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에 고개 숙인 거인 바라만 봤다…무심히 강만 흐르는 곳

길에도 팔자가 있다. 직선의 신작로가 뚫리는 바람에 풀밭이 돼 버린 옛 고갯길 얘기가 아니다. 권력에 따라 흥했다가 쇠하기도 하는 국가 트레일(걷기여행길)이 있어 하는 말이다. 사연이 곡진한데, 강 따라 이어진 봄날의 길은 평화로웠다. 길을 걸으며 평화를 떠올리는 건 범상한 감상이 아니지만, 이 길에서만큼은 자연스럽다. 길 이름에 평화가 있어서다. 경기도 최북단 연천의 ‘DMZ 평화의길’을 이틀에 나눠 걸었다.
평화의 길

‘DMZ 평화의길’은 코리아둘레길을 구성하는 4개 트레일 중 하나다. 인천 강화군부터 강원도 고성군까지 휴전선 따라 한반도 허리를 가로지른다. 2024년 9월 DMZ 평화의길이 개통하면서 코리아둘레길도 완성됐다. 동해안의 해파랑길, 남해안의 남파랑길, 서해안의 서해랑길은 진즉에 열려 수만 명이 걸은 터였다. 이제 세계 유일의 영토 둘레길을 즐기기만 하면 될 일인데, 윤석열 정부는 DMZ 평화의길을 외면했다. 개통식만 열고 일절 행사를 하지 않았다. 남북 관계가 악화해서인지, 정권의 성향 때문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이재명 정부가 들어선 지 1년이 지났다. 사실상 방치했던 DMZ 평화의길에서 다음 달 12일 걷기 행사가 열린다. DMZ 평화의길이 개통한 뒤 사실상 처음 진행되는 정부 행사다. 문체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주최한다. 지난 20개월, 무엇이 바뀌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정권밖에 없다. 남북 관계는 여전히 냉랭하다. 길에서 팔자를 떠올린 까닭이다.
DMZ 평화의길 걷기 행사는 강원도 양구군의 26코스에서 열린다. 그러나 week&이 걷고 온 길은 연천 구간, 그러니까 11∼13코스와 14코스 앞 구간이다. DMZ 평화의길은 군사 지역을 수시로 드나들어 취재에 제약이 많은데, 연천 구간은 별 제한이 없다. 언제든 가서 걸으면 된다.
임진강 맑은 물

임진강의 옛 이름 중에 ‘징파강(澄波江)’이 있다. 군남면사무소 건너편 둔전나루도 옛날엔 ‘징파나루’라 불렸다. ‘맑을 징(澄)’ 자를 썼으니 ‘파도가 맑은 강’이란 뜻일 터. 임진강은 맑은 강이다. 600여 년 전 임진강이 사흘을 누렇게 흐르더니 고려가 망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연천에는 고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11코스 종점이자 12코스 시점이 고려 왕 4명의 위패를 모신 ‘숭의전’이다. 숭의전 어귀 약수터에는 고려 공민왕이 약수를 마셨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


봄이 오면 황복이 이 맑은 강물을 거슬러 올라온다. 임진강의 5월은 그 귀하다는 황복이 나오는 달이다. 중국 시인 소동파(蘇東坡)가 “죽음과 맞바꿀 만한 맛”이라고 극찬했던 생선이 바로 황복이다. 황복은 원래 비싼데, 올해는 양이 적어 더 비싸다. 연천의 한 식당에서 황복회 1㎏이 20만원이었다. 종이처럼 얇은 생선 살 한 점을 조심조심 집어 살금살금 씹었다.
봄비치곤 큰비가 내린 뒤여서 임진강 주상절리가 비경을 연출했다. 25m 높이의 절벽에서 폭포가 떨어졌다. 임진강 주상절리는 깎아지른 절벽이 2㎞가 이어지는데, 평소에는 거친 암벽을 드러낸 채 서 있다가 큰비가 내리면 평지의 빗물이 폭포처럼 추락한다. 폭포 쏟아지는 날은 강물이 흐리다. 좋은 건 본디 동시에 가질 수 없다.
강물 나눠 쓰는 사이

군남댐만 보면 강을 공유하는 게 위험해 보이지만, 강물 나눠 쓰는 사이는 사실 보통 관계가 아니다. 군사분계선이 아무리 살벌해도 강은 무심히 흐를 뿐이어서다. 임진강 강물만 군사분계선을 무시하는 게 아니다. 가마우지도, 두루미도 스스럼없이 넘나든다.

물길은 여전하지만, 철길은 끊겼다. 연천은 서울과 이북의 원산을 잇는 경원선 철도가 지나는 고장이다. 경원선의 남한 쪽 종점이 강원도 철원군의 백마고지역이다. 백마고지역 직전의 역이 연천의 신탄리역이다. 신탄리(新炭里)가 새숯막, 즉 숯 굽는 마을이란 뜻이다. DMZ 평화의길 연천 구간이 여기에서 끝난다. 서울 용산역에서 연천역까지는 전철 1호선이 다니지만, 연천역 북쪽의 4개 역은 기차가 다니지 않는다.

DMZ 평화의길 연천 구간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해도 ‘그리팅맨’이다. 그리팅맨은 13코스 바로 옆 옥녀봉(205m) 정상에 설치된 유영호 작가의 조각 작품이다. 10.8m 높이의 거인이 북한을 향해 15도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있다. 이영구(62) DMZ평화의길 지킴이는 “510㎞에 이르는 DMZ 평화의길에서 분단 상황을 예술 작품으로 표현한 대표 사례”라고 설명했다.
비 갠 오후여서 북한 산자락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가깝게 보였다. 실제로도 10리, 그러니까 약 4㎞ 거리밖에 안 된다. 북쪽에서 가마우지 한 쌍이 날아오고 있었다.
■ DMZ 평화의길 연천 구간 여행정보
「

DMZ 평화의길 연천 구간은 경기도가 조성한 평화누리길과 완전히 겹치고, 경기둘레길과는 상당 구간을 공유한다. 녹색 리본을 따라서 걸으면 DMZ 평화의길이다. 한국관광공사가 운영하는 ‘두루누비’ 앱을 켜고 걸으면 길 잃을 염려가 없다. 코스에서 벗어나면 바로 경고음이 울린다. 다음 달 12일 강원도 양구에서 열리는 걷기 행사 참가도 두루누비에서 예약할 수 있다.
」
연천=글ㆍ사진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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