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시대, 존재감 결정하는 건 인간적 매력과 관계 맺기"
[노희진 기자]
"좋은 교사가 되기 전에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람은 각박해지는데 어떻게 좋은 교육이 나오겠어요."
지난 11일 성공회대학교에서 만난 고병헌 교수는 인터뷰 내내 '교육 기술'보다 '사람'을 먼저 이야기했다. 정년을 앞둔 고 교수는 교육을 입시나 경쟁의 도구로 보는 대신, 서로의 삶을 연결하고 시민의식을 길러내는 과정으로 바라봤다. 그는 "교육의 본질은 결국 선한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고 교수는 자신의 교육 철학이 은사(恩師)로부터 시작됐다고 밝혔다. 고려대학교 재직 당시 마지막 5년을 함께했던 김정환 교수는 그에게 "삶의 스승을 모시고 살아가라"고 말했다. 또 스승 사(師)자를 지우고 죽을 사(死)를 적으며 "사표(師表)는 사표(死表)"라고 설명했다. "흙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교사의 삶"이라는 뜻이었다.
당시 그는 미국과 영국에서 공부하며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었다. 주변에서는 자연스럽게 고 교수가 고려대 교수직을 이어받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스승은 그에게 다른 길을 권했다. "자네는 성공회대로 가야 해."
고 교수는 처음에는 성공회대학교조차 몰랐다고 했다. 교육학과도 없고 과목도 없다는 이야기에 황당했지만, 결국 스승의 말을 따랐다. 그리고 27대 1 경쟁률을 뚫고 성공회대 첫 교육학 교수가 됐다. 이후 그는 다른 학교에 지원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그가 교육학을 선택한 배경에는 1980년대 한국 사회를 살아오며 쌓은 경험이 있었다. 중학생 시절 독서토론을 이끌어준 교사는 훗날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해직됐다. 당시 고 교수는 그 현실에 무력감을 느꼈다. 이후 그는 민주화 운동에 뛰어든 이화여대 학생에게 영향을 받아 야학 활동을 하며, 교육이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라 사회를 바꾸는 힘이라는 사실을 체감했다고 했다.
"정치적 혁명을 하더라도 지속되려면 시민의식이 달라져야 돼요. 그게 교육이었어요. 세상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것. 독재 정권이 가장 무서워했던 것도 결국 그런 의식화 교육이었죠."
그는 대학 입학 전부터 노동야학에 참여했다. 검정고시를 위한 야학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삶을 위한 생활야학이었다. 교재도 직접 만들었다. 공장 여성 노동자들이 실제로 마주하는 단어를 모아 영어책을 만들고, 일상 속에 근로기준법 내용을 자연스럽게 녹여 넣었다.
"'푸른 하늘 아래 소풍 갔습니다' 같은 교과서는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과 너무 멀었어요. 우리는 당장 삶에서 필요한 언어를 가르치려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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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병헌 교수 자택에서 촬영한 고병헌 교수 |
| ⓒ 본인 제공 |
"좋은 교사가 되려고 자기 삶을 희생하면 결국 학생에게 집착하게 돼요. 그런데 좋은 사람이 교사가 되면 자연스럽게 좋은 교사가 되는 거예요. 좋은 부모도, 좋은 기자도 마찬가지예요."
그는 특히 생성형 AI 시대일수록 교육의 역할이 더 중요해진다고 봤다. 전문성 자체는 AI가 빠르게 대체할 수 있지만, 인간다움은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다.
"AI 시대에는 전문성만으로 존재감이 결정되지 않아요. 결국 세상이 찾는 건 인간의 매력과 관계 맺는 힘이에요."
고 교수는 한국 사회가 교육을 '학습'과 혼동하고 있다고도 말했다. 점수와 경쟁 중심의 시스템 속에서 정작 사람답게 살아가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본 경험이 없어요. 학습만 했지. 그래서 교육은 학교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평생 이어져야 하는 거예요."
그는 최근 한국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로 '어른의 부재'를 꼽았다.
"저렇게 늙어가면 되겠구나 싶은 어른이 사라졌어요. 삶의 본을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젊은 세대가 배우겠어요."
고 교수는 대안교육 운동의 초기 개념을 직접 만들고 활동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한국의 대안학교가 단순히 입시를 벗어난 학교가 아니라, 다른 삶의 방식을 실험하는 공간이어야 한다고 봤다.
2001년부터 성공회대와 덴마크 교육기관의 교류를 추진했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그는 덴마크의 시민교육과 공동체 문화에 주목했고, 대학 안팎에서 평생교육과 마을교육 실험을 이어왔다.
최근에는 은평구에서 '죽음 준비 교육' 공동체 사업도 운영 중이다. 수익을 개인 성과가 아닌 공동 배당 방식으로 나누며 새로운 공동체 모델을 실험하고 있다.
"존재만으로도 서로 힘이 되잖아요. 많이 뛰는 사람이 돈을 더 벌어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다시 질문해보자는 거예요."
또한, 그는 교육을 '즉각적인 성과'로 판단하는 사회 분위기도 비판했다.
"빵은 원료를 넣으면 바로 결과가 나오죠. 그런데 교육은 달라요. 오늘의 투입이 20년 뒤에 나타나기도 해요. 교육에는 기다림이 필요해요."
30년 넘게 강단에 섰지만 고 교수는 여전히 학생들의 눈빛에서 힘을 얻는다고 했다.
"행복은 거대한 사건이 아니에요. 소소한 설렘의 빈도수가 높아지는 거예요. 교육도 마찬가지예요. 오늘도 학생들과 에너지를 나누는 순간들이 나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어요."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그는 성공회대학교 학생들에 대한 자부심을 다시 꺼냈다.
"우리 학생들은 이미 기본값이 좋은 친구들이에요. 거기에 전문성이 얹어지면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될 거라고 믿어요. 나는 그런 학생들을 세상에 소개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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