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가서 푹 쉬고 싶어" 남편의 한마디에 떠난 곳

황윤옥 2026. 6. 5.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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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하고도 반나절의 시간... 문경에서 마주한 초록산, 그 속에서 쉬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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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윤옥 기자]

"칙칙폭폭, 칙칙폭폭."

청춘 남녀가 땅거미가 질 때쯤 비둘기호에 올라탔다. 짐 보따리를 들고 타는 아주머니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 다정한 연인들까지 기차는 만원이었다. 음료 카트를 미는 승무원을 피해 몸을 비트는 사람들로 차내는 붐볐다.

꼬리 칸으로 이동한 두 청춘은 뒤로 밀려나는 어둠에 손을 흔들고 바람을 친구처럼 맞아 주었다. 생애 처음으로 느껴보는 해방감에 그들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사내 연애를 하는 두 사람에게 낯선 도시로의 여행은 설렘과 자유로 충만했다. 미지의 세계로 떠난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도착한 곳은 문경. 흙먼지 폴폴 날리며 덜커덩 거리는 시골버스를 타고 들어간 곳은 '동로'라는 산골 마을이었다. 빨갛게 익은 사과나무를 보며 감탄하는 여자의 볼도 발갛게 익어갔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잡초가 허리춤까지 무성하게 자란 산길이었다. 보이지도 않는 길을 헤치며 겨우 도착한 산소 앞에 늘 든든해 보였던 남자의 어깨가 그날따라 작고 쓸쓸해 보였다. 아홉 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외롭게 자랐을 남자의 숨겨진 아픔이 산소 앞 고백을 통해 내 가슴으로 묵직하게 들어왔다.

"아버지, 제 여자 친구입니다. 소개하고 싶어서 같이 왔습니다."

그 청춘 남녀는 결혼 37주년을 함께 보낸 동지 같은 부부가 되었다. 남편은 십수 년간 돈을 벌어 빚을 탕감하느라 밤낮으로 일에만 파묻혀 지냈다. 여행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살아온 사람이다. 그 덕분에 우리 가정은 안정기에 접어들 수 있었다.

남편의 비장한 한마디
▲ 맨발걷는 남편 문경새재에서 맨발걷기를 하였어요.
ⓒ 황윤옥
기다리던 휴무일이나 온 가족이 모이는 명절조차 남편에겐 온전한 휴식이 되지 못했다. 동료의 차가 고장 났다는 연락에, 혹은 급한 비상 상황이 터졌다는 전화에 언제든 불려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긴장 속에서 십여 년을 넘게 보냈으니 가끔 탈진해 쓰러지는 것도 당연했다. 남편이 짊어진 심리적, 육체적 스트레스는 늘 한계에 아슬아슬하게 닿아 있었다. 지난 5월 말, 남편이 뭔가 다짐한 듯 비장하게 말을 꺼냈다.

"이제 이렇게 평생 일만 하고 살고 싶지는 않아. 어디 가서 좀 푹 쉬고 오고 싶어."

회사와 팀원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남편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일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하루를 통으로 쉬는 날도 잘 없는 편이었는데 이튿날 오전까지 쉰다는 것이다. 마치 유행가 제목의 "일과 이분의 일"처럼 우리에게도 하루와 반나절의 시간이 생겼다. 찜질방에서 푹 쉬고 오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남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문경새재에 다녀오면 좋겠어."
"그럼 1박도 가능해? 숙소 알아볼까?"

지난해에 친구들과 문경새재 근처에 숙소를 잡고 하룻밤을 묵은 적이 있다. 이렇게 좋은 곳에 혼자 쉬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시간이 되면 남편도 같이 꼭 왔으면 하는 곳이었다. 숙소 이름이 선뜻 떠오르지 않았지만, 기억을 더듬어 예약을 서둘렀다. 주말이면 금세 마감된다는 말을 들은 터라 다행히 평일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사실 문경은 우리 부부에겐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다. 결혼 전에는 단둘이 애틋하게 찾았던 그곳을 결혼 후 새댁이 되어서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1년에 두세 번씩 꼭 찾게 되었다. 시아버지의 고향인 그곳에 조상님 산소가 다 계시기 때문이다. 벌초와 시사를 드릴 때도 서울에 사시는 큰어머니와 여러 친척 어른들이 참석하셨다. 대부분의 행사 진행을 큰어머니와 시어머니께서 주관하셨기에 나는 새댁일 때부터 매번 참석하였다.

