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잊히지 않았다'... 식당마다 빈자리, 뭉클하다

장소영 2026. 6. 6.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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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영의 숨쉬는 뉴욕] 참전군인, 전사자에 대한 예우가 각별한 미국의 문화

미국의 역사를 온몸에 품고 있는 뉴욕. 누군가 살아냈고, 누군가 살아가는 빌딩 숲 사이사이의 이야기를 하나씩 담아 보려 합니다. <기자말>

[장소영 기자]

미국에는 한국의 현충일과 비슷한 공휴일이 두 개 있다. 하나는 베테랑스 데이(Veterans Day, 11월 11일)라 불리는 재향군인의 날이고, 또 하나는 메모리얼 데이(Memorial Day)이다. 베테랑스 데이가 참전군인의 날이라면, 5월 마지막 월요일인 메모리얼 데이는 전사자 추모일이다.
 지난 5월 25일, 미국의 현충일이라 할 수 있는 메모리얼 데이를 맞아 맨해튼 인근 롱아일랜드의 유명 해변인 존스 비치에서 드론쇼가 열렸다. 해변은 물론 주차장에서 차 위에 올라 드론쇼를 관람중인 주민들.
ⓒ 장소영
우리 가족은 미국으로 건너온 후, 우연히 보게 된 짧은 영상이 계기가 되어 재향 군인 모자에 관심이 생겼다.

카페에서 일하는 젊은 여성 직원의 영상이었다. 한국계로 보이는 직원이 한국전(6.25 전쟁) 참전 용사의 모자를 알아 보고, 그분 대신 커피값을 지불하며 감사를 전하는 내용이었다. 그러잖아도 미국 사회가 가진 '군인 존경 문화'에 감동을 받곤 했는데, 영상 속 직원처럼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감사의 표현은 하며 살고 싶어졌다.

한국전 참전군인이 입는 하늘색 제복

모자에 대해 조금씩 공부하며 부착된 마크나 상징도 하나씩 알아가고, 챙이 없는 모자를 '개리슨모'라고 부른다는 것, 모자 캡을 따라 '한국전 참전군인(KOREA VET)'이라 수놓은 모자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재향 군인 모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하나 더 있다. 베트남전에 비해 한국전 참전 용사에 대한 미국 사회의 관심이 덜한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참전 규모나 기간, 대중문화에서 다룬 작품량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지난 5월 마지막 월요일(25일), 메모리얼 데이에도 아쉬운 순간이 있었다. 매년 메모리얼 데이에는 지역 사회와 지역 학교가 연합해 퍼레이드를 한다. 우리 아이들도 마칭 밴드 또는 봉사하는 클럽의 배너를 들고 매년 퍼레이드에 참여해 왔다. 십여 년 전만 해도 꽤 많은 참전 용사분들이 행군을 하셨는데, 언제부터인가 작은 트레일러에 앉아서 퍼레이드에 참석하신다. 참석 인원도 많이 줄었다.

지난달 25일 오후, 우리 동네 퍼레이드를 촬영한 짧은 영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길가에서 응원을 보내던 촬영자가 트레일러에 앉으신 참전 용사 한 분께 "어느 전쟁에 참전하셨나요?" 하고 묻는 영상이었다. 참전 용사분은 크게 "한국전! (KOREAN WAR)"이라고 답했다.

나는 하늘색 재킷만으로도 한국전 참전 용사임을 알아보았었다. 짙은 색의 제복을 착용하는 다른 참전 용사와 다르게, 한국전 참전 용사만이 맑고 깨끗한 하늘색 상의를 착용한다. 눈에도 잘 띄고 여느 제복과 확연히 구분된다. 수십 년간 하늘색 상의를 입고 퍼레이드를 해 오셨을 텐데, 영상을 통해 이제라도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길 바랐다.

참전 용사에게 커피를 사 드리는 미국의 문화
 짙은 색 제복의 여느 참전 용사와 달리, 한국전 참전 용사분들은 하늘색 상의를 착용한다.
ⓒ 장소영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들르는 근처 주유소에는 '팀홀튼' 커피점이 있다. 비슷한 시간에 한 번씩 뵙는 참전 용사 어르신이 계신다. 걸어서 오시는 걸 보니 근처에 댁이 있으신 거 같고, 부인과 함께 드시려는지 커피를 꼭 두 잔씩 사신다. 한 날은 현금으로 지불하시려는지 동전을 꺼내 세고 계시길래, 얼른 캐셔에게 내가 지불하겠다고 손짓을 보냈다. 미국에서는 참전 용사나 군인의 커피 값을 대신 지불하는 경우가 많아 캐셔도 익숙하게 결제를 도와주었다.

