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투성이 된 투우사, 환호하는 관중... 찬반 논란은 뒷전
[김상목 기자]
검은 황소가 화면에 모습을 드러낸다. 정면을 응시하는 흑우의 눈동자는 의도를 알 수 없기에 더욱 불가사의하다. 소의 눈을 저렇게 근접해서 볼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 한우의 슬픈 눈에 익숙한 이들에게 황소의 표정은 야생동물을 숲에서 마주치는 매혹과 두려움을 동시에 던진다.
장면이 바뀐다. 한 남자가 긴장한 표정으로 입기엔 과할 만큼 화려하고 장식적인 복장을 차려입은 다음 투기장(아레나)에 등장한다. 황소를 상대하는 '투우사', 그중에도 가장 스포트라이트 받는 '마타도르'다. 그는 붉은 천과 검을 움켜쥔 채 섬뜩한 뿔을 세운 황소와 대결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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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독의 오후> 스틸 |
| ⓒ 필름다빈 |
하지만 영화가 시작되면 시선은 점점 붙박이가 되고 만다. 실로 기이한 체험이다. 투우사는 황소와 딱 붙어 근접한 채, 계속 소를 도발하며 목숨 건 도박을 벌인다. 경기장을 메운 관중은 환호와 야유를 뒤섞어 함성을 지르다 문득 정적에 잠기곤 한다. 카메라는 그 침묵의 순간을 절묘하게 포착해 화면에 비춘다. 적막이 끊어지는 찰나에 생과 사가 결정된다. 곧이어 절규하듯 외치는 관중과 참던 숨을 토하는 투우사, 그리고 나자빠진 야수가 눈에 들어온다.
안드레스는 '마타도르'다. 투우사는 일대 일로 황소와 대적할 수 없다. 소에 못지않게 고도로 훈련된 말에 탄 '피카도르(Picador)', 몰이꾼 역할을 맡은 '반데리예로(Banderillero)'가 손에 쥔 창과 작살로 연거푸 소를 공격해 힘을 빼놓으면 마타도르는 붉은 천으로 지친 소를 도발하며 대치한다. 최대한 바싹 붙어 흥분한 소를 솜씨 좋게 피하며 정면 대결을 유지한다. 마침내 황소가 허점을 보이면 예리한 검으로 일격에 목덜미를 공격해 쓰러뜨리는 주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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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독의 오후> 스틸 |
| ⓒ 필름다빈 |
3회의 시합은 다른 단면으로 화면에 담긴다. 첫 번째는 정석적인 투우 경기다. 투우가 실제로 얼마나 장시간 집중력과 체력을 요구하는지, 대체 저만큼 바짝 붙어 흥분한 소의 씩씩대는 콧소리와 단말마의 신음까지 바로 곁에서 확인할 수 있는지 <고독의 오후>로 처음 확인할 이가 적지 않을 테다. 투우란 이런 것이라는 듯 한 번의 경기가 요약본처럼 작동하는 셈. 그런데 이걸 두 번 더 답습한다면 뭐 볼 게 더 남아 있을까 싶을 테다.
두 번째 시합에선 아까 능수능란하게 황소를 요리하던 안드레스에게 시련이 닥친다. 말로만 듣던 상황, 투우사가 시합 중 소에게 들이받혀 중상을 입거나 죽을 수 있음을 이번 경기를 보고 나면 확실히 파악할 수 있다. 4년간 고도로 관리되고 엄중하게 선발된 황소라면 행동 패턴도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해야 한다. 만일을 대비해 예비 선수 용도로 다른 황소도 대기중이다. 수백 년 역사를 가진 스페인의 국기 스포츠는 그렇게 허술하지 않다.
