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손 잡아주는 의사
극작가

돌보던 팔레스타인 의사가
구금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며칠 전 3년 차 검진을 받기 위해 병원에 갔다. 이번에도 피를 뽑고 엑스레이를 찍고 주삿바늘이 꽂힌 채 자기공명영상(MRI) 기계 안에 엎드렸다. 검사 결과가 나오면 주치의 선생님을 뵈러 갈 것이다. 그사이 나는 여름옷이 보관된 서랍을 열어 옷 한 벌을 찾는다. ‘Wish Me Luck’(행운을 빌어줘)이라는 문구가 적힌 보라색 티셔츠다.
건강검진을 받다가 암을 발견했다. 초기여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날 병원에서 보고 들은 것이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머릿속이 하얘진다’는 말을 체감한 순간이었다. 요양병원에서 함께 투병했던 언니들의 메신저 프로필이 하나둘 이방인의 것으로 바뀔 때마다 죽음이 목전에 와 있음을 느꼈다. 구호단체에서 일했던 만큼 어느 정도 죽음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내 앞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나서야 타인의 죽음에 실린 무게가 느껴졌다.
치료가 끝난 뒤 나는 전과 다르게 살기로 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앞뒤 재지 않고 그냥 하리라 마음먹었다. 내친김에 출판사부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저자 대신 번역자인 내가 북토크를 이끌었다. 덕분에 전국 작은 서점의 독자들과 소중한 인연을 맺게 되었다. 책을 통한 치유의 여정이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쓰지 못하고 있던 소설을 다시 꺼냈다. 비겁하게 숨을 시간이 더는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화문에서 검도 수련도 재개했다. 과거에는 상대를 이기려는 마음, 더 빠르게 공격하려는 마음으로 임했다면 지금은 승패와 상관없이 물러서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검을 쥔다. 나는 좋은 의료진의 도움을 받았다. 주치의 선생님은 수술대에 눕기 직전 떨리는 내 손을 잡아주셨고, 병원장 업무로 바쁘신데도 불구하고 환자들이 잘못된 정보에 휘둘리지 않도록 온라인 게시판을 통해 사소한 질문에도 답해주셨다(내 질문은 ‘검도를 다시 해도 되나요’였다).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인형을 안고 잠들었는데 뒤척이다 보면 바닥에 내팽개치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인형을 품 안에 넣고 이불을 덮어주신 건 간호사 선생님들이었다.
암과 싸우는 사이 우크라이나와 이란에서 전쟁이 발발했고, 팔레스타인에서는 집단학살이 일어났다. 그곳 의료진과 환자들이 처한 상황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 항암제 투여는 바랄 수 없는 사치가 되었고, 가자지구에서는 팔다리를 잃은 아이들 수술에 쓸 마취제도 동났다고 했다. 그러던 중 가자 북부 카말 아드완 병원 의사 후삼 아부 사피야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병원장이자 소아과 의사인 그는 아픈 아이들을 두고 떠날 수 없어 끝까지 병동을 지키다가 이스라엘군에 체포되었다. 2주 전 뉴욕타임스는 팔레스타인인들을 구금하는 시설에서 자행되는 조직적인 고문에 관한 칼럼을 실은 바 있다. 이스라엘군이 성고문을 일삼는가 하면 맹견을 풀어 수감자를 공격한다는 증언이 이어졌다. 사피야 박사가 갇힌 곳도 예외가 아니다. 그의 사진을 보고 있으면 주치의 선생님 얼굴이 떠오른다. 그도 어린 환자들의 손을 잡아주는 의사였을 것이다. 전쟁터에서 환자를 돌보던 의사가 맹견에게 공격당해 피 흘려야 하는 이유를 나는 정말 알 수가 없다.
코너 제목이 ‘情談’인데 이번에도 살벌한 전쟁 이야기로 끝맺어 유감이다. 병을 앓고 나서 다르게 살기로, 어떤 글이든 마지막 기회라 여기고 집필하기로 마음먹었으니 어쩔 수가 없다. 사피야 박사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와 함께 환자를 돌보던 외국 의사들이 촌각을 다투어 국제사회에 도움을 청하고 있다. 일주일 후 나는 ‘행운을 빌어 달라’고 적힌 옷을 입고 검진 결과를 확인하러 갈 것이다. 내게 필요한 건 한 줌 운일지 모르나 투옥된 가자지구 의료진은 아닐 것이다. 석방을 촉구하는 목소리에 작게나마 힘을 보태려 한다. 전쟁터에서 인큐베이터를 떠나지 않은 게 죄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이수민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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