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 전 사라진 거대 야생 소...살아남은 존재 있다
단순한 동물 소개를 넘어 현장에서 동물을 마주하는 수의사의 시각으로 멸종의 원인과 생태계의 유기적 관계를 분석합니다. 이미 사라진 동물의 '부재'를 통해 현재 위기종을 향한 '보호 의지'를 되돌아보고 성공적인 종 보전 프로젝트 사례와 일상 속 실천법을 공유합니다. <기자말>
[이하늬 기자]
새벽 공기가 차가운 동물원의 아침, 수의사로서 나의 일과는 가장 먼저 '말 못 하는 친구들'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매일 아침 청진기를 목에 걸고 차가운 동물사의 철문을 열 때마다, 코끝을 스치는 특유의 동물 체취와 건초 냄새, 그리고 묵직한 공기가 저를 맞이합니다.
청진기 너머로 전해지는 규칙적인 심장 박동은 단순한 생체 신호 그 이상입니다. 거친 숨소리와 나를 빤히 바라보는 맑은 눈망울들. 그 생명력 앞에 설 때마다 나는 수의사로서 경외심과 동시에 형용할 수 없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낍니다. 우리가 돌보는 이 동물들은 단순한 전시물이 아니라 수백만 년의 진화가 빚어낸 경이로운 유산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초식동물의 커다란 눈망울을 볼 때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동물원의 많은 초식동물 중 코끼리와 함께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동물이 있습니다. 바로 물소, 들소, 큰뿔소와 같은 소과 동물들입니다.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달과 소를 풍요의 상징으로 여겨왔습니다. 달이 차오르듯 생명력을 뿜어내는 소의 존재는 인류 문명을 지탱해 온 가장 큰 기둥이었습니다. 농경 사회에서 소는 가족이었고, 재산이었으며, 신에게 바치는 신성한 제물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든든한 기둥의 '뿌리'가 이미 400년 전에 인간의 손에 의해 무참히 잘려 나갔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오늘은 현대 가축 소의 조상이자 유럽 생태계의 장엄한 뿌리였던 그러나 이제는 박물관의 먼지 쌓인 뼈로만 남은 비운의 거대 야생 소 '오록스(Aurochs)'와 외형적으로 오록스와 비슷한 '큰뿔소(Watusi Cattle)'를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것과 지켜야 할 것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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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스코 동굴 벽화 |
| ⓒ 위키미디어 공용 |
수컷의 어깨높이는 성인 남성의 키를 훌쩍 넘는 180cm에 달했고, 몸무게는 무려 1.5톤에 육박했습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기>에서 "오록스는 거의 작은 코끼리만 하며, 그 기운과 속도가 엄청나다"고 경탄했을 정도로 몸집이 압도적이었습니다. 현대의 가축 소와 비교하면 다리가 훨씬 길고 튼튼했으며, 머리에는 길이 80cm에 달하는 거대한 뿔이 앞을 향해 휘어져 있었습니다.
이들은 유럽 생태계의 '조절자'였습니다. 여름이면 광활한 들판을 누비며 풀을 뜯어 초원의 균형을 맞추었고, 가을과 겨울엔 숲속 깊이 들어가 도토리와 어린 나뭇가지를 먹으며 숲의 밀도를 조절했습니다. 거대한 몸집과 사나운 성질 덕분에 늑대나 곰, 심지어 과거 유럽에 서식했던 사자조차 다 자란 오록스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오록스는 인도에서 시작해 유라시아와 북아프리카까지 뻗어 나갔고, 각 지역에서 독자적인 아종으로 분화되었습니다. 이들 중 일부가 가축화되어 우리가 오늘날 마시는 우유와 식탁에 오르는 쇠고기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즉, 현대 축산 문명의 모든 유전적 설계도는 바로 이 강인하고 사나운 '멧소'들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하지만 비극은 이들이 인간과 너무 가까워졌다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오록스의 멸종사는 농업의 발전과 궤를 같이합니다. 인구가 늘고 농경지가 확대되면서 오록스의 터전은 조각조각 파편화되었습니다. 숲은 잘려 나갔고 들판은 울타리로 가로막혔습니다. 결정적인 타격은 인간이 길들인 가축들로부터 전해진 전염병이었습니다. 오늘날은 동물원에서 전염성 질환을 막기 위해 철저히 방역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개념이 없었습니다. 야생 오록스들에게 가축 소의 질병은 면역체계가 갖춰지지 않은 치명적인 재앙이었습니다.
