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년 고목들의 초상화… 생로병사가 그 안에 있다
이종구, 8년 만의 개인전 ‘사유’
쌀 부대에 농민 그리던 민중미술가
칠십 넘어 ‘나무 연작’ 선보여

원로 소설가 황석영은 신작 장편 ‘할매’(창비)에서 금강 하구 군산에 뿌리내려 이 땅과 연을 맺은 팽나무 '할매'의 600년을 통해 한반도의 역사를 톺아본다. 소설 속 팽나무가 연상되는 시각적 이미지를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 학고재갤러리에서 하는 민중미술 작가 이종구(72) 개인전 ‘사유’에서다. 전시장 한 벽에 은행나무 고목을 그린 대형 그림 3점이 걸려 있다. 이른 봄, 봄의 절정기, 그리고 한여름 등 계절을 달리해 그린 나무의 초상화처럼 감정 이입이 된다.
개막일인 지난 20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코로나로 사회 전체가 격리된 생활을 겪은 데 이어 개인적으로도 위암 수술 후유증으로 장을 일부 잘라내는 큰 수술을 했다”면서 “사회적 리얼리즘에 이어 이제는 나를 위한 리얼리즘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작가는 충남 서산시 대산읍 오지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중앙대 예술대학 회화과를 나온 뒤 그가 포착한 대상은 오지리 농부들이다. 캔버스가 아니라 쌀을 담는 누런 종이 부대에 그려 사실감을 극대화시킨 리얼리즘 회화로 1980년대 민중미술 흐름에 동참했다. 쪼그려 앉은 농부들 뒤로 대통령선거 포스터가 붙은 담벼락이 묘사돼 있는 등 시대적 초상을 사진보다 더 정교하게 그렸다. 이런 그림을 모아 1992년 학고재갤러리에서 ‘땅의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했다. 2018년에는 ‘광장-봄이 오다’라는 제목으로 세월호 사건, 남북정상회담 등을 소재로 한 작품을 대거 선보였다.
이처럼 시대를 달리해 사회적 초상을 그렸던 그가 8년 만에 하는 개인전에서 선보인 작품 소재가 수령 1000년이 넘는 고목이라는 점은 놀랍다. 고목을 통해 어느새 칠십이 넘은 그가 온몸으로 실감하는 문제이자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문제인 생로병사를 다루고 싶었던 것이다.

나무 연작이 걸린 반대 벽면에는 수술로 살이 빠진 환자복 차림의 자화상과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스마트폰을 손에 쥐던 양복 입은 자화상을 병치했다. 생로병사에 천착하게 된 사정을 유추할 수 있다. 수술 이후 작가는 10년 전 우연히 보고 감동했던 충남 부여 내산면의 은행나무를 일부러 다시 찾아갔다. “처음 봤을 때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어요. 백제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나무라고 생각하니….”
나무 연작 중 첫 번째와 두 번째가 부여 내산면 은행나무다. 가지가 안 보일 만큼 잎이 무성한 한여름의 세 번째 나무는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부여 내산면 나무는 수술을 받은 작가처럼 썩어서 죽은 가지를 쳐내 내부가 성근 게 육안으로도 구별이 된다. 병을 이겨낸 굵은 가지 위로 솟은 새 잎은 가까이 가보면 무수한 작은 점들로 이뤄져 있다. “이들 고목이야말로 역사의 증인입니다. 태어나서 죽고 새롭게 태어나고 죽으며 그 나무와 함께 살아온 사람들, 생로병사를 나무껍질, 줄기, 잎에 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름드리나무 아래에는 지금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젊은 사람들은 다 떠나고 마을을 지키는 건 노인들뿐인’ 농촌 현실을 담듯 유모차 할머니, 휠체어 할머니, 막걸리 한잔하는 할아버지, 그리고 관광 온 아주머니들이 있다. 작가는 거기에 미래를 끌어갈 생명의 상징처럼 자신의 손자를 의도적으로 그려 넣기도 했다.
나무 연작은 마지막 하나를 더 그려야 완성이 된다. 그는 가을 나무는 “너무 화려해서” 그리지 않겠다고 했다. 대신 겨울 나무의 초상화가 될 주인공은 황석영이 소설화한 그 할매 팽나무다. 그동안 두 번 답사를 다녀왔다는 군산 할매 팽나무가 어떤 모습으로 태어날지 기대된다. 6월 20일까지.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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