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대통령의 ‘선택적’ 친람

예영준 2026. 5. 28.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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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영준 논설실장

이재명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배출한 14명 가운데 기초단체장과 광역단체장을 모두 거친 최초의 대통령이다. 통틀어 11년 동안 시정과 도정을 이끌면서 갈고 닦은 경험과 현장에서 체득한 지식은 대통령으로서 대단히 소중한 덕목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이 대통령은 지난 1년간 부처별 업무 보고나 타운홀 미팅, 국무회의 생중계를 통해 현장 실무에 밝고 숫자와 디테일에 강한 면모를 각인시켜 주었다. 정당 지지율보다 높은 대통령 지지율의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경험이 풍부하고 여러 분야에 해박한 대통령이 취임하면 지근거리의 참모는 물론 말단 공무원까지 긴장하게 마련이다. 더구나 이 대통령은 요즘 말로 ‘열일’하는 것으로 소문나 있다. 대통령 참모 A는 “외부 행사 일정이 끝나고 이동할 땐 잠시 눈을 붙이게 마련인데, 대통령은 그 짧은 시간에도 이런 것 챙겼느냐, 저런 것 챙겼느냐 문자를 보낸다. 눈 붙일 틈이 없다”고 했다. 참모 B는 “심야 시간에도 대통령이 보내는 문자 알림 벨이 자주 울린다”고 했다. “놀랄 정도로 대통령이 아는 게 많다”는 감탄은 A와 B의 이구동성이다.

「 행정 경험과 지식 풍부한 대통령
리스크 동반되는 ‘만기친람’보다는
정교한 우선순위 따라 중요한 사안
빠뜨리지 않는 ‘선택적’ 친람 바람직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26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

그래서 취임 직후부터 지금까지 이 대통령에게 따라붙는 수식어가 ‘만기친람(萬機親覽)’이다. 이재명 정부 들어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대통령이 세세한 분야에까지 직접 메시지를 발신하며 어젠다를 던지고, 그것이 빛의 속도로 실행에 옮겨진다는 점이다. 새로운 어젠다의 발신 통로는 심야에 쓰는 SNS일 경우가 많다. 가끔 “여러분의 의견은 어떻습니까”라고 묻기도 한다. 그런데 ‘여러분의 의견’이 모이기도 전에 관료가 발빠르게 움직여서 정책이 입안되고 실행되는 게 상례다. 기억하는 한 대통령이 던진 의제가 아직 실행되지 않은 건 설탕세(부담금) 도입 정도인데, 최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 검토가 하나 추가됐다.

대통령이 어젠다를 제시하는 것은 본연의 업무에 속한다. 다만 그 어젠다가 충분한 검토와 논의를 거쳐 제시된 것이냐의 여부가 문제다. 개중에는 참모들과의 논의를 통해 정책 방향이 정해진 단계에서 대통령이 먼저 공개 언급한 것도 있을 것이다.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유예 종료나 장기보유특별공제(장특공) 축소 논의 등 부동산 정책이 그랬던 것 같다. 반대로 대통령이 먼저 던져 놓은 과제를 실행 부처가 서둘러 따라간 사례도 적지 않아 보인다. 스타벅스 소동의 와중에 대통령이 던진 ‘일베 폐지론’도 조만간 담당 부처가 정책의 옷을 입혀 발표할 것이다. 정책이란 예상치 못한 결과와 맞닥뜨릴 가능성이 상존하는 법인데, 사전 검토가 충분치 않은 것일수록 그럴 확률이 더 높아진다. 이 대통령이 백해룡 경정을 콕 집어 수사팀에 투입하라고 지시했다가 전원 무혐의로 결론나 머쓱해진 마약수사 외압 의혹 사건이 대표적이다. 전후 사정을 아는 경찰로부터 사전 보고를 받고 논의했더라면 그런 지시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대통령이 항상 옳을 수는 없다는 점에 있다. 국무회의 중계엔 디테일과 숫자까지 제시하는 대통령에게 장차관이나 참모들이 쩔쩔매는 장면이 나오곤 한다. 국민들에게는 속시원히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대통령 앞이라 정면 반박을 자제한 것일 뿐 대통령의 발언이 다 옳은 것은 아니다. 지난주 “유럽 거의 대부분의 국가가 자국 내로 들어오면 네타냐후 총리를 체포하겠다고 발표하지 않았느냐”고 한 이 대통령의 발언과 달리, 유럽 주요국의 대다수는 국제형사재판소(ICC)에 가입조차 하지 않았고, 체포한다는 발표를 한 나라는 오히려 소수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20일 청와대에서 열린 제22회 국무회의 겸 제9차 비상경제점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만기친람형의 대통령에게는 ‘일 잘하는 대통령’이란 찬사도 나오지만 리스크도 동반된다. 세세한 분야에까지 구체적인 지시를 내렸다가 결과가 잘못되면 대통령의 책임이 된다. 더구나 대한민국은 말 그대로 일일만기(一日萬機), 하루에 만 가지 문제와 사건과 논란이 생겨난다. 성인군자가 2026년 대한민국에 환생해 온다 해도 두 손 들 판이고, ‘테스형’이 와도 “세상이 왜 이래”라 되물으며 발길을 돌리지 않을까 싶다. 요컨대 ‘만기친람형’ 지도자는 있을 수 있지만 실제로 만기친람을 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그래서도 안 된다.

예나 지금이나 전 세계 대부분의 지도자가 행하는 것은 ‘선택적’ 친람이다. 선택적 친람에도 조건이 붙는다. 대통령은 ‘모두의 대통령’이어야 하기에 한쪽 진영의 편에 치우쳐선 안 된다는 원칙 아래 어젠다의 우선순위를 정교하고 치밀하게 짜야 한다. 또한 충분한 숙의를 거쳐 최대한 정제된 언어로 메시지를 발신하고, 메시지가 남발돼서는 안 된다. 대통령의 직접 지시가 많으면 공무원들은 대통령이 말한 일만 처리하기에도 빠듯할 것이다. 대통령이 말하지 않은 것은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정작 중요한 문제가 어젠다에서 사라진다. 더 중요한 문제를 대통령이 말하지 않아, 덜 중요하지만 대통령이 말한 문제에 밀리는 것, 그게 가장 큰 리스크다.

예영준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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