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빚 줄었는데 왜 불안할까…BIS가 본 한국 환율의 새 ‘뇌관’

박세환 2026. 6. 1.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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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현구 기자

한국은 이제 달러가 부족한 나라가 아니다. 외국에 갚아야 할 돈보다 해외에 가진 자산이 더 많은 ‘순대외채권국’이다. 1997년 외환위기 때처럼 달러 빚에 몰려 흔들리던 한국 경제와는 체질이 달라졌다.

하지만 원·달러 환율이 급등할 때마다 시장에서는 여전히 달러가 부족하다는 불안이 반복된다. 나라 전체로 보면 달러 자산은 크게 늘었는데, 정작 금융시장은 환율 충격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셈이다. 한국이 해외에 가진 자산은 많아졌지만, 보험사와 자산운용사 등의 해외투자가 늘면서 환율 충격이 국내 금융시장으로 번질 수 있는 새 연결고리가 생겼다는 국제결제은행(BIS)의 지적이 나왔다.

BIS가 최근 공개한 ‘변화하는 국제통화체제 속 신흥국의 자본흐름과 환율·금융여건’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2014년 3분기 순대외채권국으로 전환했다. 이후 해외에 가진 자산이 외국인이 국내에 가진 자산보다 빠르게 늘었다. BIS에 따르면 지난해 2분기 기준 한국의 순대외금융자산은 1조300억 달러로 국내총생산(GDP)의 약 55%에 달했다.

BIS가 주목한 것은 달러 자산이 늘어난 방식이다. 과거에는 외환보유액이 한국의 대외건전성을 보여주는 대표 지표였다. 위기에 대비해 중앙은행이 달러를 얼마나 쌓아뒀는지가 중요했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이 외환보유액을 크게 늘린 것도 이런 경험 때문이다.

연합뉴스

최근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달러가 중앙은행 금고에만 쌓이는 것이 아니라 보험사, 자산운용사, 연기금 같은 민간 금융기관의 해외투자 형태로 늘고 있다. 예전에는 집 안 금고에 현금을 보관하는 방식이었다면 이제는 해외 주식과 채권, 펀드에 돈을 넣어두는 방식에 가까워진 셈이다.

지난해 2분기 기준 한국의 전체 외화자산에서 포트폴리오 투자는 약 42%, 직접투자는 약 30%를 차지했다. 반면 외환보유액 비중은 약 15%였다. 한국이 가진 외화자산 상당 부분이 정부나 중앙은행이 바로 꺼내 쓸 수 있는 비상금이라기보다 민간 부문이 해외에 투자한 자산이라는 의미다.

이 변화의 중심에 보험사와 자산운용사 등 비은행금융기관이 있다. 보고서는 비은행금융기관이 국내 해외 포트폴리오 투자 증가를 이끈 핵심 주체라고 봤다. 국내 투자처만으로는 충분한 수익을 내기 어려워지면서 장기 자금을 굴리는 기관들이 해외로 눈을 돌렸다는 설명이다.

해외투자 자체가 문제라는 뜻은 아니다. 국민연금이나 보험사, 자산운용사 입장에선 국내 자산에만 투자하는 것보다 해외 자산을 함께 담는 것이 자연스러운 선택일 수 있다. 투자처를 넓히고 수익원을 다양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해외투자가 늘면 환율 위험도 함께 커진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국내 보험사가 미국 채권을 샀다고 가정해보자. 미국 채권 가격이 그대로여도 원·달러 환율이 움직이면 원화로 계산한 수익률은 달라진다. 그래서 금융기관들은 환율이 크게 움직일 때 손실을 줄이기 위해 환헤지를 한다.

환헤지는 해외여행을 가기 전 환전 가격을 미리 정해두는 것과 비슷하다. 나중에 환율이 크게 오르거나 내려도 손실을 줄이기 위한 안전장치다. 평소에는 안전벨트 역할을 한다. 해외투자를 하면서도 환율 변동에 따른 충격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융시장이 흔들릴 때는 이 안전장치가 오히려 부담으로 바뀔 수 있다. BIS가 지적한 핵심도 여기에 있다. 비은행금융기관은 해외자산을 장기로 보유하면서도 환헤지를 위해 쓰는 외환파생상품은 짧은 만기로 반복해서 연장하는 경우가 많다.

연합뉴스

쉽게 말하면 집은 장기 전세로 살고 있는데 전세자금 대출은 몇 달마다 새로 연장해야 하는 상황과 비슷하다. 평소에는 계속 연장하면 되지만 시장이 불안해져 대출 연장이 어려워지면 갑자기 부담이 커진다. 해외투자도 마찬가지다. 투자한 자산은 장기인데 환율 위험을 막는 계약은 짧게 계속 갈아타야 하면 위기 때 달러 조달 부담이 커질 수 있다.

BIS는 이런 만기 불일치를 “낡은 위험이 새 옷을 입고 돌아온 것”이라고 표현했다. 과거에는 은행이 짧은 만기로 달러를 빌렸다가 위기 때 만기 연장이 막히는 문제가 컸다. 지금은 은행의 단기외채 문제가 예전만큼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비은행금융기관의 해외투자와 환헤지 구조 안에서 비슷한 위험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의미다.

