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부잣집 도련님은 공사장 일용직을 고집했을까
[김상목 기자]
16살 소년 '엔조'는 뜨거운 햇볕 아래 공사 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잡일을 맡는다. 아직 일이 익숙하지 못해 현장 감독에게 곧잘 핀잔을 듣고 다투기도 하지만, 부모님이 정해놓은 삶이 내키지 않는 그에겐 차라리 나은 삶처럼 보인다. 공사장 동료들은 넉넉한 집 자식인 엔조가 왜 이 일을 고집하는지 의문을 품지만, 조금씩 그를 동료로 받아들인다.
티격태격한 나날을 보내면서도 소년은 자격증을 획득해 자기만의 삶을 개척하고 싶다. 하지만 아직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본인도 알지 못하는 상태. 현장 일과 직업교육에 그런대로 적응할 즈음, 자신을 돌봐주는 현장 동료이자 이방인 청년 '블라드'에게 의지하며 엔조는 조금씩 묘한 설렘을 느낀다. 소년에게 16살의 여름은 어떻게 기억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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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엔조> 스틸 |
|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
물론 겉으로 봐선 엔조의 반항심은 투정에 불과해 보일지 모른다. 부모님 모두 말썽꾸러기 막내를 사랑하며 염려하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모든 면에서 비교되는 모범생인 형도 딱히 동생을 차별하거나 구박하는 기색은 없다. 그저 다들 엔조가 사서 고생하지 말고 적당한 진로를 찾기만 기대할 뿐이다. 대안학교에 진학하거나 소질이 있던 미술로 예술학교 문을 두드리길 원하는 건 과도한 요구는 아닌 듯하다.
하지만 그런 기대와 바람은 엔조에겐 단지 부모가 짜놓은 궤도를 쳇바퀴 돌라는 것으로만 여겨질 뿐이다. 넉넉하고 안정된 삶의 소중함보다는, 그 틀에 맞춰야 한다는 숨막힘이 더 무겁게 다가오는 16살이다. 그래서 일단 무조건 어른들의 말과 정반대로 엇나가고 본다. 보고 있자면 답답하지만, 누구나 그런 시기가 있는 법이다. 다만 특별히 문제가 없는 주변 조건에도 불구하고 자기파괴로 질주하는 주인공이 염려스러울 따름.
정작 청개구리 심산으로 아빠의 제안이라면 일단 뻗대고 보는 것과 달리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엔조가 구상하는 청사진은 뾰족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반항심이 그의 행적을 규정한다. 그런 모습을 보니 가족은 더 불안하고, 그러다 보니 여유를 두고 아들을 관망하지 못한다. 자꾸 간섭과 참견이 이어지니 더 삐뚜러진다. 둘 다 의도와 다르게 상황을 악화 일로로 몰아간다. 10대 시절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짓다가도 조금씩 불안한 건 관객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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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엔조> 스틸 |
|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
자신이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주변 '형님'들은 자신들과 배경이 천양지차 다른 엔조가 잠깐 투정을 부리며 '배부른 소리'로만 여긴다. 그들은 그냥 인생 경험 좀 쌓다가 부잣집 도련님이 무탈하게 떠나리라 믿는다. 하지만 정작 막내는 그럴 생각이 없다. 그런 가운데 우크라이나 출신 '형님'들과 엔조는 단짝이 된다. 고향 떠나 유럽을 떠돌며 돈을 벌지만, 전쟁으로 징집 대상이 된 처지를 들으니 자신의 출신 배경은 거짓 유토피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엔조는 자기만의 주체적 삶을 열고 싶다. 그러나 아직 배움도 경험도 부족하다. 하지만 부모님의 권유를 수용하는 건 패배감에 젖는 일. 필사적으로 주인공은 동경하는 형님, '블라드'에게서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 한다. 평화롭고 여유 있는 일상 속에 다음 휴가는 어디로 갈까 궁리하는 자신의 가족은 속물로만 보이고, 불우한 환경을 극복하고 자기 힘으로 살아가며 전쟁에 참전해야 할 고비에 놓인 블라드가 정말 살아있는 존재로 동경의 대상이 된다.
