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민주주의가 모독당했다…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얼룩진 6·3 선거
제1야당, 개표 중단과 선거일 재지정 요구
독일서도 투표용지 부족 때 선거무효 판결
여당 "선관위는 개표 중단 결정할 수 없다"

민주주의의 축제가 돼야할 선거가 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얼룩졌다. 주권자가 주권을 행사하려 투표소를 찾았는데도 투표용지를 받지 못해 투표를 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상상치 못했던 사태에, 제1야당은 개표 중단과 선거일 재지정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자칫 선거가 부실 관리로 인해 오히려 국론 분열과 갈등·반목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송언석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3일 저녁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 지하 1층에서 긴급 기자간담회를 열어 "중앙선관위에 분명히 요구한다. 서울 선거 개표를 지금 즉시 중단하라"며 "공직선거법 제196조에 의거해 선거를 연기할 것을 정식으로 요구한다"고 포문을 열었다.
제1야당의 개표 중단과 선거 연기 요구는 선거사상 초유의 사태인 투표용지 부족 사태 때문이다. 이날 야권 강세 지역인 서울 송파구 곳곳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해 투표소를 찾은 유권자들이 투표를 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런 사태는 허철훈 중앙선관위 사무총장이 스스로 시인했듯이 과거 선거에서는 발생했던 전례가 없는 일이다.
일부 투표소에서 밤 10시까지 투표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출구조사와 개표는 시작됐다. 이와 관련, 송 원내대표는 "한 시간 이상 투표를 못하게 되면 개인적 일정이나 건강 등 일신상 사유로 인해 투표를 못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한마디로 중대한 투표권 침해이자 참정권 침해"라며 "투표용지를 다른 곳에서 급하게 이송해오는 과정에서 정상적인 투표지 관리가 되는지 여부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매우 크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이런 상황에서 서울 잠실7동 제2투표소에서 아직 투표를 대기 중인 시민들이 있음에도 투표함을 회수하려고 해 시민과 경찰이 대치 상황에 있다고 한다"며 "명백하게 불법적인 투표함 회수 시도"라고 규정했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 등 지도부는 이날 밤 경기 과천에 위치한 중앙선관위 청사를 직접 찾아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항의하고 개표 중단과 재투표를 요구했다.
장 대표는 이날 선관위 청사 4층 회의실에서 허철훈 총장을 만나 "서울에서 투표용지 부족으로 마감시간 이후 투표가 이뤄지고 개표 방송이 진행된 뒤에도 투표가 계속된 만큼 선거 자체가 무효"라며 "재투표를 실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어 "투표하려다 돌아간 분도 있고 뉴스를 접하고 포기한 분도 있다. 개표 방송 이후 투표한 분들은 이미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며 "(개표를 즉각) 중단하지 않으면 국민의힘 전국 개표 참관인을 전부 철수시키는 등 가장 강력한 방법을 동원해 항의하고 시정될 때까지 계속 싸울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해외 민주주의 선진국인 독일의 경우에는 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유권자의 선거권 행사가 침해받자, 얼마나 많은 유권자가 투표를 방해받았는지 파악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헌법재판소가 선거 전체를 무효로 판결하고 재선거를 명령한 판례가 존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나경원 국민의힘 의원은 이날 저녁 긴급 입장문을 통해 "지난 2022년 독일 베를린 지방선거 당시, 헌법재판소는 투표용지 부족과 관리 부실을 이유로 선거 전체를 무효로 판결하고 재선거를 명령했다"며 "즉각 개표를 중단하라. 독일 판결처럼 무조건 재선거 해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실제로 지난 2021년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 실시된 9·26 선거에서 베를린주 선관위가 유권자 숫자보다 투표용지를 임의로 적게 준비했다가 각 투표소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해져, 투표소들이 운영을 일시 중단했다가 법정 투표종료 시각인 오후 6시 넘어서까지 투표를 받은 사례가 있었다. 임의로 복사한 투표용지에 기표한 유권자들의 표는 무효 처리되기도 했다.
