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의 기도, 칼뱅의 선율… 한국교회 고백으로

2026. 5. 28. 03:11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문성모 목사의 찬송가 이야기]
<8> ‘만복의 근원 하나님’
1908년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해 발행한 ‘찬숑가’ 1장 ‘만복의 근원 하나님’ 악보. 문 목사 제공


찬송가 제1장에 자리한 ‘만복의 근원 하나님’은 한국교회 전통에서 예배 시작을 알리는 찬송이었다. 이 찬송의 가사는 영국 성공회 사제 토마스 켄(1637~1711)이 만들었다. 그는 윈체스터 대학 교목 시절에 학생들의 신앙생활을 위해 세 편의 거대한 기도시를 썼다. 그는 학생들이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깊은 밤 잠자리에 들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하나님께 봉헌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침, 저녁, 자정의 시를 각각 지었다. 이 세 편의 시는 각각 12절에서 14절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으로 전체가 36절이 넘는 거대한 신앙의 서사를 이루고 있다.

먼저 아침의 시는 잠에서 깨어난 영혼이 태양과 함께 일어나 하나님께 드리는 첫 예배를 노래한다. 오늘 하루를 내 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소중히 여기며, 내 입술의 모든 말과 양심을 정오의 햇살처럼 맑게 지켜달라는 결단이 12절 내내 이어진다.

저녁의 시는 하루 동안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목한 상태로 잠자리에 들기를 원하는 간절한 의탁을 담고 있다. 내가 잠든 사이 죽음이 찾아오더라도 두렵지 않도록 내 영혼을 주님의 날개 아래 품어달라는 고백이 흐른다. 마지막으로 자정의 시는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밤에 홀로 깨었을 때 어둠 속의 빛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노래다. 잠 못 이루는 밤의 고독을 찬양으로 승화시키며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 거룩한 합창에 참여하는 영광스러운 장면을 묘사한다.

가장 중요한 점은 이 세 갈래의 기도가 모두 하나의 종착점으로 모인다는 사실이다. 켄 주교는 1695년경 이 시들을 개정하면서, 각 시의 마지막 절에 우리가 현재 찬송가 1장으로 부르는 송영 “만복의 근원 하나님(Praise God, from whom all blessings flow)”을 공통으로 배치했다. 아침의 결단도 저녁의 회개도 자정의 고독도 결국 하나님을 향한 영광으로 귀결돼야 한다는 신앙의 원리를 구조적으로 완성한 것이다.

장 칼뱅 모습. 위키미디어 커먼즈


이 찬송의 곡조는 종교개혁자 장 칼뱅(1509~1564)의 시편가에서 왔다. 칼뱅은 1539년 스트라스부르에서 18편의 시편을 담은 첫 번째 시편가를 발행하였고, 이후 1542년 제네바에서 본격적인 시편가 제작에 착수했다. 1551년에 이르러 음악 감독 루이 부르주아(1510~1561)와 협력해 음악적 완성도를 높인 결정적 개정판인 제네바 시편가(Genevan Psalter)를 세상에 내놓았다. 이 책의 시편 134편을 위한 곡조가 이 찬송곡의 유래다. 당시 제네바의 성도들은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는 시편 134편의 가사를 오늘날 ‘만복의 근원 하나님’ 곡조에 맞춰 불렀다.

1561년 윌리엄 케스의 ‘영국 제네바 시편가’에 실린 시편 100편 악보. 문 목사 제공


칼뱅의 시편가는 영국에서 영어로 번역돼 불렸는데 1561년 윌리엄 케스(?~1594)가 번역한 ‘영국 제네바 시편가(Anglo-Genevan Psalter)’에서는 이 곡조가 시편 100편에 붙어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영어 시편가가 유행하면서 시편 곡조의 명칭(Tune Name)도 올드 헌드레드(OLD HUNDREDTH)라고 정해졌다. 즉 찬송가 ‘만복의 근원 하나님’의 곡명 올드 헌드레드는 영어 시편가에서 유래했다.

한국교회에 이 찬송이 자리 잡는 과정은 ‘God’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를 두고 벌어진 치열한 논쟁과 맞물려 있다. 1892년 감리교의 존스와 로스와일러가 출판한 ‘찬미가’에서는 ‘하느님’을 사용했고, 1894년 언더우드의 ‘찬양가’는 ‘여호와’, ‘조물쟈’(조물주) 등 다양한 명칭을 혼용했다. 1895년 북장로교의 ‘찬셩시’는 다시 ‘하느님’을 고수했다. 이처럼 교단마다 다른 명칭과 책명으로 분열된 상황은 1908년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해 발행한 ‘찬숑가’에서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통일됐다. 이는 한국교회가 한 분 하나님을 함께 고백하는 영적 대통합의 사건이었다.

오늘날 이 곡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불리는 찬송가 선율 중 하나다. 한국교회에서는 4박자로 단순화된 형태로 부르고 있지만, 본래는 2박자와 4박자가 교차하는 프랑스 통속 리듬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도 외국에서는 이 박자대로 부른다.

토마스 켄 모습. 위키미디어 커먼즈


찬송가 1장을 부르는 행위는 수백 년간 이어져 온 거룩한 신앙의 유산을 우리 입술로 확인하는 엄숙한 고백이다. 인간의 기교를 절제하고 오직 말씀만을 노래하려 했던 칼뱅의 예배 음악 정신과, 하루 24시간 전체를 송영으로 마감하려 했던 토마스 켄의 치열한 영성이 이 한 절에 녹아 있다. 특히 한국교회가 겪었던 신명(神名) 논쟁의 아픔을 딛고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통일돼 불리게 된 이 찬송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이 곡이 찬송가 1장에 배치된 것은 단순한 편집상의 선택이 아니다. 예배의 문을 여는 첫 고백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송영이어야 한다는 신앙적 선언이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 예배 정신을 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예배의 시작을 알리는 이 찬송가도 외면당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야 한다.

한국찬송가개발원장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