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와줘"라는 말을 평생 해본 적 없는 사람들
[이 장면 이후 우리 사회는] 영화, 방송, 책등 작품 속 한 장면을 통해, 오늘의 사회적 장면과 감정의 흐름을 살펴봅니다. <기자말>
[안상우 기자]
"어차피 다 사라지는데. 근데 왜 우리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는 걸까?"
황동만(구교환)이 이 말을 중얼거리는 장면이 있다. 날씨가 사라진 미래를 배경으로 한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 20년째 영화감독 데뷔를 준비 중인 사람. 그가 이 질문을 꺼내는 건 절망해서가 아니다. 이 질문을 너무 오래 안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JTBC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는 그 질문의 해답보다, 그 질문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의 상태를 붙든다. 이 드라마는 감정마저 데이터처럼 기록되는 시대를 배경으로, "쓸모 있는 인간"이 되지 못한 사람들의 불안과 생존을 따라가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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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하이라이트 |
| ⓒ JTBC |
황동만 본인도 마찬가지다. 친구들 앞에서 죽어라 떠들고, 눈물 찔끔 나게 낄낄대는데 감정 워치에는 "불안"이 뜬다. 그는 그 불안을 이기려고 더 떠든다. 그런데 더 떠들수록 더 불안해진다. 자신이 그렇게 불안한 인간인 줄도 몰랐다고 말한다.
드라마는 그 떠듦을 단순한 민폐나 허세로 보지 않는다. 끝내 뒤처졌다는 감각을 들키지 않으려는 몸부림에 가깝게 바라본다. 아무 일 없는 척 농담하고, 괜찮은 척 떠들지만 사실은 계속 자기 존재를 확인받고 싶은 상태. 황동만의 껄쩍지근함은 어쩌면 오래 불안했던 사람이 살아남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아직"이라는 말을 달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에서 "아직 안 된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건 단순히 경제적 문제만이 아니다. 오래 버틴 사람은 점점 존중받지 못한다. 버티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무능처럼 취급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말수를 줄인다. "요즘 뭐 하냐"라는 질문 하나에도 표정이 굳는다. 설명할 수 없는 시간들이 길어질수록 사람은 자기 존재 자체가 민폐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 존재의 유효기간을 확인하려 든다. 지금 나는 필요한 사람인가. 아직 쓸모 있는 인간인가. 최근 삼성전자 성과급 논란 역시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불안이 집단적으로 드러난 장면에 가까웠다. 성과와 보상이 숫자로 환산되는 조직 안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를 확인받고 싶어 한다. 문제는 그 평가가 흔들리는 순간, 사람 역시 쉽게 교체 가능한 존재처럼 느껴진다는 데 있다.
황동만이 정 말할 상대가 없으면 옥상에 올라가 자기 이름이라도 크게 부른다고 했을 때, 그것은 거창한 존재 선언이 아니다. 내 목소리가 닿는 데까지는 아직 내가 사라진 건 아니라는 최소한의 확인. 아우성이 되지 못한 존재들이 겨우 찾아낸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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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하이라이트 |
| ⓒ JTBC |
아홉 살 때부터였다. 부모가 떠난 날에도 그는 혼자 학교에 갔다.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잠들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버려진 게 들통나면 안 되니까. 그 감각은 어른이 된 후에도 반복된다. 남자친구가 떠날 때, 회사에서 입지가 흔들릴 때, 버려질 것 같은 상황이 오면 몸이 먼저 무너진다. 온몸이 찢어질 듯 아프다가 어느 순간 코피가 난다.
이름 붙지 않은 감정을 가진 사람은 변은아만이 아니다.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닌데 계속 무너지는 사람들. 우울이라고 단정하기엔 설명되지 않고, 괜찮다고 넘기기엔 몸이 버티지 못하는 상태. 문제는 아픈 것보다, 그걸 설명할 언어가 없다는 데 있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는 청년 고립과 관계 단절 문제가 반복해서 이야기된다. 취업 실패와 장기 구직 상태가 은둔으로 이어지고, 혼자 버티다 관계가 끊어진 채 발견되는 청년들의 이야기는 더 이상 낯선 뉴스가 아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사람들은 왜 그렇게까지 무너졌는지 정확히 설명하지 못한다. 분명 힘들었는데도 "이 정도는 다 견디고 산다"라며 오래 버티다 어느 순간 끊어지듯 무너지는 경우들. 감정을 표현할 언어를 잃어버린 사회에서는 고통조차 자꾸 개인의 문제처럼 숨어든다.
변은아는 말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존재하지도 않는 것 같은데 어떻게 조용히 있어?" 하지만 정작 말할 언어는 없다. 감정 워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있어도 "알 수 없음"으로만 뜨는 감정. 이 드라마는 바로 그 지점을 붙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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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하이라이트 |
| ⓒ JTBC |
이기리(배명진)는 비웃는다. "못나면 인간적이야? 잘나면 인간적이지 않고? 황동만이 인간적이래? 나는 비인간적일래."
