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는 ‘에너지 블랙홀’…大전력의 시대
“관세까지 우리가 낼 테니 제발 물건만 빨리 보내달라.”
요즘 미국 전력 회사들이 한국 전력기기 업체에 요구하는 말이다. 미국으로 초고압 변압기를 수출하면 관세가 20% 붙는데 그 부담을 기꺼이 떠안겠다는 의미다. 전력기기 시장이 슈퍼사이클을 맞으며 ‘갑을 관계가 바뀌었다’는 얘기까지 나오는 이유다.
인공지능(AI) 수요 폭발로 K전력 업체들이 역대급 호황을 누린다. 미국 빅테크 업체들이 AI 운영에 필수적인 데이터센터 증설에 안간힘을 쓰기 때문이다. 데이터센터는 전력이 끊기면 서버에 저장된 데이터가 삭제될 수 있어 대량의 전기가 끊임없이 공급돼야 한다. ‘전기 먹는 하마’로 불리는 만큼 초고압 변압기, 송전망을 포함한 각종 전력기기가 꼭 필요하다는 의미다.
북미 노후 전력망 교체 주기까지 맞물려 HD현대일렉트릭, 효성중공업, LS일렉트릭 등 전력기기 ‘빅3’ 업체들은 역대급 수주를 따내는 중이다. 한때 전력기기는 사양 산업 취급을 받았지만 최근 우리나라 수출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는 중이다. K전력 업체 호황 배경과 함께 수혜주 투자 전략까지 들여다본다.

AI 데이터센터 수요 몰려 일감 넘쳐나
32조원.
국내 전력기기 3사(HD현대일렉트릭, 효성중공업, LS일렉트릭)의 올 1분기 수주잔액이다. HD현대일렉트릭은 1분기에만 17억9700만달러(약 2조6500억원) 신규 수주를 따내 연간 목표치(42억2200만달러)의 43%를 한 분기 만에 달성했다. 수주잔액은 78억8800만달러(약 11조6200억원)로 사상 최대치를 경신했다. HD현대일렉트릭은 국내 전력기기 업체 중 미국 시장에 가장 먼저 진출한 초고압 변압기 강자로 손꼽힌다.
효성중공업은 1분기에만 4조1745억원 신규 수주를 기록해 수주잔액이 15조원을 넘어섰다. LS일렉트릭도 1분기 수주잔고가 5조6425억원으로 지난해 말(5조원) 대비 6000억원 넘게 늘었다.
실적도 연일 우상향 곡선을 그린다. 효성중공업의 1분기 영업이익은 1523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48.8% 증가했다. LS일렉트릭 영업이익도 같은 기간 45% 증가한 1266억원, HD현대일렉트릭 역시 18.4% 늘어난 2583억원을 올렸다.
K전력기기가 역대급 성장세를 기록한 배경으로 북미 시장 호황을 빼놓을 수 없다. 효성중공업은 지난 2월 미국 송전망 운영 업체와 765킬로볼트(㎸) 초고압 변압기 등 전력기기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계약 규모가 7800억원으로 한국 기업이 수주한 전력기기 단일 계약으로는 역대 최대 규모다. 미국 멤피스공장과 한국 창원공장에서 만든 제품을 2028년부터 2031년까지 공급한다.
효성중공업은 미국 내 765㎸ 초고압 변압기 시장의 최강자로 손꼽힌다. 지난해 미국의 한 전력 회사로부터 765㎸ 초고압 변압기와 800㎸ 초고압 차단기 등 전력기기 ‘풀 패키지’ 공급 계약을 따내는 등 미국에 설치된 765㎸ 초고압 변압기의 절반가량을 생산했다.

