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보자 본인은 모르나..." 어정쩡한 찬조연설의 이유
[김종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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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6년 8월 9일 자 <동아일보> |
|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이 사람은 이러이러한 사람이니 꼭 써야겠다고 강조를 해주어도 별 흥미가 없을 판인데, 본인 자체를 모른다고 해놓았으니"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찬조연설이 아니라는 것이 위 기사의 지적이다.
그해의 중복은 7월 22일이고 말복은 8월 11일이다. 삼복더위에 찬조연설을 해준 것을 보면, 조봉암이 성북구 후보의 당선을 희망한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후보와의 거리를 유지했던 것이다.
그해 5월 15일 정·부통령 선거는 자유당·민주당·진보당 3당 모두 승리를 자축할 만한 이유가 있는 선거였다. 대통령 선거에서 504만 6437표를 획득한 자유당은 이승만 대통령의 3선을 관철시켰다.
선거 열흘 전에 신익희의 급서로 후보를 잃은 민주당은 자당 지지자들이 조봉암을 찍지 못하도록 '무효표 찍기 운동'을 벌여 185만 6818표의 무효표가 나오게 만들었다. 후보를 잃은 상태에서 사실상의 민주당 표를 이만큼 얻어냈다. 민주당이 이를 승리로 해석했다는 점은 그해 7월 14일 자 <경향신문>에 나오는 "동당(同黨)은 5·15 선거에서 거둔 승리와 자신으로써 지방선거에 대처하고"라는 문구에서도 확인된다.
진보당은 자유당의 탄압과 민주당의 냉대 속에서도 216만 3808표를 획득했다. 절대적인 열세 속에서도 이만한 성과를 거뒀으니 승리를 자축할 만했다.
자유당의 지시 받은 경찰
자유당은 대통령 선거에서 이겼지만 부통령 선거에서는 패했다. 민주당은 장면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성과를 거뒀다. 진보당은 자유당 이기붕의 당선을 막고자 자당 부통령 후보인 박기출을 사퇴시켜 민주당 장면에게 표가 몰리게 만들었다. 장면과 이기붕의 득표율이 46.4% 대 44.0%였다는 점은 박기출의 사퇴가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를 보여준다. 장면의 당선은 진보당의 역량을 역설하는 일이었다.
자유당의 8월 지방선거 대책은 위와 같이 3당 모두 승리를 자축할 여지가 있는 어정쩡한 결과가 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데에 주안점이 두어졌다. 자유당이 계획한 일은 민주·진보 양당의 후보 등록을 최대한 막는 것이었다.
자유당의 지시를 받은 경찰은 야당 출마자들의 입후보를 방해하거나 각종 혐의를 씌워 영창에 가두는 일이 많았고, 선거사무 공무원들은 야당 출마자가 등록 서류를 들고 나타나면 자리를 피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것이 1956년 지방선거의 최대 특징이다.
그해 7월 17일 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선거 출마를 추진하던 주아무개는 대문 앞이 더럽다는 이유로 23일간의 구류처분을 받았다. 그는 저녁에 분명히 집 앞을 청소했다고 증언했다. 그런데도 새벽에 보니 쓰레기가 문 앞에 있었다고 한다.
김아무개의 경우에는 대문에 문패가 없다는 이유로 10일간의 구류처분을 받았다. 이 시기에는 경찰이 문패 미부착을 이유로 야당 인사들을 잡아가는 일이 전국적인 유행이었다. 그런데 김아무개의 집에는 분명히 문패가 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밤중에 갑자기 없어지더니 그런 처분이 나왔다는 것이다.
문패 부착을 권장한 일차적 이유는 우편사무 원활화에 있었지만, 이는 사회 심리적 측면과도 관련이 있었다. 그해 3월 14일 자 <조선일보>는 "문패를 잘 달지 않는 습관은 6·25 사변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라고 말한다. 문패 미부착은 사회불안을 반영하는 증표이기도 했다.
