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수 이별 당한 여자는 왜 방문 판매를 시작했을까
[이규승 기자]
지난 5월 27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무대 중앙에는 작은 빌라 한 채가 서 있었다. 연분홍 외벽, 촘촘한 창문의 빌라, 납작한 문과 난간. 무대 한가운데 놓인 그 집은 마치 소꿉놀이 장난감처럼 작아 보였다.
공놀이클럽의 신작연극 <미미의 미미한 연애>(작 조민송, 연출 강훈구)는 제목만 들으면 청춘 연애담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예상은 금세 비껴갔다. 이 작품은 연애의 성공과 실패를 말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왜 '미안해'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끝내 그 말을 누군가에게 요구해야만 했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 미미는 공포영화를 좋아한다. 그는 공포영화를 보면 현실을 잊을 수 있다고 믿는다. 무대 위에서는 별점 낮은 공포영화 제목들이 장난처럼 튀어나온다. <엑소시스트 터키판> <파리의 늑대인간> <낯선 사람에게서 전화가 올 때> <찍히면 죽는다>. 제목만으로도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진다. 그런데 오래가지 않는다. 미미가 왜 공포영화를 좋아하는지 알게 되는 순간, 그 우스꽝스러운 제목들은 갑자기 서늘해진다. 영화 속 귀신보다 현실이 더 무서웠던 사람에게 공포영화는 취미가 아니라 '피난처'였다.
남자친구 김기승은 공포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로맨틱 코미디를 좋아한다. 그런데도 미미 곁에 있기 위해 공포영화를 좋아하는 척한다. 처음엔 그것이 사랑처럼 보인다. 좋아하는 사람의 애정품을 함께 공유해주려는 마음처럼.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고갈된다. 사랑은 노력만으로 지속되지 않고, 돌봄은 때로 지친 사람의 얼굴을 보기 싫게 만든다. 기승은 미미를 감당하지 못하고, 미미는 기승에게 매달린다. 그러다 어느 날 기승은 도어락 비밀번호를 바꾸고 사라진다.
흔한 잠수 이별의 이야기일 수 있다. 하지만 <미미의 미미한 연애>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미미는 기승을 찾기 위해 화장품 방문판매를 시작한다. 창전동 원룸촌의 문을 하나씩 두드리면 언젠가 기승을 만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문이 열릴 때마다 사랑이 아니라 외로움이 튀어나온다. 엄마를 잃은 사람, 전세사기를 당해 방 안에 틀어박힌 사람, 외롭지 않다고 말하지만 누구보다 외로운 사람들. 그리고 끝내 미미가 가장 피하고 싶었던 이름, 아버지 문건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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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 <미미의 미미한 연애> 공연 장면 |
| ⓒ 아르코 제공 |
방문실장은 미미에게 "방판의 핵심은 판매가 아니라 방문"이라고 말한다. 처음엔 과장된 영업 철학처럼 들린다.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진다. 그러나 공연이 진행될수록 이 말은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사람 마음의 문을 여는 일. 방판은 그런 일이다. 미미는 상품을 팔러 다니는 것이 아니라, 닫힌 문 앞에서 외로움을 확인하러 다닌다. 동시에 자기 마음의 문을 여는 법을 배운다.
무대 위 방문판매 장면들은 빠르고 우스꽝스럽다. "기운이 참 좋은데 피부는 참 안 좋으세요"라는 식의 엉뚱한 영업 멘트는 실례와 위로 사이를 오간다. "외로워 보인다"고 묻는 순간, 문 안의 사람들은 하나씩 흔들린다. 외롭지 않다고 말하던 사람도 결국 무너진다. 누군가는 엄마 냄새가 나는 화장품 앞에서 울고, 누군가는 공짜 샘플 하나에 마음의 문을 연다.
여기서 강훈구 연출의 특징이 선명해진다. 이 작품은 무거운 상처를 처음부터 무겁게 밀어붙이지 않는다. 오히려 가볍게, 빠르게, 유치할 정도로 발랄하게 몰고 간다. 배우들은 인물을 갈아입듯 장면을 바꾸고, 대사는 만화처럼 튀고, 상황은 게임처럼 전환된다. 관객은 방심한다. 웃고 있다가 어느 순간 미미의 마음속 깊은 구멍 앞에 서게 된다.
웃음과 눈물이 따로 오지 않는다. 같은 장면 안에서 교차한다. 망한 공포영화 제목 맞히기, 방문판매 교육, 화장품 성분 설명, 과장된 영업 멘트가 이어질 때마다 관객들은 크게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은 어느 순간 미미의 울음과 겹쳤다. 방금 전까지 우스웠던 "문 좀 열어주실래요?"라는 말이, 어느 순간 살려달라는 말처럼 들렸다. 관객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동화시킨 뒤, 그 열린 마음 안으로 슬픔을 밀어 넣는 방식. 그것이 이 공연의 가장 인상적인 힘이다.