독일 헌법재판소는 투표용지 부족으로 투표소 운영이 중단된 것과 관련해 "투표를 기다리던 유권자들은 투표소가 언제 다시 문을 열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며 "긴 대기 줄과 (투표소 운영) 중단으로 투표가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하고 집으로 돌아가버린 유권자가 몇 명인지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시했다. 우리의 6·3 지방선거에서 일어난 사태 및 문제지점과 동일하다는 분석이다.
정희용 사무총장은 "대기 시간이 1시간 40분에 달했고, 이로 인해 투표를 포기한 유권자가 있다"며 "잠실7동 제2투표소의 경우, 대기표를 받은 유권자에 한해 오후 10시까지 투표를 연장했는데, 개표 결과를 보며 투표하는 초유의 상황을 어떻게 납득할 수 있겠느냐"라고 뒷받침했다.
국민의힘 차기 원내대표 유력 후보군으로 분류되는 성일종 의원도 이날 저녁 페이스북을 통해 "공직선거법 제196조와 제198조에 따르면 천재지변과 기타 부득이한 사유가 발생한 경우 선거를 연기하고, 투표구의 투표를 실시하지 못한 때에는 재투표를 해야 한다고 나와 있다"며 "선관위는 즉시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벌어진 선거구의 선거를 연기하고 재투표를 실시하라"고 압박했다.
나아가 주진우 국민의힘 의원은 대한민국 건국 이래 초유의 사태인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야기한 중앙선관위원 전원에 대한 탄핵안을 발의하겠다고 예고했다.
주진우 의원은 "선거의 공정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독재다.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중앙선관위원 전원의 탄핵안을 직접 발의하겠다"라며 "당장 개표를 중단하고 노태악 위원장을 포함해 선관위원 전원 사퇴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야당에서도 사태의 심각성에 공감을 표하며 개표 중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뒤따랐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는 "투표용지 부족 문제는 가볍게 다룰 문제가 아니다"라며 "출구조사가 보도된 뒤에 한참 동안 투표들이 진행된 것 자체가 투표가 왜곡될 소지가 있다"고 우려했다.
반면 집권여당 더불어민주당은 야권의 개표 중단과 재투표 여부에 선을 그었다. 또한 선관위가 개표 중단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조차 없다고 규정했다.
조승래 민주당 사무총장은 이날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기자들과 만나 "국민의힘에서 주장하는 개표 중단과 재투표 여부는 일고의 가치가 없다"며 "많은 시민들이 (이미) 투표했고 개표가 현재 진행되고 있어 중단할 필요가 없다"고 일축했다.
아울러 선관위에 대해서는 "선관위는 개표 중단을 결정할 수 없다"라며, 이대로 개표가 진행되고 결과가 발표되면 야권이 승복하지 않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우려를 향해서는 "이 문제를 가지고 서울시민 유권자들의 뜻을 불복하는 행태로 가지 않기를 바란다"고 반격했다.

사상 초유의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일으킨 중앙선관위는 서울 송파구에서 전체 유권자 수의 50%에 해당하는 투표용지만 인쇄한 것이 원인이었다고 해명했다.
허철훈 중앙선관위 사무총장은 이날 과천 중앙선관위 청사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송파구 같은 경우에는 유권자 수의 50%를 인쇄를 한 것으로 파악했다"며 "유권자 수가 100명이라면, 그 중에서 사전투표를 한 유권자도 계시고 하기 때문에, 전체 유권자 수에서 50%를 인쇄했다"고 해명했다.
주권자의 주권 행사에 따라 민의가 밝혀지고 국론이 통합돼야 하는 선거가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따라 그 절차적 정당성이 의심받게 됨에 따라, 선거가 오히려 국론 분열과 함께 국민들 간의 갈등과 반목이 증폭되는 계기가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된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오늘 개표는 우리 민주주의의 사망 선고"라며 "선거민주주의가 모독당했다"고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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