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프랑스혁명과 비교하면

김삼웅 2026. 5. 29. 15:29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횃불·촛불·응원봉, 동학농민혁명 89] 동학농민혁명의 에너지가 작동해

[김삼웅 기자]

▲ 동학혁명기록화 동학농민군과 관군연합군은 백병전이 시작되었다. 본 사진 동학혁명기록화는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중이다.
ⓒ 동학혁명기념관
인류역사에서 사회과학적인 가장 큰 변혁운동으로 프랑스혁명을 든다.

자유·평등·박애의 3가지를 내세웠다. 그때까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왕이나 황제·군주 등 최상위자를 '하늘이 낸' 인물로 떠받들고 아무리 자손이 못났어도 세습시키는 전통이 따랐다.

프랑스 국왕 루이14세가 "짐이 곧 국가다"라고 떠들만큼 왕(군주)은 곧 백성의 생사여탈권을 쥔 절대자였다. 우리나라도 더 하면 더 했지 덜하진 않았다. 그런데 1789년 프랑스혁명에서 시민들이 봉기하여 왕과 왕비를 처단하는 시민혁명이 이루어졌다.

천부인권, 즉 사람은 태어날 때 하늘로부터 양여할 수 없는 권리를 갖고 출생한다는 정신이 자각되고, 3권분립·평등·자유·인권 등 근대 민주주의 가치가 발현되었다. 그래서 프랑스대혁명이라 불리기도 한다. 프랑스혁명에서 발원한 자유는 미국·유럽의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하고, 평등은 러시아의 사회주의 국가로, 박애는 북유럽의 복지국가로 발전하는 모티브가 되었다.

동학농민혁명 이전까지 우리는 혁명이 없는 역사를 살았다. 피지배층의 저항은 반란·폭동·난동 등으로 매도되고 혹독한 탄압이 따랐다. 반정이 몇 차례 시도되었으나 내부의 권력교체수준이어서 엄격한 의미의 혁명은 아니었다. 몇 차례 역성혁명은 혁명이라기보다 창업에 속한다.

봉건왕조 시대에 혁명은 커녕 변변한 개혁도 허용되지 않았다. 기득권층에게 개혁은 곧 반역과 동의어처럼 인식되고 단죄되었다. 혁명이 있어야 하고 성공했어야 할 시기에 이루지 못함으로써 조선 왕조는 멸망하고 왜적의 식민지배에 이어 분단의 비극을 겪게 되었다.

결국 좌절되고 말았지만 전근대에서 근대의 철문을 연 동학농민혁명은 1789년 프랑스혁명과 유사점이 많은, 우리나라 근현대 최초의 혁명이었다. 유럽의 중심지 프랑스와 아시아의 변방 한반도라는 지리적 위치와, 1세기의 시차가 있었지만 상황과 추구하는 목표·가치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혁명 전 프랑스는 절대주의 부르봉 왕조에서 제1신분인 승려와 제2신분인 귀족계급 10%가 전 농토의 60%를 차지하고 제3신분인 인구의 90%가 나머지를 분작하였다. 프랑스혁명의 지적기원을 들자면 몽테스키외·볼테르·루소 같은 계몽사상가들의 역할이 있었다. 동학혁명에는 선각자 최제우·최시형·손병희·전봉준 등이 있었다. 이들의 생명존중사상, 보국안민사상, 개벽사상·평등주의는 프랑스혁명의 계몽주의사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프랑스에 루이 16세와 같은 무능한 군주와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의 사치낭비가 극심했고, 조선에는 고종과 민비의 행태가 이와 유사했다.

흔히 프랑스혁명의 주체가 제3신분인 파리의 시민들로 인식하지만, 실제는 한 해 전(1788년) 여름 때 아닌 우박으로 밀농사를 망친 농민들이 남부여대하고 파리로 몰려와 "빵을달라"며 혁명의 대열에 앞장섰다. 동학농민혁명의 주체는 동학교도와 깨어 있는 농민들이었다.

혁명의 진행과정을 살펴보면 프랑스의 경우 라파에트가 기초한 '17개조의 권리선언'을 채택하고, 동학의 경우 전봉준 등이 기초한 '폐정개혁 12개조'가 제시되었다. 프랑스의 '권리선언'은 자유·평등·박애를 내세우며 농노제·영주재판권·삼권분립 등을 제시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의 '폐정개혁안'은 노비문서 소각·토지균등 분작·청상과부 재혼 허락 등을 제시했다.
▲ 동학인물도(새 세상을 여는 사람들) 새 세상을 여는 사람들(동학인물도)는 이윤영(동학혁명기념관장) 구상, 박홍규 화백 그림이다. 사진 중앙에 최제우, 우측으로 최시형, 손병희, 박인호, 손천민, 중앙 좌측으로 손화중, 전봉준, 김덕명, 이방언, 김개남, 뒷줄 중앙에 이소사 등이다.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에서 전시중이다.
ⓒ 동학혁명기념관
프랑스혁명은 7월 14일 전제정치의 상징인 바스티유감옥을 점거하여 정치범을 석방하고, 동학농민들은 음력 1월 11일 원성의 표적이 된 고부관아를 점거하여 탐관오리들을 숙청하고 억울한 죄수들을 풀어주었다.

이후 프랑스에서는 '제헌의회'를 구성하여 한때나마 공화정을 실시하고, 조선에서는 53개 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유사이래 처음으로 농민자치를 실현하였다.

차이라면 프랑스는 혁명의 발화지가 수도 파리여서 루이 16세를 비롯 왕비 등 앙시앙레짐(구체제)의 수뇌를 처형할 수 있었는데, 동학농민혁명은 수도와는 먼 지방이어서 구체제를 숙정하기 어려웠고(조병갑은 기미를 알고 도피) 그나마 외세의 개입으로 주체세력이 제거당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프랑스혁명은 왕권신수설 등으로 전수된 수백 년의 강고한 지배권력을 피지배 민중의 힘으로 타도하고 공화정의 토대를 만들었으며, 동학농민혁명은 일시적인 좌절에도 불구하고 근대의 문을 열고 자주성과 개혁의 불씨를 남겨, 향후 민족·민주·민중운동의 동력이 되었다.

의병운동·의열운동·독립운동·4.19혁명·부마항쟁·광주민주화운동·촛불시위·12.3 윤석열의 내란반대 응원봉 시위에 이르기까지, 동학농민혁명의 에너지가 작동한 것이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