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과 두 번이나 맞서 싸운 참군인... 진짜 '애국자'의 모습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이 싸운 무대는 전두환의 제1차 쿠데타인 12·12 쿠데타다. 장태완 이후에 전두환의 제2차 쿠데타를 막고자 했던 군인은 군수기지사령관 안종훈이다. 안종훈은 1980년 5월 17일에 전두환을 가로막았다.
1979년 12·12쿠데타는 군부 내부의 갈등에서 출발했다. 이는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 겸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이 자신을 동해안경비사령관으로 좌천시키려 하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무력화시킬 목적으로 저지른 일이다.
이에 비해 5·17 쿠데타는 전두환이 행정부를 장악하고자 벌인 일이다. 전두환은 비상계엄을 제주도까지 확대하는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강구했다. 이는 군부의 권한을 강화해 행정부를 제압하고, 사실상 새로운 계엄을 선포하는 효과를 만들어 국민들과 민주화세력을 억누르기 위한 일이었다.
이 같은 성격적 차이 때문에 두 쿠데타의 전개 양상은 차별성을 보였다. 이 때문에 장태완이 전두환에게 맞서는 방식과 안종훈이 전두환에게 맞서는 방식은 각각 다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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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종훈 장군 |
| ⓒ 자료사진 |
이와 달리 5·17 쿠데타는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이 일차적으로 행정부를 장악할 목적으로 벌인 일이다. 국민과 민주화세력을 억누르는 것은 그다음 단계였다.
전두환 측이 행정부를 제압하는 단계에서는 상호 간의 유혈 충돌이 발생할 여지가 없었다. 이때 전두환에게 중요한 것은 군부의 의견 통일이었다. 군부가 단합해 행정부를 장악하는 모양새가 그에게는 필요했다. 그래서 이 단계에서는 전두환 측이 동료 군인들에게 총구를 겨누기 힘들었다.
안종훈의 대응은 이런 구도 속에서 전두환에게 위협이 될 만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그는 군부의 의견 통일을 저지하는 데 힘썼다. 전두환이 군의 단합된 힘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주안점을 뒀던 것이다.
그 무대는 전군주요지휘관회의다. 전두환이 5·17 쿠데타에 대한 군부의 지지를 얻고자 마련한 이 회의는 1980년 5월 17일 용산 국방부 제1회의실에서 열렸다. 1996년 1월 23일 서울지방검찰청 특별수사본부가 전두환·노태우 등을 기소할 때 공개한 공소장에 따르면, 오전 11시경(다른 기록에는 10시 혹은 10시 30분경)에 열린 이 회의에는 3군 지휘관 43명이 참석했다.
위 공소장은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계엄 확대에 이견이 없다는 발언을" 했다고 알려준다. 그런 뒤, "안종훈 육군 군수사령관이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는 국민의 합의에 의해 하여야 하는데 시기상조라며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고 기술한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윤석열이 계엄을 선포할 때 국민적 합의를 받은 일은 없다. 국가안보니 질서유지니 하는 명분이 운운되지만, 계엄의 진짜 목적은 국민을 억누르는 것이다. 이런 일을 벌이기 전에 국민적 합의를 받을 독재자는 없다. 안종훈의 요구는 '너희들, 계엄 하지 말아'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그의 구체적인 발언 내용은 1993년 3월 13일 자 <동아일보> '남산의 부장들 (131)'에서 확인된다. 이에 따르면, 이날 회의장 안에는 전두환의 부하들인 보안사 요원들은 물론이고 헌병들까지 깔려 있었다. 군부 지도자들이 모인 자리가 평소와 달리 아주 위압적이었다. 전두환 입장에서는 이 회의가 그만큼 중요했다.
회의 주재자인 주영복 국방부 장관이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 뒤 정치권 및 중요 인물들을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고 발언하는 순간이었다. 이때 중장 안종훈이 갑자기 장관의 말을 끊고 목청을 높이며 발언을 했다.