몇 번 이런 일이 있었지만 좀처럼 한국전 참전 용사 어르신을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메모리얼 데이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작은 아이의 학교 행사에 필요한 물품을 구하느라 급히 한인 마트에 들렀다. 큰 아이와 장을 봐서 서둘러 나가려는데 멀리서 까만 캡을 쓰신 어르신이 보였다. 혹시 하는 마음으로 되돌아가 보니 한국전 참전 용사의 모자가 맞았다. 드디어 내게도 감사를 전할 기회가 온 것이다. 번듯한 과일 상자를 고를 틈이 없어, 일단 구매한 작은 사과 바구니를 들고 뛰어갔다. 장바구니를 정리하시는 아내분께 말을 건넸다. "사모님, 사과 좋아하세요? 작지만 감사해서 드리고 싶어서요"말하고는 얼른 사과 바구니를 카트에 담아 드렸다.

"아직도 이렇게 착한 마음을 가진 분이 있네."

참전 용사 어르신의 말씀에 "감사합니다, 착한 건 아니고 당연한 건데 작은 정성이라 죄송해요"라며 인사를 드리고 얼른 나왔다.

지켜보던 큰 아이가, "엄마가 아시는 분? 왜 사과를 드렸어요?"하고 묻길래 "한국 전쟁 참전 용사분이시거든" 했더니 금세 '아하!' 하는 표정을 짓는다.
 한인 마트에서 마주친 한국전 참전 용사분. 감사의 마음을 전할 수 있어 기뻤다.
ⓒ 장소영
일상 속에 비워둔 참전 용사의 자리

3월이 되면, 아이들의 고등학교에서는 특별한 레슬링 경기가 열린다.

2007년, 이라크전에서 전사한 학교 졸업자 D를 추모하기 위해서이다. D는 학교 대표 레슬링 선수였다. 레슬링 경기뿐 아니라 그를 기리는 크고 작은 이벤트가 있다. 그의 이름을 딴 장학재단도 있고, 체육관에 특별한 장식도 달린다. 캐비닛 하나 혹은 선수석에 그의 자리 하나를 비워두기도 한다. 더 이상 우리와 함께 일상을 공유하지는 못하지만, 그들이 있던 자리 혹은 있어야 할 자리를 비워두고 기억하기 위해서다.

메모리얼 데이가 되면 '돌아오지 못하는 이를 위한 테이블(Missing Man Table)'을 세팅하는 식당들이 있다. 우리 동네 식당 한 곳도 매년 전사자를 위한 테이블을 비워둔다.
 동네의 유서 깊은 식당에서는 매년 전사자와 실종자를 위한 테이블을 마련해 추모에 동참한다.
ⓒ 장소영
 돌아오지 못한 이를 위한 테이블(Missing Man Table). 메모리얼 데이에 즈음해, 미국의 식당들은 전사자와 실종자, 참전 용사를 추모하는 테이블을 특별히 세팅한다. 각각의 구성에는 희생자를 기억하는 의미들이 담겨있다.
ⓒ ZOAN'S
하얀 식탁보 위에 각각 의미를 가진 장미 꽃병, 거꾸로 놓인 유리잔, 빈 접시 위의 레몬 조각, 소금, 촛불 그리고 빈 의자가 놓인다. '예약석'이란 문구 아래에 시가 쓰여 있다. 전사한 이를 기억하고 실종자를 찾겠다는 의지, 참전 용사들의 고통과 두려움, 희생된 그들의 피, 더 이상 우리와 함께 잔을 들 수 없다는 내용이다.
미국 사회는 전사자뿐 아니라 전쟁 포로와 실종자에 대한 마음도 각별하다. 어딜 가나 성조기 아래 POW-MIA 깃발이 걸린 게양대를 볼 수 있다. POW는 전쟁 포로(Prisoner of War)를, MIA는 실종자(Missing in Action)를 뜻하며 깃발 아래에는 '당신은 잊히지 않았다(You Are Not Forgotten)'라고 쓰여있다. 개인의 주택에도 관련 배너나 깃발을 걸어둔 집이 자주 눈에 띈다.
 실종자와 전사자를 추모하는 배너. 기관이나 공원같은 공공장소 외에도 개인 주택에 실종자를 기억하고 전사자를 추모하는 배너를 걸어두는 집을 자주 만난다. POW는 전쟁포로(Prisoner of War)를, MIA는 실종자(Missing in Action), KIA는 전사자 ( Killed in Action), WIA는 부상병 (Wounded in Action)을 뜻한다.
ⓒ 장소영
"함께 할 수 없지만, (기억함으로) 함께 하는 것."
큰아이의 역사 선생님이 전사자의 별이 달린 빈 캐비닛을 두고 그렇게 가르쳤다고 한다. 재향 군인이나 군복을 입은 장병들에게 커피나 식사를 대접하는 것에서부터, 빈자리를 마련해 그들을 추모하는 일까지. 일상의 한 자리를 내어주며 용사들과 함께 하려는 미국인들의 문화다.
 미국 메모리얼 데이 드론쇼. 미국의 현충일인 메모리얼 데이를 맞아, 맨해튼 인근 존스 비치에서 드론쇼가 열렸다. 차 위에 앉아 드론쇼를 관람중인 주민.
ⓒ 장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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