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AI를 넘어 ‘피지컬’의 시대로 [트랜D]
이달 5일,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다시 한국을 찾는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등 국내 주요 그룹 총수들과 회동이 예정돼 있다. 이번 화두는 ‘피지컬 인공지능(AI)’이다. 그가 한국을 찾는 이유는 분명하다. 올해 글로벌 반도체 시장 규모가 사상 처음으로 1조 달러(약 1516조원)에 근접하고 있고, 성장의 심장부에 우리나라가 있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의 시가총액은 1년 만에 10배 가까이 치솟았고, 삼성전자도 5배 가까이 올랐다. 증권가에서는 삼성전자의 올해 영업이익을 최대 350조원, SK하이닉스는 최대 262조원으로 전망하고 있다. AI가 촉발한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한국 경제의 지형을 바꾸고 있다.

메모리의 빛, 비메모리의 그림자
현재 반도체 슈퍼사이클의 핵심은 고대역폭메모리(HBM)다. HBM은 메모리 칩을 수직으로 쌓아 데이터 통로를 극대화한 기술이다. 일반 메모리가 1차선 도로라면, HBM은 수십 차선 고속도로를 수직으로 쌓아 올렸다고 볼 수 있다. 이 시장은 SK하이닉스, 삼성전자, 마이크론 세 기업이 95% 이상을 과점하고 있다. 그중 지난해 3분기 기준 SK하이닉스가 57%, 삼성전자가 22%로 국내 기업이 약 80%를 차지한다. 한국이 HBM의 심장부를 쥐고 있는 셈이다.
올해 양산에 들어간 차세대 HBM4는 속도가 기존 대비 두 배 가까이 빨라졌다. 삼성전자는 세계 최초로 HBM4를 엔비디아에 납품하며 추격의 신호탄을 올렸다. 메모리 가격은 지난해 초보다 두 배 이상 올랐고, 마이크론은 올해 HBM이 전량 매진됐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반도체에는 데이터를 저장하는 메모리만 있는 게 아니다. 데이터를 연산하고 처리하는 반도체도 있다. 컴퓨터의 두뇌인 CPU, 스마트폰의 핵심인 모바일 프로세서, 카메라의 이미지 센서, 전력을 관리하는 칩 등을 통틀어 비메모리(시스템) 반도체라고 부른다. 엔비디아의 AI 칩 GPU도 비메모리 반도체다. 비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전체 반도체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메모리 반도체 시장보다 훨씬 크다.
삼성전자는 1990년대 중반부터 시스팀LSI 사업부를 통해 비메모리 반도체를 키워왔다.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모바일 프로세서 ‘엑시노스’, 스마트폰 카메라의 핵심인 이미지 센서 ‘아이소셀’이 대표적이다. 2017년에는 파운드리(위탁생산) 사업부를 별도로 분리해 애플·퀄컴 등의 칩을 대신 만들어주는 사업도 본격화했다.
2019년 삼성전자는 ‘2030년까지 비메모리 1위’를 선언하며 133조원 투자를 발표했다. 그러나 7년이 지난 지금, 파운드리 시장에서 대만 TSMC가 59%를 차지하는 반면 삼성전자는 15%에 머문다. SK하이닉스는 전략적 판단으로 비메모리 사업부를 아예 정리하고 메모리에 집중하는 길을 택했다.
최근 삼성전자 노사 파업 위기가 극적으로 타결됐다. 메모리 사업부 직원은 최대 6억원, 비메모리 사업부 직원은 최소 1억6000만원의 성과급을 받게 됐다. 이 격차가 현장의 온도를 말해준다. 하지만 메모리 반도체는 본질적으로 사이클 산업이다. 호황과 불황이 반복된다.
