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 찍는 인생네컷, 이거면 "하나둘셋"도 필요 없다 [나의 오래된 사진 이야기]

이재필 2026. 5. 31. 17:03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나의 오래된 사진 이야기] 권총을 닮은 셀비 리볼버(Selby Revolver)

사진가이자 작가로 활동하며 전통시장과 주변의 일상을 기록해왔다. 오래된 필름카메라를 통해 사라져 가는 풍경과 기억, 기록의 의미를 묻는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 <기자말>

[이재필 기자]

▲ iphon15촬영 4개의 렌즈가 순차적으로 가장 역동적으로 모든 순간을 담아준다.
ⓒ 이재필
6월을 목전에 두고 벌써 낮 기온이 30도를 훌쩍 넘어가고 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더위. 올여름은 또 얼마나 혹독하려나 걱정이 앞서다가도, 되려 이 계절에 어울리는 오래된 카메라 하나를 떠올리니 묘하게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뭉게구름이 새하얗게 피어오른 파란 하늘, 싱그러움이 짙어지다 못해 눈이 시린 초록의 풍경들. 그리고 그 찬란한 계절 속으로 대책 없이 뛰어든 청춘의 이마에 맺힌 송골송골한 땀방울. 마치 오래된 청춘드라마의 한 장면을 베어 문 듯한 설렘이, 이 작은 플라스틱 기계 하나에서 몽글몽글 피어오르기 때문이다.

완구의 탈을 쓴, 황야의 오리지널 카우보이

처음 이 녀석을 손에 넣었을 때, 머릿속을 스친 이름은 당연히 토이카메라의 대명사인 로모(Lomo) 사의 '액션샘플러'였다. 문방구 장난감 코너에서나 볼 법한 완구 같은 몸체에, 전면에 조르륵 박힌 4개의 눈이 영락없이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본 검은 바디 위에는 낯설고 이질적인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제조사명은 '셀비(Selby)', 그리고 모델명은 '리볼버(Revolver)'였다. 그 이름을 가만히 읊조리는 순간, 마음속으로 무릎을 탁 쳤다. 4개의 렌즈를 나란히 배치해 두고 권총의 이름을 붙여주다니, 참 낭만적인 작명 센스다.
▲ iphone15촬영 리볼버 권총의 탄약집 처럼 보이는 4개의렌즈가 순차적으로 촬영된다.
ⓒ 이재필
렌즈 주위의 둥근 실루엣을 보고 있자니, 서부 개척 시대를 낭만으로 물들였던 콜트 권총의 회전식 탄약집이 겹쳐 보였다. 영락없는 카우보이의 무기다. 알고 보니 이 녀석은 우리가 흔히 아는 로모사의 액션샘플러보다 세상의 빛을 먼저 본 선배였다. 세상의 기묘하고 재미있는 카메라들을 수집해 자신의 이름으로 개명해 주던 로모사의 수완도 영리하지만, 역시 오리지널이 풍기는 묵직하고 외로운 멋은 흉내 낼 수 없는 법이다.

아날로그 태엽이 만들어내는 90년대판 '움짤'

이 독특한 눈을 가진 리볼버는 셔터를 누른다고 해서 4개의 눈이 동시에 번쩍 뜨이지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그저 평범하고 정직한 입체 카메라에 그쳤을 것이다. 이 녀석은 황야의 카우보이가 바람을 가르며 속사를 퍼붓듯, 아주 미세한 시간의 틈을 두고 한 프레임씩 세상을 조각내어 담아낸다. 1초를 넘지 않는 짧은 서사를 4등분 하여 필름 한 칸에 순서대로 박아 넣는 방식이다.
▲ 셀비 리볼버(Selby Revolver)촬영 플라스틱 렌즈 특유에 플레어(빛번짐)이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해준다.
ⓒ 이재필
그렇기에 흐르는 시간을 포착하기에 이보다 더 다정한 장난감은 없다. 요즘 세대의 말로 표현하자면 디지털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오직 톱니바퀴와 스프링이 맞물리는 아날로그의 기계적 리듬으로만 만들어내는 90년대판 '움짤(GIF 애니메이션)'인 셈이다.

플라스틱 조준경 너머로 청춘을 겨누다

카메라를 눈가로 가져가며 문득 웃음이 터졌다. 이 녀석의 뷰파인더는 거창한 유리 렌즈 하나 없이, 그저 상단에 툭 튀어나온 사각형 플라스틱 프레임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유리창도 없는 뻥 뚫린 네모틀 너머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 '스포츠 파인더' 방식은, 사실 다른 토이카메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소박한 구조다.