연일 주문이 밀려들자 전력기기 빅3 업체들은 생산능력 확대에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HD현대일렉트릭은 미국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 북미 생산법인에 2억달러(약 2900억원)를 투자해 초고압 변압기를 생산하는 2공장을 건설 중이다. 울산공장도 내년 말 완공을 목표로 증설에 속도를 낸다.
효성중공업은 북미 초고압 변압기 생산거점인 미국 멤피스공장을 2028년까지 증설해 생산능력을 50% 이상 확대할 계획이다. 이민재 NH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북미 초고압 변압기 생산 거점인 미국 멤피스공장 증설이 2028년 완료돼 효성중공업의 북미 매출 비중이 점차 늘어날 것”이라며 “효성중공업 중공업 부문 영업이익률은 지난해 17%에서 2028년 24%까지 높아질 전망”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미국 시장에서만 1조원을 넘는 매출을 올린 LS일렉트릭은 미국 텍사스주 배스트럽(Bastrop)시에 생산과 연구, 설계 등 북미 사업 지원 복합 캠퍼스 ‘LS일렉트릭 배스트럽 캠퍼스’를 준공했다. 이곳은 배전 전력기기 생산뿐 아니라 연구개발(R&D), 애프터서비스(AS) 등 주요 인력이 상주해 북미 전력 솔루션 허브로 부상했다.
LS일렉트릭 관계자는 “세계 최대 규모 북미 전력 시장 사업 성과를 앞세워 전체 매출에서 글로벌 비중 70% 달성에 속도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
전선 업체들도 전력기기 업체 못지않은 호황을 누린다.
국내 전선 업계 1위 LS전선은 올 1분기 매출 2조437억원, 영업이익 971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동기 대비 매출은 5.1%, 영업이익은 16.9% 뛰었다.
대한전선도 올 1분기 매출 1조834억원, 영업이익 604억원을 올려 매출, 영업이익 모두 분기 최고치를 기록했다. 대한전선의 1분기 말 기준 수주잔고는 3조8273억원으로 호반그룹에 편입된 2021년 말 대비 3.5배 확대됐다. 신규 초고압직류송전(HVDC) 케이블, 해저케이블 등 고부가가치 제품 개발에 힘써온 덕분이다.
가온전선은 최근 미국 빅테크 AI 데이터센터에 적용될 전력 인프라 장비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가온전선의 미국 자회사 LSCUS가 올해 약 500억원 규모의 ‘버스덕트’ 납품을 시작으로, 향후 5년간 최대 4조원 규모 제품을 공급할 예정이다. 국내 전선·전력기기 업계를 통틀어 역대 최대 공급 계약이다. 일명 ‘전력 고속도로’로 불리는 버스덕트는 대용량 전력을 보낼 때 에너지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전선 대신 사용하는 설비다.
전력기기, 전선 업체들이 호실적을 올리는 것은 미국을 중심으로 AI 데이터센터가 급증한 영향이 크다. 국제데이터센터기구(IDCA)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대형 데이터센터 전력 사용량은 67.7GW로 2024년 대비 15%가량 증가해 연일 증가세다. 데이터센터 가동에 필요한 막대한 전력을 감당하는 초고압 전력망 수요가 이들 업체 실적을 견인했다. AI 확산으로 미국 빅테크들이 자체 전력망 구축에 나서며 전력기기 수요가 급증했다.

이뿐 아니다. EU가 에너지 안보에 잠재적 위협을 초래한다는 판단 아래, 중국에서 제작된 전력기기 사용에 제동을 거는 점도 호재다. EU는 최근 자체 예산이 투입되는 에너지 사업에 중국, 러시아, 이란 등 고위험 국가에서 제작된 인버터 사용을 금지한다고 밝혔다.
인버터는 태양광 패널이나 배터리에서 생성된 직류(DC) 전기를 교류(AC)로 변환해 전력망에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태양광 패널과 풍력 발전, 배터리저장시스템(BESS) 등 다양한 친환경 시스템에 필요한 장치다. EU 집행위원회는 인버터 분야에서 전 세계 공급의 80%를 차지할 만큼 중국 지배력이 커지며, 향후 중국이 해당 기술을 잠재적 안보 위협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중국산 인버터가 퇴출되면 HD현대일렉트릭, 효성중공업, LS일렉트릭 등 국내 전력기기 업체들이 반사이익을 얻을 것이란 기대가 크다. 글로벌 전력망이 단순 가격 경쟁보다 안보, 신뢰성을 중심으로 재편돼 한국 기업들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됐다는 분석이다.
한병화 유진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한국의 전력 인프라 업체들은 중국을 제외하면 가장 강력한 제조 경쟁력을 보유했다”며 “미국, 유럽은 자체적인 제조 경쟁력이 약화돼 국내 업체들이 수혜를 입을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김경민 기자 kim.kyungmi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61호(2026.05.27~06.0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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