한편, 조아무개는 술 한잔하자는 지역 형사의 말을 듣고 술집에 따라갔다. 형사는 통금시간이 될 때까지 시간을 끌더니, 10시가 되자 통금 위반이라며 조아무개를 연행했다.
7월 17일 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청소 상태 불량을 이유로 부산에서 구속된 사람은 붙들린 직후에 석방됐다. 경찰은 그의 맹세를 듣고 풀어줬다. 그의 맹세는 '앞으로 청소를 잘하겠다'가 아니라 '지방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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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년 재판정에 선 진보당 당수 조봉암. |
| ⓒ 위키미디어 공용 |
읍의원 후보 1720명 중에서 자유당은 692명, 민주당은 130명, 공화당은 30명, 농민회는 3명, 무소속은 892명이었다. 시의원 후보 967명 가운데서 자유당은 295명, 공화당은 9명, 국민회는 5명, 진보당은 1명, 무소속은 526명이었다.
시장 선거의 경우에는 전체 26명 중에서 자유당이 5명, 민주당이 3명, 무소속이 18명이었다. 읍장의 경우에는 전체 104명 중에서 자유당이 30명, 무소속이 67명, 민주당이 7명이었다. 1870명이 정원인 면장 선거에는 자유당 후보가 780명, 무소속이 1036명, 민주당이 50명, 진보당과 공화당 각 1명이 나섰다.
진보당은 시의원 후보, 면의원 후보, 면장 후보를 각 1명 배출했다. 대선에서 2위를 차지한 정당에 대한 집중 견제가 주효했던 것이다.
특별시 및 도 의원 후보자들의 소속 정당을 알려주는 기사에는 민주당은 등장해도 진보당은 아예 등장조차 하지 않는다. 그해 8월 12일 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자유당 후보자는 452명, 민주당은 276명, 국민회는 43명, 농민회는 20명, 기타는 30명, 무소속은 873명이었다.
기초건 광역이건 자유당 다음으로 무소속이 많았다. 민주당이나 진보당 소속으로 출마하려고 하면 경찰이 필사적으로 저지하기 때문에, 아예 정당 공천을 포기하고 무소속을 택한 후보가 많았다.
이승만 세력이 몰락한 이유
이 점은 조봉암의 찬조연설이 어정쩡했던 이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조봉암이 지지한 후보는 무소속 출마자였다. 조봉암이 그를 지원한 사실은 그의 실제 소속이 어디였는지를 시사한다. 조봉암이 그를 명확히 지지하지 못한 것은 그가 공식적으로 무소속이었기 때문이다. 조봉암이 대놓고 지지했다면, 이 지역 경찰들이 자극을 받아 그 후보의 신변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었다.
민주당의 입후보 기회는 현저히 차단되고 진보당의 입후보 기회는 사실상 거의 차단된 이 선거는 자유당의 완승으로 끝났다. <역사와 경계> 2022년 제124집에 실린 전성현 동아대 교수의 논문 '이승만 정권기 지방선거 결과를 통해 본 지방자치제의 의미'에 따르면, 시읍면장 선거에서는 자유당이 과반수를 간신히 넘긴 가운데 자유당과 무소속이 거의 절반씩 나눠 갖는 결과를 나타냈다.
시읍면 의원직은 자유당이 67.7%, 무소속이 28.6%, 민주당은 2.0%를 가져갔다. 도의원직은 자유당이 57.0%, 민주당이 22.4%, 무소속이 18.9%를 차지했다. 외형상으로는 자유당과 제2당의 차이가 크지만, 무소속에 포함된 정당 후보들을 감안하면 그 차이는 현저히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노골적인 입후보 방해로 지방선거 압승을 거둔 자유당은 4년 뒤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4할 사전투표라는 기법을 앞세웠다가 일거에 몰락했다. 1956년 지방선거는 겉으로는 이승만의 승리이지만, 이는 이승만에 대한 혐오 정서를 더욱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승만 세력이 몰락한 이유를 보여주는 자료 중 하나가 1956년 지방선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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