AI의 폭발적인 성장과 수요 때문에 사이클이 이전과는 다르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인텔·퀄컴·브로드컴 등 해외 반도체 기업은 비메모리 반도체로 꾸준히 수익을 내며 사이클에 휘둘리지 않는 체질을 가지고 있다. 국내 반도체가 ‘메모리 반도체 불황은 곧 산업 위기’라는 구조에서 벗어나려면, 메모리 반도체는 물론 비메모리 반도체에도 투자해야 한다.

피지컬 AI, 비메모리 반도체의 시대를 열다
젠슨 황 대표가 꺼낼 화두인 ‘피지컬 AI’는 반도체 산업의 판을 바꿀 수 있다. AI가 소프트웨어와 클라우드를 넘어 로봇·드론·자율주행차라는 물리적 몸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리서치 기관 가트너는 2029년까지 물리적 세계에서 활동하는 AI가 기존 디지털 AI 대비 10배 많은 데이터를 생성할 것으로 전망했다.
자율주행차 한 대에는 수백 개 이상의 반도체가 들어간다. 이 가운데 고성능 메모리도 있지만, 대다수는 센서·전력관리·모터 제어·신호 처리를 담당하는 비메모리 반도체다. 로봇과 드론에도 AI 칩·센서·전력관리 칩이 복합적으로 탑재된다. 피지컬 AI 시대에는 데이터센터 안의 고성능 칩만이 아니라 공장 바닥, 도로 위, 가정 안 등 현실 세계 곳곳에서 작동하는 다양한 반도체가 필요하다.
준비해야 할 영역은 이미 보인다. 자율주행차에 탑재되는 차량용 반도체, 로봇을 제어하는 모터 드라이버, AI 기기의 에너지 효율을 좌우하는 전력관리 칩 등이 글로벌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비메모리 반도체의 영역이다. 우리나라가 강점을 가진 자동차, 로봇, 조선 등의 산업과 연계하면 비메모리 반도체의 수요처를 국내에서도 만들어낼 수 있다.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는 지금 적자를 기록하고 있지만 피지컬 AI 시대의 핵심 수요는 바로 이 영역에서 폭발한다. 비메모리 반도체를 ‘제2의 HBM’으로 키울 수 있다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메모리 분야 강자를 넘어 반도체 전체의 강자가 될 수 있다.
차세대 HBM4부터는 메모리와 비메모리 반도체를 하나의 패키지에 통합하는 기술이 핵심이 되며, 양쪽 모두를 수행할 수 있는 기업에 기회의 문이 열리고 있다. 메모리 분야에서 쌓은 초미세 공정 기술과 3D 적층 노하우가 비메모리 반도체 영역에서도 경쟁력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메모리 반도체 강국, 그 다음은
우리나라는 AI 시대 메모리 인프라의 심장부를 쥐고 있다. 지금까지 AI는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폭발적으로 수요가 늘었다. 하지만 앞으로 로봇, 자율주행차 등 하드웨어 영역으로 확장될 것은 자명하다. AI가 피지컬 세계로 확장되면 필요한 반도체 종류도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젠슨 황 대표가 한국을 찾아 기업들과 피지컬 AI를 논의한다는 것은, 우리나라가 이 전환의 한 가운데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자동차, 조선업은 물론 로봇 등 피지컬 AI의 기술 기반과 산업화 역량을 가진 국가이기 때문이다.
사실 비메모리 반도체를 육성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2019년 이재용 회장의 ‘비메모리 1위’ 선언 이후 7년이 지났지만, 기대만큼의 성과는 나오지 않고 있다. 게다가 지금 HBM을 비롯한 메모리 반도체의 유례없는 호황과 수십조 원의 수익 앞에서,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으냐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사이클은 반드시 돌아온다. 호황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이 산업이 수십 년간 증명해온 사실이다. 지금의 메모리 반도체 호황에서 벌어들인 수익을 비메모리 반도체 생태계에 투자하는 것이야말로, 다음 사이클을 대비하는 중요한 전략이다.
윤준탁 IT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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