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위원 사퇴하게 한 문제작... 불편에도 이로움이 있다

김성호 2026. 6. 6.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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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독서만세 317] 엘프리데 옐리네크 <피아노 치는 여자>

[김성호 평론가]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을 하나만 꼽으라면 많은 이가 노벨문학상이라 답할 테다. 한국서도 한강이 수상하며 더욱 영예로워진 이 상은 수많은 위대한 문호들의 작품세계를 알리고 고무하며 100년이 훌쩍 넘는 역사를 써왔다. 그런데 아무리 노벨문학상이라 해도 완전무결하다고 말할 수가 없다. 저 백두산에도 악플이 달리듯, 노벨문학상에도 비판과 비난이 있는 것이다. 이중에서도 각별히 설득력 있는 이야기가 바로 안배에 대한 것이다. 문학성 그 자체가 아닌, 국적과 인종, 성별을 지나치게 안배하는 게 아니냐는 것.

20세기 단 9명만 수상자를 배출해 여성 수상자가 채 1할이 되지 못했던 상황에서 21세기 들어 2024년 한강의 수상까지 일찌감치 9명 째를 기록한 것도, 지난 수년 간 남녀 수상자를 번갈아 내고 있는 것도 이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생리·의학, 물리학, 화학, 경제학 부문을 따지면 남성 26명당 1명의 여성 수상자가 배출되는 상황에서 문학과 평화상 부문에서 성비를 맞춰가는 게 아니냔 해석이 나오는 것에도 설득력이 있다.

문학성이 아닌 다른 부분을 고려하는 탓으로 평범한 작가가 상을 받고 탁월한 작가가 그렇지 못한 경우가 거듭된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지만 노벨문학상의 의미가 문학을 계량해 재단해 가장 탁월한 한 작품만을 가려 뽑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무엇보다 노벨문학상이 전 세계 독자들을 문학의 세계로 인도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지표임을 고려하자면 성별과 국경, 인종 등의 경계를 넘나드는 오늘의 결정에 효과가 크다고 믿는다.
▲ 피아노 치는 여자 책 표지
ⓒ 문학동네
어떤 작품이기에... 종신위원 항의사퇴까지

21세기 노벨문학상 첫 여성 수상자는 엘프리데 옐리네크다. 2004년 그녀가 상을 받았을 때 큰 논란이 일었는데, 이듬해 이를 이유로 명시하며 한림원 종신위원인 누트 안루드가 항의를 표하고 물러난 사건이, 문학뉴스가 자주 그렇듯 한국에는 전혀 보도되지 않았으나, 세계 문학계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단 18명뿐인 한림원 위원 중 한 명이 공식적으로 수상자 선정에 항의하며 사퇴한 사건이니 가벼울 수는 없는 일이다. 기억을 더듬어 찾은 BBC 당시 보도에선 "예술적 구조에 대한 고려 없이 마구 퍼 담은 텍스트 덩어리"라는 평가가 적혀 있다. 대체 어떤 작품이기에 그와 같은 평가를 받은 것일까.

문제작이란 평가, 뒤따르는 논란들이 모두 자산이 되는 작품이 있다면 <피아노 치는 여자>가 꼭 그와 같은 소설일 테다. 엘프리드 옐리네크의 수상 당시 가장 많이 언급된 대표작인 이 소설은 1983년 출간됐을 당시부터 논란의 중심에 선 뜨거운 작품이다. 2004년 노벨문학상 수상까지 20여 년 동안이나 잦아들지 않은 논란이야말로 문학이 거둘 수 있는 커다란 성취, 즉 불편을 일깨우고 화제를 일으키는 효과만큼은 분명히 이뤄내고 있는 것이다.

소설은 제목 그대로 피아노를 치는 여자의 이야기다. 에리카 코후트는 30대 후반의 피아노 교사로, 사설 음악원에 출강해 학생들을 가르치며 살아간다. 홀어머니와 함께 둘이서 사는 그녀는 겉으로는 차분하고 조용한 예술가인 것처럼 보이는데, 소설은 그와는 전혀 다른 실상을 독자 앞에 펼쳐놓는다.

이 소설의 강렬한 초반부는 만원 전철을 타고 출퇴근하는 에리카의 은밀한 사생활을 내보인다. 비올라, 플루트, 바이올린 따위의 악기 가방은 그녀의 무기다. 만원 전철에선 특히 그렇다. 단단하고 각진 가방들이 움직이기만 해도 사람들을 불편하게 찔러대는 것이다. 그녀는 새침한 표정을 한 채 고의로 사람들을 밀치고 주먹으로 쑤신다. 심지어는 뾰족구두로 아무도 모르는 새 남의 정강이를 까고 발등을 밟기까지 한다. 대부분의 경우 그녀는 용의선상에서 벗어난다. 악기를 맨 여자가 그런 일을 하겠느냐는 인식 덕분이다. 어쩌다 상대에게 그녀가 지목됐을 때도 입을 닫고 가만히 있으면 여론은 그녀의 편이다. 이 황당한 취미라니.

