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은 도대체 왜 이란 은행에 100억을 물어주게 됐나

박세환 2026. 5. 31.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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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 제공

2019년 6월 12일 한국은행은 이란계 은행인 멜라트은행 서울지점과의 자금조정예금 거래를 정지했다. 멜라트은행은 한은에 100억원을 맡기려 했지만 한은은 이를 받아주지 않았다. 당시에는 하루짜리 예금 거래 거절이었다. 그러나 7년 가까이 지난 뒤 이 조치는 100억원짜리 손해배상 판결로 돌아왔다.

31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3부는 지난 28일 멜라트은행 서울지점이 한국은행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한은이 멜라트은행에 손해배상금 100억원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멜라트은행은 자금조정예금 거래 정지로 1000억원대 이자 손실이 발생했다며 이 가운데 100억원을 우선 청구했다.

쟁점은 자금조정예금이었다. 자금조정예금은 금융기관이 자금 수급 과정에서 생긴 여유자금을 한국은행에 하루 단위로 맡기고 이자를 받는 제도다. 은행 입장에서는 남는 돈을 한은에 넣어둘 수 있고 한은 입장에서는 콜금리가 기준금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조절하는 통화정책 수단이다. 이용 대상은 한국은행에 지급준비금을 예치하는 금융기관이다. 만기는 1일이고 금리는 기준금리보다 0.5%포인트 낮게 정해진다.

겉으로는 평범한 은행 간 자금 운용 문제처럼 보였다. 하지만 신청자가 멜라트은행이었다는 점에서 사건은 복잡해졌다. 멜라트은행은 이란계 은행이다. 미국은 이란의 핵 개발 의혹과 탄도미사일 프로그램, 중동 내 무장세력 지원 등을 이유로 이란 금융기관을 제재해왔다. 2018년 10월에는 멜라트은행을 특별제재대상인 SDN 명단에 올렸다. 미국인이 아닌 외국 금융기관도 해당 은행과 거래할 경우 미국 금융망 접근 제한 등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2차 제재’ 대상이라는 표시도 붙였다.

한은이 멜라트은행의 예금을 거절한 배경도 여기에 있었다. 한은은 멜라트은행이 SDN으로 지정된 상태에서 거래를 계속하면 미국의 2차 제재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고 봤다. 멜라트은행이 다른 금융기관과 거래한 실적이 없다는 점도 거래 정지 사유로 들었다. 한은은 금융기관예금규정과 한국은행 예금·대출 취급세칙, 약정 조항 등을 근거로 거래 정지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 판단은 달랐다. 한은이 근거로 든 내부 규정이나 약정만으로는 멜라트은행과의 자금조정예금 거래를 정지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멜라트은행이 미국의 제재 명단에 올랐다는 사정만으로 이미 체결된 약정을 지키지 않아도 될 만큼 상황이 크게 바뀌었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판단했다. 멜라트은행이 한은에 자금조정예금 거래를 요구한 행위가 부당하거나 신의성실의 원칙에 어긋난다고도 보지 않았다.

결국 법원은 한은이 약정상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고 봤다. 멜라트은행이 2019년 6월 13일 이후 정상적으로 자금조정예금 거래를 할 수 있었다면 받을 수 있었던 이자를 손해로 인정했고 이에 따라 한은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멜라트은행이 한은에 돈을 맡기려 한 것은 한국에 정식 인가를 받은 서울지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멜라트은행은 2001년 6월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울에 지점을 냈다. 이후 한국과 이란 사이의 무역금융과 국내 체류 이란인의 본국 송금 업무를 처리해왔다.

멜라트 은행 서울지점. 뉴시스

자금조정예금도 아무 해외 은행이나 이용할 수 있는 제도가 아니다. 한국은행에 지급준비금을 예치하는 금융기관이 이용할 수 있는 제도다. 멜라트은행 서울지점은 한은과 자금조정예금 거래 약정을 맺고 실제로 예금을 예치해왔다. 이번 소송에서 이용 자격이 있는데 한은이 일방적으로 막았다고 주장한 배경이다.

멜라트은행은 해외에서도 제재 조치를 상대로 소송을 벌여왔다. 영국에서는 재무부의 2009년 금융거래 제한 조치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영국 대법원은 2013년 해당 조치가 위법하다고 판단했다. 이후 멜라트은행은 손해배상 청구까지 이어갔고 영국 정부와 2019년 합의로 분쟁을 끝냈다.

한국에서의 갈등은 20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란 핵 개발 의혹이 커지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대이란 제재를 결의했고 한국도 제재 흐름에 동참했다. 멜라트은행 서울지점의 금융거래 업무는 사실상 중단됐다. 2016년 국제사회의 대이란 제재가 일부 해제되면서 서울지점은 영업 재개를 준비했다. 하지만 미국 제재 법령 때문에 달러 거래는 여전히 제한됐다.

2018년 트럼프 행정부가 이란 핵합의에서 탈퇴하고 대이란 제재를 복원하면서 갈등은 다시 커졌다. 한국에 쌓여 있던 이란 원유 수입대금 약 60억달러는 2023년 미국과 이란의 수감자 맞교환 합의를 계기로 카타르 계좌로 이전됐다. 큰 틀의 동결자금 문제는 외교적으로 정리됐다. 하지만 제재 과정에서 발생한 개별 금융거래 손실 문제는 소송으로 남았다.

다만 멜라트은행이 모든 소송에서 이긴 것은 아니다. 앞서 우리은행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는 패소했다. 당시 멜라트은행은 우리은행을 통해 매입한 약 200억원 규모 펀드의 만기 자금을 돌려받거나 한은 또는 이란중앙은행 계좌로 옮겨달라고 요구했다. 우리은행은 멜라트은행이 SDN으로 지정되자 계좌를 동결했다. 법원은 우리은행의 손을 들어줬다. 우리은행이 요구를 이행할 경우 미국 제재로 달러 거래와 외환업무에 중대한 위험이 생길 수 있다는 논리가 받아들여졌다.

한국은행 제공

이번 한은 사건의 결론이 달라진 것은 쟁점이 달랐기 때문이다. 우리은행 사건은 시중은행이 제재 대상자의 자금을 내보내거나 다른 계좌로 옮겨줄 수 있었느냐가 핵심이었다. 반면 한은 사건은 이미 체결된 자금조정예금 거래 약정을 한은이 일방적으로 정지할 법적 근거가 있었느냐가 중심 쟁점이었다. 법원은 미국 제재 위험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위험만으로 한은의 약정상 의무 불이행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고 본 셈이다.

이번 판결의 파장은 100억원에서 끝나지 않을 수 있다. 멜라트은행은 전체 손해액 가운데 일부만 먼저 청구했다. 1심 판단이 확정되고 멜라트은행이 나머지 손해액 청구에 나서면 소송 규모는 1000억원대로 커질 수 있다. 멜라트은행은 최종 승소해 손해액 전부를 청구할 경우 1100억원 이상의 수익이 예상된다는 입장이다.

한은은 판결문을 검토한 뒤 항소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판결 내용을 내부적으로 검토 중”이라며 “항소 여부 등을 포함해 향후 대응 방향을 신중히 논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박세환 기자 foryo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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