하지만 '리볼버'라는 이름 아래서 이 사각 프레임을 바라보니 묘하게 분위기가 달라진다. 마치 권총 끝에 달린 조준 가늠쇠를 슬그머니 치켜들고 목표물을 겨냥하는 듯한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전해진달까.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원가 절감의 결과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작은 사각 틀마저 철저히 카우보이 콘셉트에 절여진 것만 같아 무척 흥미롭다. 정교한 초점 대신, 오직 직감에 의지해 청춘의 한가운데로 방아쇠를 당기는 재미가 이 조준경에 담겨 있다.
▲ 셀비 리볼버(Selby Revolver)촬영 카메라는 고정하고 피사체만 이동할때 좀더 역동적인 그림이 나온다.
ⓒ 이재필
가벼운 외형만큼이나 이 녀석의 조리개는 한없이 어둡고 투박하다. 빛이 지나가는 통로가 워낙 좁은 탓에, 조금만 그늘이 지거나 흐린 날에는 어둠 속에 풍경을 숨겨버리는 심술을 부리곤 한다. 그래서 이 카메라는 구름 한 점 없이 온 세상에 햇살이 쏟아지는 눈부신 대낮에 들고나서야 비로소 제 역활을 해낸다.

강렬한 태양 아래서 요리조리 움직이는 피사체를 따라 카메라를 기울이면, 플라스틱 렌즈 특유의 서정적이고 흐릿한 번짐과 함께 세상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사랑스러운 삶의 궤적이 필름 위에 스며든다. 벌써부터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요즘 같은 쨍한 날씨야말로, 이 리볼버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사격장이 된다.

"멈추지 마!" 살아 움직이는 시간의 마법

보통 우리는 누군가의 사진을 찍어줄 때, 약속이라도 한 듯 "잠시만 그대로 멈춰봐" 하고 정지된 모습을 요청하곤 한다. 숨을 죽이고, 시선과 포즈를 고정한 채 가장 완벽하고 정돈된 찰나가 오기를 기다린다. 카메라 앞에 선 이 역시 그 암묵적인 약속에 응하듯,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멈춘 석상처럼 단정하게 굳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리볼버 카메라를 손에 쥔 순간만큼은 그 오랜 약속을 과감히 깨뜨려야만 한다.
▲ 셀비 리볼버(Selby Revolver)촬영 쨔~~잔 많이 움직일수록 좀더 재미있는 모습을 담아 볼수 있다.
ⓒ 이재필
"멈추지 마, 더 격렬하게 움직이고 더 환하게 웃어줘!"라고 외쳐야 한다. 세계 최초로 바디 내장 오토포커스를 완성하며 투명하고 정돈된 삶의 고요를 담아내던 미놀타 alpha-7000 같은 카메라가 기계적 정직함을 자랑했다면, 이 녀석은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흘러가는 찰나를 네 조각으로 부수어 박제하는 이 발칙한 장난감은, 완벽하게 정지된 순간이 아니라 '살아서 흐르는 시간' 그 자체를 온전히 사랑하라고 우리를 다정하게 부추긴다.
그 부추김에 못 이기는 척 장단을 맞추다 보면, 어느새 카메라 앞의 사람과 나는 파리의 낡은 골목길에 서 있는 톱모델과 하이패션 포토그래퍼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 "그렇지, 아주 좋아! 더 자유롭게!" 마음속 가늠쇠를 조준하고 기분 좋게 셔터를 누르면, 상대방 역시 실제 프로들의 작업처럼 신명 나게 온몸을 들썩이며 삶의 생동감을 뿜어내기 시작한다.
▲ 셀비 리볼버(Selby Revolver)촬영 아침의 대비가 강한 환경이지만 플라스틱렌즈의 특이한 묘사력
ⓒ 이재필
춤을 추듯, 혹은 여름 바람에 넘실거리는 청량한 초록 잎사귀처럼 온몸으로 1초의 궤적을 그려내는 그 장난스럽고도 진지한 몸짓들. 정확한 테두리도 없는 플라스틱 조준경 너머로 그 유쾌한 삶의 리듬을 좇다 보면, 이 엉뚱하고 콘셉트 확실한 카메라가 건네는 마법에 완전히 매료되어 그 여름날의 가장 찬란한 순간을 기어이 필름 속으로 안아 들 수밖에 없다.
▲ 셀비 리볼버(Selby Revolver)촬영 움직이는 피사체가 아니어도 사물을 패턴화 해서 표현할수 있다.
ⓒ 이재필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https://brunch.co.kr/brunchbook/mycamera4th)에도 실립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