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희의 그래도] 의심은 믿음 향한 정직한 과정… 확신 위한 기회로 삼길

이명희 2026. 5. 27. 0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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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을 때
게티이미지뱅크


탈기독교 시대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미지의 동방국인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인천 제물포항에 내린 지 올해로 141년이다. 그사이 우리나라는 선교사를 많이 파견하는 나라가 됐지만 안으로 눈을 돌려보면 1000만 기독교인 수가 허물어진 지 오래다. 유럽의 교회나 성당은 술집이나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심지어 노르웨이에서는 목회자가 공무원 신분으로, 정부에서 급여를 받고 있다고 한다. 아이 출생 시 축복기도와 결혼식 주례, 장례식 집도 외에는 목회자가 평소 할 일이 없어서라고 한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던 2000년 전 예수 그리스도가 보시면 한탄할 일이다.

하나님 존재에 대한 의심

비기독교인이 늘어나는 이유로 물질주의 확산과 급속한 과학기술 발달을 꼽기도 한다. 그러나 과학을 탐구하는 과학자들이 가설이나 학문의 한계를 깨닫고 신을 인정하는 것을 보면 과학이 신앙과 배치된다고 볼 수도 없다. 오히려 세상의 환락과 즐거움을 좇다 보니 하나님 없는 세상이 편하고 하나님께로 온전히 마음이 가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

‘하나님을 아는 기쁨’의 저자 마틴 로이드 존스는 “하나님을 안 믿는 것에 대해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영리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 그것이 ‘현대적이며, 새로운 것,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볼 때 참으로 측은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시 14:1) 로이드 존스는 다윗왕이 이 시편을 기록했을 당시 사람들 역시 그와 똑같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고 했다. 예수님이 오시기 1000년 전,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 전 그때 당시 사람들도 하나님이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찰스 다윈이 1859년 진화론을 처음으로 주장한 ‘종의 기원’을 출간했을 때도, 하나님의 존재는 그런 지식과 전혀 무관하다는 것이 명백하다고 강조한다. 진화론도 아무것도 증명되지 않았고 학술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로이드 존스는 “현대의 불신앙이 지식과 배움과 이해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의견을 분석한다면 그 의견은 하나도 논리적이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믿는 이유를 설명한다. 구약(창 3:15)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예수의 탄생과 생애, 죽음과 부활 사건들이 일어나기 800년 전에 예고되고 예언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에 따르면 오직 한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시작부터 종말을 보며 영원한 의지와 지혜의 섭리로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다. 세계와 성경의 역사, 모든 역사를 조정하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기독교 교회 그 자체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현재까지 존재하는 교회의 지속성을 어떻게 설명할까. 어떻게 버려진 종파가 3세기 후 로마제국의 국교가 됐을까. 종교개혁 그리고 수많은 부흥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이에 대한 답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삶을 바로잡을 용기’의 저자 존 오트버그는 “내 두려움은 하나님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심으로 나를 몰아간다. 죽고 보니, 내세는 없고 원자(atoms)와 쿼크(quarks)와 끈(strings)이 우리 존재의 전부라면 어떨까”라고 반문한다. 그래도 그는 자기 의지로 의심을 몰아내려 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충고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바로 알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라고 권한다.

회의주의자였던 쉘던 배너컨은 ‘잔인한 자비’에서 “기독교를 뒷받침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의 기쁨, 확신, 온전함이 그 증거들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가장 강력한 반대 증거도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이 우울하고 기쁨이 없을 때, 자기 의와 독선에 빠져 제멋대로 자신을 신성시할 때, 편협하고 억압적일 때, 기독교는 실패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선한 의지에 대한 의심

“태양이 비치지 않는 순간에도 나는 태양의 존재를 믿는다. 혼자일 때도 나는 사랑의 존재를 믿는다.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도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 1945년 독일 쾰른의 지하실 벽에서 발견된 낙서다. 유대인들이 게슈타포를 피해 숨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에서 발견된 이 메모는 삶과 죽음의 기로에 놓인 극한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믿음을 보여준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당할 때,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채 피지도 않은 순진무구한 아이들이 재난의 희생양이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의지를 의심한다. 신은 존재하는가 하는 근본적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3살이 지나 선천성 조로증으로 판명받고 14살 나이에 생을 마감한 애런 쿠쉬너. 애런의 아버지인 해럴드 쿠쉬너는 “나는 애런의 삶과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을 때보다 훨씬 더 섬세한 사람이 되었고, 훨씬 더 영향력 있는 목회자가 되었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더 잘 헤아릴 줄 아는 상담자가 되었다. 15년 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래서 그저 밝고 행복한 한 소년의 아빠가 될 수만 있다면 나는 예전처럼 평범한 랍비로 살아가고 싶다. 하지만 나에겐 선택권이 없다.”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에서 쿠쉬너는 하나님의 사랑과 전지전능함 사이에서 갈등하게 될 때 하나님은 받아들이되 그분의 전지전능함에 대한 기대는 내려놓아야 하고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켜주실 것이라는 기대는 접으라고 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키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그렇게 하실 수 없는 많은 여건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국인 랍비 리브 로버트 브레너 박사는 홀로코스트 생존자 가운데 수백 명을 대상으로 그들의 경험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조사했다. 생존자 절반가량이 홀로코스트의 참혹함이 그들의 종교적 신념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11%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잃었다고 대답했다. 그들 또한 하나님께 분노를 느낄 만큼 그분을 완전히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신한다고 답한 것은 하나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다분히 감정적인 요소였다.

가장 놀라운 것은 홀로코스트 생존자 가운데 5%가 죽음을 연구하는 나치 실험실에서 무신론을 버리고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5년 동안 포로수용소 생활을 통해 신앙을 얻게 된 사람은 17만7000명, 최근 70년간 한 종족집단에서 가장 기록적인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 1:5)

성경 속 하나님에 대한 의심

성경에도 인간의 연약함과 고뇌를 드러내는 사례들이 많이 나온다. 심지어 하나님과 직접 소통했던 선지자들조차 고난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부재나 침묵을 의심하며 괴로워했던 순간들이 기록돼 있다.

욥은 모든 재산과 자녀를 잃고 육체의 질병까지 얻자 하나님의 정의에 깊은 의문을 품는다. ‘왜 악인은 잘살고 의로운 나는 고통 받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보다 하나님이 정말 공의로운 분인가,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니냐는 회의를 품는다.

갈멜산에서 대승을 거둔 엘리야는 위대한 선지자였지만 이세벨 왕비의 살해 위협 앞에 무너졌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왕상 19:4) 하나님이 더 이상 자신을 도울 수 없거나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했다고 느끼며 무력감에 빠졌다.

시편에는 하나님의 침묵에 항변하는 탄식 시가 많이 나온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 22:1)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의문을 드러낸다.

예수의 제자 중 한 명인 도마는 예수의 부활 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 20:25)

전도서의 저자인 솔로몬도 모든 부귀영화와 지혜를 가졌지만 세상의 부조리를 보며 회의에 빠진다.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 1:14)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의심의 순간들을 ‘불신앙’으로 치부해 숨기기보다 오히려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정직한 과정으로 묘사한다. 의심은 더 깊은 확신으로 가는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이명희 논설위원·종교전문기자 mhee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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