그러나 이번엔 안드레스의 오랜 경력에도 위기가 닥칠 뻔한다. 그는 '좋은 소'가 아니라며 적수에 대해 썩 만족하지 못한다는 뉘앙스를 드러낸다. 변칙 행동으로 소의 무시무시한 뿔에 부딪히고 쓰러져 자칫 밟혀 죽거나 뿔에 찍혀 목숨까지 위태로울 위기를 안드레스는 동료들의 긴급 조력과 자신의 숙련도로 간신히 벗어난다. 하지만 의상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소와 자신의 피가 뒤범벅된 피투성이 상태다. 그러나 기권이나 휴식은 없다. 관중은 열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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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독의 오후> 스틸 |
| ⓒ 필름다빈 |
<고독의 오후> 속 투우 대결을 보고 있자면, 고대 로마의 검투사 시합이 저런 흥분을 조성했겠구나 연상하긴 어렵지 않다. 서로의 목숨을 담보로 일진일퇴의 대결을 벌이다 최대한 극적으로 폼나는 죽음이 이뤄져야 한다. 싱겁거나 느슨하면 야유를 받는다. 투우사가 간이 배 밖에 나온 듯 객기를 부리며 위험을 무릅쓸수록 객석에선 용감하다며 환호하고 응원해준다. 이것에 맛을 들이면 더 위험한 대치를 최대한 길게 이어간다. 8 ~ 9시간씩 이어지기도 한다.
응급 조치를 겨우 마치고 털썩 주저앉은 안드레스에게 동료들은 행운의 남자라 덕담을 건넨다. 안그래도 분명히 시합 과정에서 황소에게 들이받혀 뿔에 관통된 것 같았는데 용케 소의 뿔이 담장에 박히는 바람에 치명상을 면했다. 적지 않은 동료가 뿔에 꿰뚫리거나 짓밟혀 불구가 되고 유명을 달리한 걸 숱하게 지켜봤을 그의 심경은 어땠을까? 숙소로 돌아와 의상을 갈아입는 안드레스의 옆구리엔 응급처치한 상태로 피가 밴 붕대가 칭칭 동여매진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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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독의 오후> 스틸 |
| ⓒ 필름다빈 |
가장 긴 분량을 점유하는 이번 시합은 마타도르 안드레스의 긴장 속 상황 파악으로 출발한다. 주변 배경에 그치던 '피카도르' 동료가 초반 주역이다. 고도로 유기적인 팀플레이가 이뤄짐을 상기하며 논란에 휩싸인 투우가 오랜 전통의 산물임을 드러내는 장치로 기능한다. 스페인 내에서도 단순히 동물복지를 넘어 복잡한 역사적, 지역적 논쟁에 둘러싸인 투우의 현황을 숙지한 감독이기에 가능한 접근법이다. 섣부른 의견 제시보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는 태도다.
마침내 보고만 있어도 진이 빠지는 최종 결전이다. 첫 시합부터 연속된 특별 촬영기법이 이제 절정에 도달한다. 박진감을 끌어올리고자 배속을 돌리고픈 유혹에 빠질 법한데, 카메라는 '슬로우 시네마'를 고수하는 감독의 스타일을 계승하며 천천히 돌아간다. 다만 어떻게 가능했는진 몰라도 안드레스가 흥분해 날뛰는 황소와 정면에서 마주보듯 카메라 역시 바짝 다가선다. 디지털 기술 발전으로 망원 촬영 감도가 극한대로 높아졌기에 가능한 접근이다.
21세기 다큐멘터리가 세계의 현안을 대하는 방식
입을 쩍 벌리고 대체 승부를 지켜보는 관객은 이제 아레나 관중과 근접한 체험에 휘말린다. 마침내 결판이 났다. 경기가 끝나고 다들 집에 갈 시간, 영화의 순간도 저물어간다. 어릴 적부터 동경했던 위대한 투우사의 길을 걷는 안드레스는 자신이 전수받은 숙명을 오늘도 치른 것처럼 만감 교차하는 표정이다. 이제 관객은 피상적으로 알던 투우가 어떤 실체와 현황을 갖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찬반 논란을 초월해 모두를 쟁점으로 끌어들이는 탁월한 효능감이다.
오직 영화만이 제시할 수 있는 세상의 단면을 <고독의 오후>는 21세기 첨단기술을 적극 활용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는 다른 각도로 극대화한다. 독립예술영화가 디지털 시대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구구절절 자막과 내레이션 설명 없이 감각적 메시지 전달은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한 이들이라면 알베르 세라의 독창적 다큐멘터리를 외면하긴 힘들어 보인다.
<작품정보>
고독의 오후
Tardes de soledad
Afternoons of Solitude
2024 스페인 다큐멘터리
2026.06.03. 개봉 126분 청소년관람불가
감독 알베르 세라
수입/배급 필름다빈
72회 산세바스티안영화제 황금조개상
카이에 뒤 시네마 2025 베스트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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