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AI가 다 해오는데"…VC가 다시 답해야 할 질문
돈만 넣던 VC, 존재 가치 증명해야
"요즘 창업자들은 웬만한 것은 AI(인공지능)로 다 해와요. IR(투자유치활동) 자료 제작이나 PMF(제품시장적합성) 검증처럼 우리가 예전에 도와줬던 것들이요."
최근 만난 초기투자 전문 벤처캐피털(VC) 대표의 말이다. 핵심은 AI 스타트업 투자 열풍이 아니다. 스타트업들이 AI를 활용하면서 초기투자사가 해왔던 역할이 달라지고 있다는 데 있다.
통상 VC와 액셀러레이터(AC)는 스타트업의 창업 초기 단계에서 '공동 창업자'에 가까운 역할을 한다. 개발자와 디자이너를 연결해주고, 사업 방향을 잡아주고, 시장 검증과 후속 투자 유치까지 돕는다. 경험이 부족한 창업자에게 이들은 자금 제공자이자 실행 파트너였다.

하지만 생성형 AI 확산 이후 분위기가 달라졌다. 창업팀은 AI와 온라인 데이터를 활용해 시장 조사와 경쟁사 분석, PMF 검증까지 마친 뒤 투자사를 찾는다. 재무 모델과 IR 자료도 정교해졌다. 아이디어만 달랑 들고 오던 창업팀이 이제는 사업 구조를 완성형에 가깝게 정리해오는 경우가 많아졌다.
개발 방식도 바뀌었다. 과거 MVP(최소기능제품)를 만들려면 수개월과 적지 않은 인력이 필요했다. 이제는 AI 코딩 툴과 자동화 플랫폼으로 창업자 혼자서도 단기간에 서비스를 구현할 수 있다. 창업 비용이 낮아진 만큼 외부투자 필요성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VC 업계에선 "존재론적 고민"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창업팀이 AI로 PMF 검증을 빠르게 마치고 제품과 데이터를 갖춘 상태로 투자 유치에 나서면 협상 구도도 달라진다. 초기 단계임에도 높은 밸류에이션(기업가치)을 제시하는 사례가 늘고, 투자사의 부가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도 커진다.
투자사가 과거처럼 자금 우위와 정보 비대칭에 기대 존재 가치를 설명하기는 어려워졌다. 산업 네트워크, 후속 투자 연결, 해외 진출, 대기업 협업, 인재 채용 등 AI가 쉽게 대체하기 어려운 영역은 남아 있다. 하지만, 창업팀이 정교해진 만큼 투자사도 막연한 조언이 아니라 실제 성과로 이어지는 지원을 보여줘야 한다.
빠르게 문제의식을 느낀 투자사는 기존에 강조해온 운영 지원을 더 실행 중심으로 고도화하고 있다. AI를 활용해 스케일업 전략 리서치, SNS 마케팅 자동화, 고객 확보 전략까지 함께 고민하며 투자 이후 성과 창출 과정에 더 깊게 관여하는 식이다.
한 AC 대표는 "경험 많은 투자사일수록 자신이 발굴하고 키웠다는 자부심이 강해, 창업자에게 자기 생각을 일방적으로 주입하려는 경향이 있었다"며 "AI 시대일수록 그 관습을 내려놔야 한다"고 강조했다. AI는 창업의 문턱을 낮추고, 대신 VC의 문턱을 높였다. 투자사들이 '왜 우리의 투자를 받아야 하는지' 더 치열하게 답해야 하는 때다.
김대현 기자 kd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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