은 오히려 희생을 무릅쓰고 의용군을 돕는다. 물론 부르본 군대는 보복으로 잔혹한 파괴와 학살을 일삼는다. 게릴라전에 대처하는 정부군의 주된 전술이다. 공포를 불러와 의용군을 돕지 못하게 막는 것. 전세가 불리해진다.

의용군 내에도 동요가 일어난다. 혁명 동참은 핑계에 불과할 뿐, 그저 고향에 돌아갈 여비 아끼려던 사기꾼 도메니코 트리코와 로사리오 스피탈레 콤비 역시 전투에 겁을 먹고 탈영했다가 잡혀온다. 다행히 용서를 받지만, 열정에 불 탄 동료와 주민들의 헌신에 감화된 둘은 알토란 같은 활약을 펼치기 시작한다. 진심으로 아군을 돕고 주민을 구하려는 열망은 복잡한 정치적 계산에 발목 잡힌 의용군에게 뜻하지 않는 활로를 연다. 숱한 위기를 그렇게 넘길 수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주민들의 헌신적 원조로 목표 달성이 목전에 닿은 시점, 하지만 그들이 유인한 적의 대군이 분풀이로 마을을 초토화할 위협에 놓인다. 의용군은 빠져나가면 되지만, '무방비도시' 선언해도 패배에 눈 뒤집힌 정부군이 주민을 학살하는 건 막을 수 없다. 발만 동동 구르던 오르시니는 기이한 장면을 목격한다. 역사의 뒤안길에서 과감한 상상력이 발휘된다. 겁쟁이 사기꾼이라도 본성이 선량하고 대의에 감화된 이들은 놀라운 과업을 해낼 수 있다.

빛바랜 이상을 소환하는 역사 바로세우기 현장
 <위대한 환상> 스틸
ⓒ 일미디어
영화는 이탈리아 통일의 가장 찬란한 순간에 가린 이면을 흥미롭게 재구성한다. 민중 해방이 진정 구현되어야 국가의 통일도 의미를 얻는다는 오르시니의 신념은 '대의명분' 앞에서 위기에 처한 상태다. 가리발디의 혁명군 내부에서도 '현실론'을 내세우며 기득권층과 타협해야 한다는 의견이 득세한 상태다. 강철 같던 불굴의 혁명가도 점점 대세를 따라야 한다는 강요에 내몰린다. 승리와 위기가 동시에 밀려든다.

실제 역사에서 가리발디는 자신이 정복한 양시칠리아왕국을 통째로 사르데냐왕국에 헌납한다. 국민투표를 통해 통합된 북부와 남부는 현대 이탈리아 통일국가의 기본 형태를 완성한다. 세계사 교과서에 수록된 그대로다. 가리발디는 '해방자'의 상징으로 20세기 체 게바라를 능가하는 명성을 누린다. 오르시니 역시 통일의 원훈으로 존경과 명예를 얻었다. 하지만 그들을 목숨 바쳐 돕던 시칠리아의 가난한 농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제 '배반당한 혁명'의 차례다.

영화 초반 의용군은 해방시킨 마을마다 대지주가 독점한 토지 재분배, 과중한 세금 철폐와 시칠리아의 자치권을 약속한다. 농민들은 박수치며 환호하지만, 맨 앞줄에 자리한 기득권 집단은 안색이 변한다. 켄 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속에서 묘사되듯, 외세를 내쫓기 위한 민족해방 투쟁에서 군자금을 원조하는 지주와 사업가의 착취를 눈감아주듯, 그들은 혁명 수뇌부를 회유하려 한다. 오르시니는 그에 맞서는 혁명의 양심이지만, 한계는 예정되어 있다.

토지개혁 약속을 믿고 호응한 농민들은 외려 지역 토호와 결탁한 탄압에 희생된다. 북부 도시 중산층은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얻지만, 남부 소작농 처지는 통일 전이나 후나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오히려 산업화에 동원되며 남북간 격차 심화, 대농장과 마피아의 지배구조만 확대 강화된다. 근대적 시민으로 나아가지 못한 시칠리아 빈민은 여전히 전근대적 차별과 실질적 계급사회에 머문다. 현대 이탈리아 남부 문제는 영영 해결될 기회를 상실한다.

이탈리아 '독립군영화'로 배우는 타산지석

제목 '위대한 환상'은 가리발디로 상징되던 통일의 기대, 당시 민중들이 꿈꾸던 실질적 평등과 재분배 열망이 신기루처럼 사라지던 상황을 통렬하게 비꼰다. 전쟁이 끝나고 은퇴한 오르시니가 20년 후 우연히 발견한 역설이 신랄하게 묘사된다. 피를 흘리며 목숨 바친 투사들의 빈자리에 남은 빛바랜 영광은 양차 세계대전 참상과 제국주의 흑역사, 파시즘의 득세를 불러왔다. 무엇보다 여전히 이탈리아를 괴롭히는 '남북문제'의 기원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오랜만에 만나는 '독립군영화'는 민중사적 관점에서 자국 통일을 빛나는 신화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과거에 대한 논쟁으로 구체화한다. 1860년 시대상을 공들여 재연한 아름다운 시칠리아 풍광에 눈호강하다가도 일제강점기부터 해방전후에 이르는 우리의 현대사와 겹치는 대목에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명배우 토니 세르빌로와 코미디 콤비 살바토레 피카라&발렌티노 피코네의 앙상블은 묘한 유머감각과 역사의 감흥을 동시에 제시한다.

<작품정보>

위대한 환상
THE ILLUSION
2025 이탈리아 드라마, 역사, 전쟁
2026.06.10. 개봉 133분 17초 12세 관람가
감독 로베르토 안도
주연 토니 세르빌로, 살바토레 피카라, 발렌티노 피코네
수입/배급 일미디어(IL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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