작품이 더 흥미롭게 다가온 것은 이야기가 막연한 도시가 아니라 실제 동네의 감각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극 중 미미가 헤매는 곳은 마포구 창전동이다. 홍대 거리에서 기승이 미미의 사진을 찍어주던 기억, 창전동 원룸촌의 문을 두드리는 동선, 155번지 301호와 옥탑방, 마포구 1인 가구를 언급하는 실장의 과장된 영업 논리까지, 작품은 청년의 외로움을 실제 동네의 골목과 문패 속으로 끌어내린다. 공놀이클럽이 마포문화재단 상주단체라는 점도 의미 있게 작동된다. 마포의 골목, 홍대 주변의 생활감, 원룸과 옥탑방의 공기가 무대 위로 그대로 안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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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 <미미의 미미한 연애> 공연 장면 |
| ⓒ 아르코 제공 |
듣고 싶었지만 듣지 못한 말. 받아야 했지만 받지 못한 말. 그래서 자신도 할 수 없게 된 말이 됐다. 미미는 '미안해'라는 말을 잃어버린 채 이십대 중반의 성인이 된다. 그는 남자친구인 기승에게도, 엄마에게도, 누구에게도 쉽게 사과하지 못한다. 단순한 고집이 아니다. 너무 오래 사과받지 못한 사람의 멈춤. 사과받아야 했던 사람이 사과하는 법을 잃어버린다. 그 역설이 미미의 몸에 박혀 있다.
기승과의 관계도 그래서 단순한 연애가 아니다. 기승은 처음에 미미를 알아봐 준 사람이다. 홍대 거리에서 고개도 못 들고 있던 미미에게 어딘가 망가진 것 같아서 예쁘다고 말해준 사람. 누군가 자신을 아름답다고 말해준 첫 순간. 미미가 기승에게 매달리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기승은 미미를 사랑한 남자이기 전에, 미미를 세상 밖으로 끌어낸 사람이다.
하지만 기승은 미미의 구원자가 될 수 없었다. 그는 미미를 돌보며 자기 삶이 제자리라고 느낀다.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카메라는 미미가 문건식을 찍느라 용량이 가득 차 있다. 그는 월세를 내고, 알바를 하고, 학교를 다니며 점점 고갈된다. "나 너랑 있으면 자꾸 보기 싫은 내가 되는 것 같아." 그 말은 비겁하지만 동시에 진실이다. 사랑이 언제나 사람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랑은 사람을 자기 자신이 싫어지는 곳까지 데려간다.
후반부 기승의 재등장은 이 작품답게 절절하지 않고 우스꽝스럽다. 오래된 화장품 때문에 얼굴이 뒤집힌 남자가 항의하러 돌아온다. 객석은 웃지만, 그 웃음 속에서 기승은 처음으로 미미에게 사과한다. 이 장면이 좋은 이유는 재회를 낭만으로 포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관계는 여전히 가난하고, 월세는 오르고, 현실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사과는 필요하지만, 사과만으로 삶은 해결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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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 <미미의 미미한 연애> 공연 장면 |
|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문건식은 문을 열지 않는다. 그는 자신도 아버지에게 맞고 자랐다고 고백한다. 양손잡이였던 아버지가 왼손과 오른손으로 때렸고, 어디로 피해도 맞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미미의 우는 얼굴을 보면 자기 얼굴이 보였단다. 그는 그렇게 변명한다. "난 그래서 그랬던 거야."
그러나 미미는 그 말을 받아주지 않는다. 연극은 폭력의 대물림을 이해하려 하지만, 그것을 용서로 덮지 않는다. 미미는 말한다. 맞았다고 해서 때리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사과받지 못했다고 해서 사과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라고. 그 순간 미미는 피해자의 자리에서 처음으로 자기 언어를 갖는다.
미미가 요구하는 "미안해"는 단순한 사과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 삶의 진실을 확인받고 싶은 절박한 요구다. 내가 당한 일이 진짜였다는 것. 내가 아팠다는 것. 내가 잘못해서 맞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 내가 울어서 맞은 것이 아니라, 당신이 나를 때린 것이었다는 것. 그 사실을 가해자의 입으로 듣고 싶은 것이다. 미미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보다 먼저 인정이다. "미안해"라는 말은 그 인정의 가장 짧은 형태다.
문건식은 처음엔 말하지 못한다. 그는 한 번도 사과받은 적이 없어서 사과할 줄 모른단다. 비겁하지만 처참하다. 하지만 미미는 물러서지 않는다. 미안하다는 말을 못 들어도 미안하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문장이 작품의 심장이다. 미미는 그 말을 아버지에게 전하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도 하고 있는 셈이다. 사과받지 못한 삶에 갇혀 사과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남지 않겠다고.
결국 문건식은 "미안해"라고 말한다. 아주 늦은 말이다. 충분하지도 않고, 모든 것을 회복시키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 한마디는 미미에게 필요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미미는 자기 입으로도 "미안해"를 말할 수 있게 된다.
마지막에 미미가 기승에게 건네는 사과는 결정적이다. 너라는 사람을 봐주지 않고 문건식의 대체품으로 생각해서 미안하다고. 내 생각만 해서 미안하다고. 네가 나를 알아봐줬는데 나는 너를 알아보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오랫동안 너를 찾아다녔지만 정작 진짜 너를 찾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이 사과가 중요한 이유는 미미가 더 이상 사과를 요구하는 사람으로만 남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마침내 사과하는 사람이 된다. 이것은 굴복이 아니라 자기 회복이다. 아버지에게 빼앗긴 말을 되찾아 자기 언어로 사용하는 순간이다.
<미미의 미미한 연애>는 연애극이면서 동시에 정체성 회복의 이야기다. 미미는 기승을 찾으러 나섰지만, 끝내 자기 자신을 찾는다. 왜 사랑에 매달렸는지, 왜 공포영화를 보며 현실을 잊으려 했는지, 왜 문 앞에서 떨었는지, 왜 미안하다는 말을 못 했는지 하나씩 알아간다. 완벽하게 치유되지는 않는다. 이 연극은 그런 값싼 결말을 주지 않는다. 대신 아주 작은 변화 하나를 보여준다. 닫힌 문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끝내 해야 할 말을 하는 사람의 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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