"군이 직접 개입한다는 것은 중요한 결과가 된다. 그리고 마지막이다. 3천 7백만 명 모두 똑같이 생각할 수는 없다. 전체 여론이 그렇게 하기를 원할 때 국민 합의에 의해서 해야 한다. 국민적 합의·총화 속에서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회의 방식도 문제다. 회의는 그 대책을 마련하는 방식에 있어서 미리 결정해놓고 하면 의미가 없다."
위 기사는 안종훈의 발언 때문에 "회의의 방향이 틀어"졌다고 알려준다. 그의 발언은 전두환의 계획에 차질을 줄 수 있을 정도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점은 발언 직후의 상황에서 확인된다.
분위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자, 전두환·노태우에 이어 신군부 3인자인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장시간 연설을 했다. 그다음에는 노태우 수도경비사령관이 일어나 "열변을 토했다"고 위 기사는 말한다. 이들의 발언은 다른 지휘관들의 입을 틀어막기 위한 것이었다. 전군 지휘관들의 지지를 받아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국무회의에 상정하고자 했던 전두환의 계획이 비상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에 나타난 장면이다.
참석자 43명 중에서 안종훈이 돋보였다는 점은 장장 4시간 이상 진행된 이 회의에 대한 박준병(1980년 당시 육군 20사단장)의 회고에서도 확인된다. 1988년 12월 22일 자 <한겨레>에 따르면, 전날 국회 광주청문회에 출석한 박준병은 그날의 회의 분위기를 묻는 오경의 민주당 의원의 질문에 대해 "안종훈 군수기지사령관이 '시나리오대로 하면 되겠느냐. 토의 좀 하자'고 발언한 것으로 기억하며, 계엄을 강화하자는 발언이 많았다"라고 답변했다.
55세 된 사람이 8년 전의 역사적 순간을 떠올리면서 안종훈의 발언만 구체적으로 기억해냈다. 그만큼 그 발언이 강한 인상을 남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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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5년 12월 28일, 검찰이 12.12당시 군수기지사령관이었던 안종훈 장군을 소환해서 비상계엄 확대에 반대하게 된 계기 등을 물어봤다. |
| ⓒ 연합뉴스 |
"이번 쿠데타가 아무리 세밀하게 오래 전부터 계획돼 진압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국민의 군대요 군인의 사명에 따라야 하는 우리 고급 장성들이 우리만 살겠다고 쿠데타군의 손을 들 수는 없는 일 아니오. 우리 군인은 군인으로서 생사를 초월해 책무를 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든 병력을 동원해 쿠데타를 진압합시다."
술자리 같은 데서 '군인은 국민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국민 편에 서면 감옥에 갈 수도 있는 위와 같은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12·12와 5·17 같은 결정적 순간에 '군은 국민의 군대다', '국민의 합의를 받으라'고 외친 것은 그런 신념이 그의 내면에 깊이 뿌리 박았음을 보여준다.
12·12 때 정부군 편에 서고 반(反)전두환 발언을 한 일로 인해 안종훈은 경남 진해의 육군대학 총장으로 보직이 변경됐다. 그랬다가 군수기지사령관이 된 뒤인 5월 17일에 또다시 반전두환 발언을 했다. 이때도 신상 변화가 있었다.
위 광주청문회 때 민주당 김광일 의원은 전군주요지휘관회의 직후에 안종훈이 보안사 준장에게 연행된 일을 거론하면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모두 합의하에 일을 추진해야지 반대자가 있으면 되느냐며 안 소장 석방 지시를 내려 석방되었다는데"라고 말했다. 그러자 주영복은 "약간의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답했다.
전두환은 전군 지휘관들의 지지를 받는 모양새를 연출해야 했다. 이 때문에 전두환은 안종훈을 구속할 수 없었다. 대신, 안종훈의 군복은 벗겼다.
소수의 위정자들을 지키기 위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군인들은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키는 애국자'라는 칭송을 듣는 일이 많았다. 안종훈은 이런 칭송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국민들을 지키기 위해 민주주의의 적들과 맞섰다. 그에게는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길이었다. 2002년에 별세한 이 애국적 군인은 지금 대전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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