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 없는 시대’… 한국은행, 돈 찍는 데 1179억 썼다

박세환 2026. 6. 3.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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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경제]
지난해 화폐 5억4000만장 제작
5만원권 보유 수요 지속 증가
손상화폐 교체·비축 수요 영향도
뉴시스


카드와 간편결제 확산으로 현금이 계산대에서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행은 지난해 새 화폐를 만드는 데 1100억원을 넘게 썼다. ‘현금 없는 시대’인데 화폐 제조에 1000억원대 비용을 들이는 것은 왜일까. 현금을 직접 결제에 쓰는 빈도는 줄었다고 해도 고액권을 보유하려는 수요는 여전히 남아 있다. 지폐 원재료비와 제조 단가도 올랐다. 한국은행 입장에서는 고령층과 디지털 금융 취약계층을 위해 현금 유통망을 유지해야 한다. 현금을 위한 비용 지출은 당분간 불가피할 전망이다.

2일 한은 재무현황 등에 따르면 지난해 한은의 화폐제조비는 1179억원으로 집계됐다. 2024년 890억원보다 289억원, 32.5% 늘어난 규모다. 화폐제조비는 한은이 한국조폐공사 등을 통해 은행권과 주화를 새로 제조하는 데 드는 비용이다.


한은이 꼽은 제조비 증가의 가장 큰 이유는 ‘실제 제작 물량 확대’다. 한은 관계자는 “화폐 발행량과 별도로 매년 제작하는 물량이 있다. 2024년에는 3억5000만장, 지난해에는 5억4000만장을 제작했다”며 “재작년과 비교하면 지난해 화폐를 40% 이상 더 찍은 셈”이라고 말했다.

제작 물량이 곧바로 시중 발행량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한은은 시중 수요 변화에 대비해 일정 물량을 비축하고, 유통 과정에서 낡거나 훼손돼 폐기되는 화폐를 보충하기 위해 새 화폐를 만든다. 한은 관계자는 “화폐발행잔액은 ‘잔액’(stock)의 개념이고, 매년 제작하는 물량은 ‘흐름’(flow)의 개념”이라며 “제작한 화폐가 반드시 같은 해 발행량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화폐제조비는 최근 몇 년간 1000억원 안팎에서 등락해왔다. 2020년 1114억원이던 화폐제조비는 2021년 1284억원까지 늘었다가 2022년 1214억원, 2023년 1097억원으로 낮아졌다. 2024년에는 890억원까지 줄었지만 지난해 다시 1100억원대로 올라서며 2021년 이후 4년 만에 가장 큰 규모를 기록했다.

지난해 제조비가 큰 폭으로 늘어난 데에는 2024년 제조비가 예년보다 낮았던 기저효과도 작용했다. 코로나19 전후 현금 수요 확대에 대응해 한동안 화폐 제작이 많았다. 그러나 이후 고금리기 예금 수요가 늘면서 시중 현금 흐름이 달라졌고 2024년 제작 물량은 상대적으로 줄었다. 이듬해 필요한 화폐를 다시 보충하는 수요가 커지면서 제조비가 반등했다. 특히 비용이 많이 드는 5만원권 제작 증가가 영향을 미쳤다. 5만원권은 위조 방지를 위한 보안 요소가 많이 들어가 은행권 가운데 제조 단가가 높은 편이다.

화폐 제작비 증가는 현금 사용이 갈수록 줄어드는 흐름과는 대조적이다. 한은의 경제 주체별 화폐사용현황 조사에 따르면 개인의 월평균 현금지출액은 지난해 32만4000원으로 2021년 50만6000원보다 36.0% 감소했다. 월평균 지출액에서 현금이 차지하는 비중도 17.4%로 낮아졌다. 카드와 모바일 결제, 간편송금 등이 일상화되면서 현금은 일상 소비 현장에서 점점 밀려나는 모습이다.


하지만 현금 결제가 줄었다고 해서 시중 현금 규모까지 감소한 것은 아니다. 시중에 유통 중인 현금 규모를 뜻하는 화폐발행잔액은 증가세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5만원권 수요는 증가 추세다. 올해 1분기 말 기준 화폐발행잔액은 215조원 수준까지 늘었다. 현금은 덜 쓰이지만, 고액권을 중심으로 보유하려는 수요는 여전히 남아 있는 셈이다.

원가 상승도 제조비 증가의 원인이다. 지폐에는 위조 방지를 위한 각종 보안장치가 들어가고, 주화는 금속 가격 변화의 영향을 받는다. 종이와 잉크, 금속 등 직접 재료비가 오르면 제조 단가도 함께 높아질 수밖에 없다. 한은 관계자는 “국가계약법상 직접 재료비 등이 일정 수준 이상 오르면 이를 반영하게 돼 있다”며 “지난해 물가 상승에 따른 재료비와 제조 단가 상승분도 화폐제조비에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광복 80주년 기념주화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관련 기념주화 발행도 일부 영향을 줬다.

반면 동전은 정반대 흐름을 보이고 있다. 주화는 2020년 이후 한은이 새로 찍어 공급하는 양보다 시중에서 돌아온 물량이 더 많다. ‘순환수’ 기조다. 지난해에도 동전 환수액이 발행액보다 355억원 많아 6년 연속 환수 우위가 계속됐다. 지난해 5월 10원 주화 발행액은 1700만원, 170만개에 그쳐 1992년 통계 작성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손상화폐 교체 수요도 여전하다. 지난해 한은이 폐기한 손상화폐는 3억6401만장, 액면가 기준 2조8404억원어치였다. 다만 폐기량은 2024년 4억7489만장에서 지난해 3억6401만장으로 1억장 넘게 줄었다. 실제 제조 물량 확대와 권종 구성 변화, 제조 단가 상승이 맞물리면서 전체 제조비는 오히려 늘어난 것으로 풀이된다.

현금 유통망 유지 비용도 과제로 남아있다. 현금 사용이 줄면 현금수송업체, ATM 운영업체, 금융기관 점포의 수익성은 악화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금 접근성이 낮아지면 고령층과 저소득층, 디지털 금융 이용이 어려운 계층은 불편을 겪게 된다. 한은 관계자는 “현금 사용은 줄고 있지만 고령층과 디지털 금융 이용이 어려운 계층을 고려하면 현금 유통망을 급격히 줄이기는 어렵다”며 “현금 접근성과 수용성이 낮아질 경우 화폐유통시스템 자체가 위축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박세환 기자 foryo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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