피아노 교습 중에도 에리카의 막돼먹은 태도가 이어진다. 지도를 빙자한 언어폭력이 수많은 학생들의 마지막 자존감까지 갉아먹기 일쑤다. 성공한 피아니스트가 되지 못하고 결국 지도자가 된 에리카다. 그녀 스스로가 집중력이 부족한 탓으로 호되게 꾸짖음을 당하며 자란 경험이 있다. 다른 누구보다 가혹했던 건 정작 피아노 연주에선 그녀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 엄마였다. 그러나 엄마는 에리카의 표정만 보고도 그녀가 실수를 했는지 성공적인 연주를 하고 있는지를 귀신같이 알아챘다. 틀리는 법이 없었다.

21세기 첫 여성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대표작

일찍 남편을 잃은 엄마에게 에리카는 전부였다. 엄마는 에리카가 어려서부터 중요한 일부터 사소한 것까지를 일일이 감독했다. 심지어는 삼십대 후반이 되어서까지 일을 빼고는 외출을 일일이 허락받아야 하는 처지다. 그 흔한 연애조차 변변히 한 적 없었다. 혹여 외간남자를 만날라 치면 엄마가 흠잡고 끼어들기 일쑤다. 너무나 오랫동안 엄마에게 통제된 삶을 산 에리카는 엄마를 속여서 하는 일탈 말고는 저만의 것을 꾸려가지 못한다. 요컨대 소설이 그리는 여러 이상행동은 하나같이 엄마에게 억눌린 결과물임을 짐작할 만하다.

소설은 에리카가 학생으로 스무 살 청년 클레머를 만나며 본격적인 이야기를 풀어낸다. 에리카에게 강한 끌림을 느끼는 매력적인 젊은이 클레머와 저도 그에게 끌리면서도 비틀린 성정 탓으로 도무지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는 에리카가 빚는 불협화음이 사랑이야기임에도 기괴하고 섬뜩하기까지 하다. 클레머를 향한 에리카의 감정은 점차 가학과 피학이 뒤섞인 비틀린 성애로 표출된다. 그에 무방비로 노출된 클레머의 선택이 소설의 충격적 결과로 이어진다.

<피아노 치는 여자>의 지향은 명확하다. 압제가 인간의 본래적 발달을 어떻게 억누르고 망가뜨릴 수 있는가를 내보이는 것이다. 어머니가 딸에게, 또 교사가 학생에게 발하는 비틀린 권위가 사람과 관계 모두를 충격적인 방식으로 파탄에 빠뜨린다. 가정폭력과 성적학대 등의 문제가 만연했던 당시 오스트리아, 독일 사회에서 소설은 가부장제의 해악을 드러낸 페미니즘 소설로 해석되며 화제를 모았다. 작품해설이 말하듯 '작가의 의도적인 언어유희가 유발하는 난해성이 자연스런 독서의 흐름을 방해한다'거나 '과격하고 노골적인 성적 묘사를 역겹게 느끼'게 한다는 비판도 잇따랐다. 둘 모두에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여긴다.

탁월하지 않은 문학에도 이로움은 있다고

탁월한 작품이냐 묻는다면 나는 차마 동의할 수가 없겠다. 이를테면 터키 남자, 한국인 유학생, 보스니아 사내 등등 소설 가운데 등장하는 여러 인물의 묘사부터 보라.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부터가 국적과 성별, 세대의 벽을 넘지 못하고 세상의 가장 전형적인 인식을 그대로 받아들여 되풀이하기 일쑤다. 강압하는 엄마와 지배받는 딸, 노처녀 히스테리를 드러내는 교사와 그에 억눌린 학생 등등.

그저 인물과 관계만이 아니다. 사건과 사상에 대해서도 작가의 독자적 해석이나 묘사가 거의 없다. 에리카뿐 아니라 엄마와 클레머 등 주요한 인물들 또한 감성적으로 특이할 뿐 지적으로나 감각적으로 예상하는 범위를 뛰어넘지 못하고 구조며 전개까지 전형적이란 인상을 준다. 말하자면 탁월한 문학이 기본으로 갖춘 소양을 이 소설은 갖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가치 있는 소설임은 분명하다. 가정과 사회에서 여전히 소설과 마찬가지의 억압이 존재하는 때문이다. 40여 년 전 서구 유럽의 문제가 오늘 한국에 없다고 할 수 없다. 소설은 아빠가 아닌 엄마, 남교사가 아닌 여교사에 의해 자행되는 억압을 통해 전형을 그나마 탈피하려 한다. 이러한 탈피는 그대로 폭력과 억압이 남과 여의 단순한 구분 너머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내보인다. <피아노 치는 여자>에 그나마의 미덕이 있다면 또한 여기에 있을 터다.

돌아보면 이 소설의 수상에 항의하며 직을 던진 누트 안루드는 탁월하고 용감한 이였다. 엘프리데 옐리네크와 작품이 기존 노벨문학상 수상자에 비해 탁월함의 영역에서 턱없이 부족하단 걸 알아보고 문제 삼을 줄 알았다. 그러나 한 편으로 이와 같은 저술이 갖는 미덕 또한 존재한단 걸 오늘의 나는 이해한다. 문학의 과제란 전에 없던 새로움을 구하거나 오로지 훌륭함을 이루는 것만은 아니다. 시대가 간과하는 문제를 끄집어내 고발하고, 독자의 불편을 일깨우는 것으로도 제 역할을 해낼 수가 있다. <피아노 치는 여자>가 감당한 일이 꼭 그러하다.

위와 같은 사연이 한국에 전해진 바 없는 탓으로, 스스로가 부족해 고전명작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책하는 독자에게 닿기를 바라며 쓴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서평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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