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 소년병 잠든 세계 유일 유엔묘지…‘세계유산’ 없는 부산의 도전
전쟁 속 인류애 흔적 깃든 유산
“올해 예비평가…2030년 등재 목표”

지난 26일 부산 남구 재한유엔기념공원. 양지바른 구릉을 따라 검은 묘비 2337기가 줄지어 놓여 있다. 언덕 정상에는 영국·캐나다·노르웨이·튀르키예(터키) 등 22개 참전국 국기가 나란히 펄럭였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4월 가장 먼저 조성된 유엔군 묘역이다.
당시 이곳은 당곡리 해안의 염전과 논밭, 습지가 펼쳐진 저지대였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와 도심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당시에는 바다가 바로 앞까지 들어와 있었다. 우암부두와 우암 철도역이 가까워 전사자 수송이 용이했고,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묘역은 점차 경사지를 따라 확대됐다. 한때 1만1000구가 넘는 유해가 안장됐지만 이후 상당수가 본국으로 송환되면서 현재는 14개국 출신 참전용사 2337명이 잠들어 있다.
재한유엔기념공원은 세계에서 유일한 공식 유엔묘지다. 한국전쟁 당시 63개국이 군사·의료·물자 지원에 참여했고, 이 가운데 22개국은 병력 또는 의료진을 직접 파견했다. 묘역 한가운데 흐르는 ‘도운트 수로’는 최연소 안장자인 호주 출신 제임스 도운트 이병의 이름을 땄다. 미성년자였던 그는 형의 이름을 빌려 참전했다가 17세에 전사했다. 묘역 한편의 추모명비에는 그를 포함한 전사자·실종자 4만896명의 이름이 빼곡히 새겨져 있다.


유엔기념공원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 중인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 11개 구성유산 가운데 하나다. 경무대(임시수도대통령관저), 임시중앙청, 부산항 제1부두, 영도다리, 아미동 비석 피란주거지, 우암동 소막 피란주거지 등을 포함한 연속유산이다. 지난해 11월 국가유산청 문화유산위원회(현 국가유산위원회) 심의를 거쳐 유네스코 세계유산 우선등재목록(국내)에 선정됐다.
현재 한국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종묘·불국사·창덕궁·조선왕릉 등 17건이다. 대부분 궁궐과 사찰, 고분군 같은 전통문화유산이다. 세계유산이 한 곳도 없는 부산이 처음으로 내민 카드는 국보·보물급 문화재가 아니라 전쟁과 피란, 국제연대의 기억이다.
안영신 부산시 문화유산과 과장은 “피란수도 부산에는 전쟁 속에서도 국가 기능을 유지하고 시민과 공동체를 지켜내며 국제협력과 연대를 실천했던 경험이 녹아 있다”며 “여전히 전란의 참화가 그치지 않는 오늘날, 부산의 기억은 지역 역사를 넘어 의미심장한 세계유산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47만 항구도시, 100만 피란민 도시가 되다
한국전쟁 발발 전 부산은 인구 47만 명 규모의 항구도시였다. 서울이 함락되고 전선이 남하하면서 수많은 피란민이 몰려들었다. 인구는 순식간에 100만 명을 넘어섰다.
1950년 8월부터 1953년 8월까지 1023일 동안 임시수도였던 부산에 정부기관과 국회, 외교공관, 언론사, 국제기구가 밀집했다. 부산항에는 유엔군 병력과 구호물자가 쉴 새 없이 들어왔다. 전쟁으로 국토 대부분이 폐허가 된 상황에서 부산은 피란지를 넘어 대한민국의 심장이자 희망봉이었다.
부산 중구 대청로 일대에 들어서면 그 흔적을 지금도 확인할 수 있다.

넝쿨 무늬 외벽 장식이 고풍스러운 부산근현대역사관 별관은 한국 근현대사가 켜켜이 쌓인 공간이다. 1929년 일제강점기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로 지어졌고, 해방 뒤에는 미군정 청사, 한국전쟁기에는 미국대사관과 미국공보원으로 사용됐다. 이후 미국문화원을 거쳐 현재 역사관이 됐다. 1982년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이 일어난 장소이기도 하다.
역사관 앞 대청로를 따라가면 임시수도 정부청사(현 동아대 석당박물관), 대통령 관저였던 경무대, 부산항 제1부두 등을 만날 수 있다. 전쟁 중 국가 운영과 외교, 국제 원조의 핵심 시설들이다. 맞은편 복병산의 국립중앙관상대(구 부산측후소)는 군사작전과 항만 운영에 필수적인 기상 정보를 생산했다.
이밖에 아미동 비석마을은 일본인 공동묘지 위에 조성된 피란민 주거지의 흔적을 보여준다. 계단과 축대 곳곳에 묘비가 남아 있어 ‘비석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강동진 경성대 교수는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가 공존하는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우암동 소막마을은 원래 소 검역시설이던 공간이 주거지로 바뀐 과정을 보여준다. 유엔기념공원은 국제사회의 연대를 상징한다.
이처럼 정부 운영, 국제 원조, 피란민 정착, 교육·문화 활동, 도시 기반시설 유지 등 6개 주제가 11개 유산에 녹아 있다.
“전쟁 유산 아닌 인류애 유산”

강 교수는 피란수도 부산의 특징을 “전쟁이 직접 벌어진 곳은 아니지만 전쟁의 후유증을 끌어안았던 도시”라고 설명했다.
당시 부산에는 피란민과 전쟁고아를 지원하기 위해 수많은 국제 구호단체와 의료기관이 활동했다. 연구진에 따르면 약 230개의 국제기구가 부산에서 구호 활동을 벌였다. 세계적으로도 가장 활발한 국제 구호가 이뤄진 현장 가운데 하나였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 같은 특성은 세계유산 등재 기준 가운데 3번(문화전통·문명의 증거)과 6번(중요한 사건·사상 관련 유산)에 해당할 수 있다는 게 연구진의 설명이다. 특히 6번은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캄보디아 킬링필드가 등재될 때 적용된 기준이다.
강 교수는 “세계유산의 개념이 궁궐과 사찰, 고대 유적 중심에서 역사도시와 산업유산, 전쟁과 난민의 기억으로 확장되는 흐름이 부산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며 “11개 유산에 남아 있는 인류애와 국제연대의 흔적을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마침 올해 7월 부산에서는 세계유산위원회가 열린다. 세계유산 등재와 보존 문제를 논의하는 최고 의사결정기구가 한국에서 개최되는 것은 1988년 세계유산협약 가입 이후 처음이다. 유네스코 사무총장을 비롯해 각국 대표단과 전문가, 국제기구 관계자 등이 부산을 찾을 예정이다. 공식 행사 일정 중에 유엔기념공원 방문도 포함돼 있다.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은 올해 9월부터 1년간 예비평가를 거치게 된다. 2028년 국내 등재 신청 대상으로 선정되면 2029년 본등재 신청서를 제출하고 2030년 세계유산위원회 등재를 목표로 하고 있다. 등재된다면 한국의 근현대 유산으로선 첫 번째 세계유산이 된다.









부산=강혜란 문화선임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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