여기에 '사냥'이라는 인간의 욕망이 기름을 부었습니다. 오록스의 거대한 뿔은 용맹을 증명하는 전유물이었고, 그들의 고기는 권력자의 식탁을 빛내는 최고의 식재료였습니다. 결국 인도와 동아시아, 북아프리카에서 차례로 자취를 감춘 오록스는 최후의 보루로 유럽 동부의 깊은 숲, 폴란드를 선택했습니다.
16세기 말, 폴란드 왕실은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야크타로프카 왕실 보호림'을 지정하고 전담 관리인을 두어 사냥을 엄격히 금지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근친교배와 서식지 고립으로 약해진 개체군은 다시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1627년 폴란드 약토루프 숲에서 마지막 남은 암컷 오록스 한 마리가 숨을 거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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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큰뿔소 |
| ⓒ 이하늬 |
큰뿔소의 가장 압도적인 특징은 단연 이름처럼 거대한 뿔입니다. 이들의 뿔은 최대 2.4m까지 자라며, 그 밑동의 지름 또한 성인 남성의 허벅지만큼 굵습니다. 수의학적으로 볼 때 이 거대한 뿔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닙니다. 더운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혈액을 뿔로 보내 열을 식히는 '냉각 시스템' 역할을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그 거대한 뿔을 가지고도 좁은 숲길이나 가시덤불 사이를 놀라울 정도로 잘 통과한다는 것입니다. 큰뿔소들은 머리를 이리저리 부드럽게 움직여 뿔의 위치를 조절하며 좁은 통로를 지납니다. 이는 진화적으로 숙달된 놀라운 공간 지각 능력입니다. 몸길이 250~300cm, 몸무게 최대 730kg에 달하는 이들은 적갈색의 매끄러운 피부를 뽐내며 사바나의 태양 아래 서 있습니다.
무엇보다 감동적인 것은 아프리카 유목민과 큰뿔소의 관계입니다. 우간다의 와투시족, 마사이족, 삼부루족에게 이 소들은 단순한 가축 이상의 존재입니다. 이들은 큰뿔소를 영적인 존재로 숭배하며, 결코 함부로 도살하거나 고기로 이용하지 않습니다. 젖조차 짜지 않고 오직 그들의 존재 자체를 가문의 재산이자 명예로 여깁니다. 유일하게 이용하는 것은 그들의 배설물인데, 이를 말려 땔감이나 건축 자재로 사용합니다.
오록스가 유럽에서 인간의 정복욕과 탐욕에 의해 사라져갈 때, 아프리카 유목민들은 이 거대한 생명을 신성시하며 수천 년간 공존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오늘날 박물관의 뼈가 아닌 살아 숨 쉬는 오록스의 그림자를 큰뿔소의 위엄 속에서 마주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늘 잃고 나서야 뒤늦은 후회를 합니다. 1920년대 독일의 헤크 형제는 살아남은 소들 중 오록스의 형질을 가진 개체들을 선택 교배하여 조상을 '부활'시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 시도는 나치즘이라는 광기와 결합하며 추악하게 변질되었습니다. 아리안족의 야성을 상징하는 도구로 오록스를 이용하려 했던 그들은, 복원 연구를 명분으로 폴란드의 비아워비에자 숲 주민들을 내쫓고 학살하는 만행을 방조했습니다.
결국 그렇게 만들어진 '헤크 소'는 겉모습이 조금 닮았고 성격만 난폭해졌을 뿐 실제 오록스의 거대한 체구와 생태적 품격은 되찾지 못했습니다.
멸종이 남긴 교훈
동물원에서 멸종위기 종들을 돌보다 보면 종종 무력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좁은 방사장 안에서 정형 행동을 보이는 동물들을 치료하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고민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멸종위기 동물을 단 한 마리라도 더 살려야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의 종이 사라지면 그와 연결된 수많은 곤충, 식물, 미생물이 연쇄적으로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그물의 끝에는 결국 인간이 매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지키는 것은 단순히 '동물 한 마리'가 아니라 인류를 지탱하는 '생명 유지 시스템' 그 자체입니다. 오록스의 멸종은 우리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합니다. '조상을 잃은 생명에게 미래는 없다'고 말입니다. 우리 식탁 위 풍요의 근원이었던 오록스를 지키지 못한 실수를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반복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오록스의 거대한 뿔이 다시는 유럽의 숲에서 돋아날 수 없을지라도, 그들이 남긴 교훈만큼은 우리 마음속에 단단히 뿌리 내려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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