남편은 아버지가 자신을 지켜주는 수호신 같다는 말을 자주 했다. 어머니께서 떠나신 후 십수 년간 회사 일로 마음의 고향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 그가 먼저 제안했다는 것은 마음이 지쳐있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흔쾌히 숙소를 알아본 것이다.

우리 부부는 몇 달 전부터 맨발 걷기를 하고 싶어 했다. 시간도 잘 나지 않았지만, 집 주변에서 적합한 장소를 찾지 못했다. 평일의 문경새재는 주말보다 훨씬 조용했다. 덕분에 제대로 쉬어갈 수 있었다.

맨발 걷기가 시작되었다. 맨발 걷는 사람들을 위해 신발을 보관하는 신발장도 있었다. 과감하게 신발을 벗어 넣고 바지를 걷어 올리고 걷기 시작했다. 초록 잎들 사이로 서광처럼 햇살이 넘실거렸다. 우리 둘만 걷는 그 길에 속세를 벗어난 듯한 평화가 내려앉았다. 그때 문득 예전 어느 드라마에서 들었던 노래 한 자락이 자꾸만 생각났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평상시엔 지나쳤던 나무들, 산새의 지저귐, 폭포처럼 물 흐르는 소리가 마음에 평온을 안겨주었다. 예전엔 앞만 보고 걸었다면, 이제는 주변을 살피게 되었다. 어쩌면 지금의 삶도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지 모른다.

문경새재 역시 그런 길이었다. 사람이 몰리는 주말보다 평일이 훨씬 좋았고, 하루에 다 둘러보기보다 머물며 걷는 편이 더 어울렸다. 나이가 들수록 그런 여행이 편안하게 느껴진다. 용추 계곡에 내려서자 쏟아지는 물소리가 가슴을 뻥 뚫리게 했다. 간절한 마음들이 쌓아 올린 돌탑에 작은 돌 하나를 얹으며 기도도 했다.

초록산을 보며 달래는 마음
▲ 돌탑 간절한 마음들이 쌓아올린 돌탑 위에 나도 작은 돌을 얹으며 기도했다.
ⓒ 황윤옥
'여기에 시름을 내려놓고 갈 테니 소원을 꼭 이루게 해 주세요.'

2관문까지는 가지 못했지만 거의 세 시간을 산책하고 내려왔다. 발 씻는 곳에서 발을 씻고 신발을 신으니 구름 위에 올라탄 것처럼 푹신했다.

문득 곁에 선 남편의 얼굴을 보았다. 언제나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긴장해 있던 남편의 표정이 그새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땅을 딛으며 온갖 시름과 지친 마음을 시원하게 쏟아버린 자리에 자연이 준 포근한 위로가 채워진 것일까. 경험하지 않았다면 맨발의 시원함도, 비워낸 뒤에 찾아오는 이 마음의 폭신함도 몰랐을 것이다.

우리가 예약한 숙소는 국민여가캠핑장의 스머프 마을이었다. 푸른 숲속에 버섯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는 숙소의 풍경이 참 아늑했다. 오랜만에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하룻밤을 온전히 쉬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 스머프마을과 초록산 국민여가캠핑장에 있는 스머프마을 숙소 앞으로 초록산이 마음을 달래줍니다.
ⓒ 황윤옥
젊을 땐 당일치기도 가능했지만 60대 부부에겐 체력이 예전 같지 않다. 숙소에서 낮에도 잠깐 쉰 덕분에 피곤함도 덜했다. 앞만 보고 빨리 달려야 했던 젊은 날을 지나 이제 주변을 살피며 천천히 머무는 법을 배우는 60대의 장년이라면 주말보다는 평일이 더 잘 어울린다.

숙소에서 바라다 보이는 초록 산들을 보니 어지러웠던 마음이 안정되었다. 오래간만에 남편도 자연 속에서 제대로 위안을 얻은 것 같다고 했다. 마음속 미움과 욕심을 내려놓는 시간, 정말 소중했다. 타버릴 듯 지쳐있던 남편의 마음이 이 여행으로 조금은 누그러졌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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