이들이 말하는 "파워"는 단순한 카리스마가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밀리지 않고, 살아남고, 끝내 인정받는 힘이다. 반대로 "인간적"이라는 말은 자꾸 흔들리고 상처받고 실패하는 사람에게 붙는 패배의 언어처럼 취급된다.
이 장면은 묘하게 오래 남는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는 오래전부터 인간보다 쓸모를 먼저 평가해 왔기 때문이다. 얼마나 쓸모 있는가, 얼마나 인정받는가, 얼마나 끝까지 살아남는가. 사람들은 "좋은 사람"보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를 먼저 강요받는다.
문제는 그 기준에서 밀려난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이다. 사람들은 실패 자체보다, 끝내 뒤처진 채 남아 있는 존재를 더 불편해한다.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과 열등감, 어정쩡한 패배의 흔적을 오래 바라보는 일을 견디지 못한다. 누군가를 이해하기보다 "불쾌한 존재"로 낙인찍고 함께 비웃는 방식.
박경세가 말한 "국민을 열받게 하는 인간을 처리하는 사회"는 그래서 단순한 SF적 상상이라기보다, 이미 우리가 익숙하게 서로를 대하는 방식처럼 보인다.
그래서 황동만은 특히 더 불편한 존재다. 그는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실패한 채 끝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 8인회 사람들은 한때 모두 황동만과 비슷했다. 똑같이 불안했고, 똑같이 아무것도 아니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하나둘 데뷔하고 자리를 잡으면서 그들은 그 시간을 지나간 과거로 정리했다.
그런데 황동만은 아직 그 자리에 남아 있다. 성공한 사람들에게 그는 지워버린 과거가 계속 눈앞에 서 있는 것 같은 존재다. 그래서 그를 볼 때마다 불쾌해진다. 그 감정은 단순한 혐오라기보다, 오래 외면해 온 자기 자신의 흔적과 마주하는 불편함에 가깝다.
최동현(최원영)은 황동만에게 말한다. "남 잘 되는 거 배 아파하지 말고 이제 좀 건설적으로 생산적으로 살자, 응?" 그러자 황동만이 되묻는다. "내 인생이 왜 네 마음에 들어야 되는데요?"
이 짧은 문장은 이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는 반문처럼 들린다. 생산성과 결과로 인간의 가치를 서열화하는 사회 안에서, 아무 성과도 증명하지 못한 사람이 던지는 질문. 내 인생이 왜 누군가의 기준에 합격해야만 의미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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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하이라이트 |
| ⓒ JTBC |
같은 고통이었지만, 누군가는 자기 자신을 파괴하고 싶은 감각으로 버텼고, 누군가는 평생 하지 못한 구조 요청으로 그 감정을 설명한다. 드라마는 그 순간 처음으로 "알 수 없음"이었던 감정에 언어가 생기는 장면을 보여준다.
"모든 스토리는 '나는 존재한다'는 아우성." 황진만(박해준)은 말했다. 그런데 황동만이 끝내 찾아낸 말은 거대한 아우성이 아니었다. 아주 작은 구조 신호였다.
도와줘. 태어나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말. 드라마는 그 순간을 통해 묻는다.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랫동안 "도와줘"라는 말을 하지 못했을까.
한국 사회는 유난히 혼자 버티는 것을 미덕처럼 여긴다. 힘든 티를 내지 않는 사람, 민폐 끼치지 않는 사람, 스스로 해결하는 사람이 성숙한 인간처럼 취급된다. 도움을 요청하는 순간 약한 사람이 되고, 무너졌다고 말하는 순간 탈락한 사람처럼 취급되는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자기 고통을 숨기는 데 익숙해졌다.
그 결과는 점점 더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관계는 끊어지고, 혼자 사는 사람은 늘어나는데 정작 누구에게도 자기 상태를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 고독사, 관계 단절, 반복되는 자살 뉴스는 이제 낯선 사건이 아니다. 위험한 것은 단지 가난이나 실패만이 아니다. 아무에게도 "도와줘"라고 말하지 못한 채 오래 버티는 상태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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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하이라이트 |
| ⓒ JTBC |
황동만의 돌파는 "나는 괴물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고, 변은아의 돌파는 "나는 버려진 존재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처음 들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돌파는 혼자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로의 고통 안에서 서로의 언어를 발견했다. "자폭"을 "도와줘"로 번역해 주는 사람. 설명되지 않는 감정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들어주는 사람.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는 무가치함을 극복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무가치함의 끝까지 함께 내려가 본 사람들이 서로에게 어떤 말을 건넬 수 있는지 보여주는 드라마다.
아우성이 되지 못한 존재들은 대개 시끄럽고, 이상하고, 껄쩍지근하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그들을 지운다. 그 순간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때, 어떤 존재는 겨우 계속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네이버블로그 https://blog.naver.com/ezmind921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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