보고서에 따르면 비은행금융기관이 보유한 해외채권은 대부분 1년 이상 장기 투자다. 반면 이를 뒷받침하는 외환파생상품은 1년 미만 단기 계약 비중이 크다. 구체적으로 비은행금융기관의 채권투자 중 잔존만기 1년 이상 비중은 99.1%였지만, 외환파생상품 중 만기 1년 초과 비중은 32.6%에 그쳤다.

위기 때는 달러 수요와 공급도 엇갈린다. 금융시장이 불안해지면 보험사와 자산운용사 등은 환율 변동 위험을 더 줄이려 한다. 불이 날 것 같으면 보험을 더 들고 싶어지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환헤지 수요와 달러 조달 수요가 커진다.

반대로 달러를 빌려주거나 중개하는 쪽은 더 조심스러워진다. 불안할수록 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지갑을 닫는다. 달러를 찾는 사람은 늘어나는데 달러를 내주는 쪽은 줄어드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국내 은행이 중간 통로가 된다. 보험사와 자산운용사는 보통 은행을 통해 달러를 조달하거나 환헤지 거래를 한다. 국내 은행은 외국계 은행 등에서 달러를 가져와 비은행금융기관에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연합뉴스

평소에는 이 구조가 잘 돌아간다. 하지만 환율이 급등하면 은행도 부담을 받는다. 외화 관련 자산의 원화 환산 규모가 커지고, 파생상품 거래와 관련한 증거금 부담도 늘어난다. 은행은 자본비율과 유동성을 관리해야 하기 때문에 비은행금융기관에 공급하는 달러 규모를 줄이거나 만기를 짧게 가져갈 수 있다.

이 부담은 다시 국내 자금시장으로 번질 수 있다. 은행이 유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은행채를 더 발행하면 시장 자금이 은행채로 쏠릴 수 있다. 그러면 신용등급이 낮은 기업은 회사채를 발행해 돈을 구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처음에는 환율 문제로 시작됐지만, 은행과 비은행금융기관을 거쳐 기업 자금 조달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BIS는 이러한 과정을 ‘부정적 되먹임 고리’라고 설명했다. 환율이 오르면서 은행 부담이 커지고, 은행이 달러 공급을 줄이면 비은행금융기관의 부담이 커지고, 이 부담이 다시 국내 금융시장을 압박하는 흐름이다.

2022년 하반기 상황은 보고서가 제시한 대표 사례다. 당시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빠른 금리 인상으로 전 세계 금융시장이 긴축되면서 원화 가치는 크게 떨어졌다. BIS에 따르면 2022년 3분기 원화는 달러 대비 전년 동기보다 21.1% 절하됐다. 이 과정에서 국내 은행의 외화 관련 위험가중자산이 늘었고, 은행들의 자본비율도 전년보다 1.4%포인트 낮아졌다.

뉴시스

은행들은 비은행금융기관에 공급하는 달러 자금 규모를 줄였고, 만기도 짧게 가져갔다. 보고서는 2022년 4분기 국내 은행이 외환파생상품을 통해 비은행금융기관에 공급한 달러 자금이 전년 대비 약 10% 줄었다고 설명했다. 달러를 공급하는 수도꼭지가 줄어들고, 공급하더라도 짧은 기간만 틀어주는 상황이 된 셈이다.

증거금 부담도 컸다. BIS에 따르면 2022년 9월 국내 8대 은행의 장외파생상품 관련 증거금 납입액은 5조4000억원이었다. 같은 해 1~8월 평균 9000억원과 비교하면 6배 수준으로 늘어난 규모다. 은행들은 유동성 부담을 메우기 위해 원화채권 발행을 늘렸고, 이는 국내 시장금리 상승 압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고서는 분석했다.

한국은행의 당시 대응도 보고서에 담겼다. BIS는 한은이 2022년 3분기 175억 달러를 순매도했다고 설명했다. 외환시장 개입 내역이 공개된 이후 분기 기준 최대 규모였다. 보고서는 이 조치가 원화 약세 기대를 완화하고 환율 하락 속도를 늦추는 데 도움이 됐다고 평가했다.

한은은 은행 유동성 부담을 줄이기 위한 조치도 병행했다. 보고서는 한은이 유동성 압박을 받는 국내 은행을 지원하기 위해 대출제도를 활용했고, 담보로 인정되는 자산의 범위도 일시적으로 넓혔다고 설명했다. 은행들이 추가 증거금 부담을 감당하면서도 고유동성 자산을 과도하게 소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는 것이다.

BIS가 2022년 사례를 주목한 이유는 한국 경제의 위험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위험이 작동하는 통로가 달라졌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과거처럼 나라 전체가 단기 달러 빚에 쫓기는 구조는 약해졌지만 민간 금융기관의 해외투자와 환헤지, 은행의 달러 중개, 국내 채권시장이 하나의 사슬처럼 연결되면서 환율 충격이 다른 형태로 금융시장에 전이될 수 있다는 의미다.

BIS는 신흥국의 대외건전성이 과거보다 개선됐더라도 자본흐름의 구조와 투자자 구성이 달라진 만큼 정책 대응도 이에 맞춰 바뀌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BIS는 “외환보유액 규모만으로 위기 대응력을 판단하기보다 비은행금융기관의 환헤지 구조, 은행과 비은행 사이의 달러 조달 경로, 국내 자금시장으로 번지는 파급효과까지 함께 점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세환 기자 foryo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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