괜시리 우크라이나 전쟁 상황을 인터넷으로 열람하고 오랫동안 놓았던 그림의 모델로 전장의 풍경을 끄적이기 시작한다. 형님들은 생사가 오가는 전쟁터를 마치 진정한 삶인 양 동경하며 자신이 누리는 현실을 거부하는 엔조에게 거듭 충고하며 그의 일탈을 감싸주지만, 그럴수록 소년의 갈망은 겉잡을 수 없이 커진다. 가족, 특히 아빠와의 갈등도 도를 더해만 간다. 엔조는 자꾸만 충동적인 행위를 일삼고, 가족은 물론 블라드조차 곤란에 빠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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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엔조> 스틸 |
|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춰 온 두 거장의 묘한 협업은 그들의 대표작을 절묘하게 혼합한 듯 다가온다. 로랑 캉테는 '교육 불가능의 시대'를 누구보다 실감나게 재현해 왔다. 대표작 <클래스>는 물론 2012년 <폭스파이어>, 2017년 <워크숍> 등에서 현재 프랑스가 직면한 난국을 섬세한 터치로 묘사한 바 있다. 교사와 부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공교육 제도의 결함과 넘쳐나는 현장의 요구 속에 표류하는 학교 풍경은 한국 사회가 타산지석 삼기에도 손색이 없다.
유작이 된 <엔조>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 로랑 캉테의 장편 데뷔작 <인력자원부> 속 갈등의 축인 세대 갈등도 본 작품에서 중요한 연결 고리다. 주인공이 경험하지 못한 이민자와 육체 노동자의 현실에 눈을 뜬다는 점 역시 주시할 만하다. 여기에 프랑스 중산층 사회의 소시민적 일상 바깥에서 닥치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 같은 시류를 반영한 쟁점이 추가된다. 온전히 완성했다면 로랑 캉테의 또다른 역작으로 기록될 작업이던 셈이다.
표류하게 된 프로젝트의 소방수로 로뱅 캉피요 말고 누굴 떠올릴 수 있었을까? 그 역시 작가로서 이름을 세계 영화계에 각인시킨 <이스턴 보이즈>에서 퀴어 코드를 매개로 프랑스 중산층과 동유럽 경제난민의 갈등과 이해를 구현한 바 있다. 영화적 은인이자 동료에게서 물려받은 <엔조> 역시 로뱅 캉피요의 성공작을 떠올리게 하는 면모가 적지 않다. 그렇게 두 거장의 생전과 사후를 초월한 협력이 영화의 완성도와 파격성을 보증하는 셈이다.
질풍노도의 여름을 경유해 세계의 실체와 만나는 성장기
주인공은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16살의 능선을 넘어선다. 가족의 헌신과 형님들의 배려 덕분이다. 위태로운 순간이 적지 않았으며 그중 상당 부분이 엔조의 치기 어린 자학이었음에도 16살이란 나이는 숱한 실책을 극복할 수 있는 회복력을 제공해줄 수 있었다. 표면적으론 몇 달의 방황을 거쳐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온 듯 보인다. 그러나 많은 실수를 거쳐 단단해진 소년은 이제 주변을 불안에 떨게 만드는 시한폭탄이 아니다.
그렇다면 엔조는 적지 않은 진통을 겪으며 무엇을 얻었을까? 우선 문밖의 세상을 체험한 것부터 가족의 안전한 울타리를 벗어나 자신을 둘러싼 껍질을 깨고 나온 셈이다. 전문직 중산층의 안락한 삶 너머엔 어떤 삶들이 있을까? 하루 작업 배분에 다툼을 벌이고, 사고 위험에 매일 노출되는 거친 환경이긴 해도 다양한 동료와 그들 개별의 삶을 목격할 기회다. 대학 입시를 준비하며 온실 속 화초처럼 살았다면 주인공이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영역인 것.
다음으론 전 유럽의 화두 우크라이나 전쟁의 위협이다. 전쟁 소식을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통해 쉽게 접할 수 있지만, 미디어 홍수 시대에 오히려 강 건너 불구경하듯 관전하는 전쟁은 안전한 스펙터클에 불과할지 모른다. 처음엔 단지 가족에 대한 반항심으로 전쟁과 영웅주의에 경도되지만, 육체적 상처를 의사 체험하며 고비를 넘는다. 장난감 총이 은유하는, 목적도 통제도 부재한 힘은 현대 서구 사회의 어두운 징후다. 단지 통과의례로 보일 수 있지만, 극우세력에 포섭되기 쉬운 청소년들을 떠올린다면 의미심장한 지점이다.
로뱅 캉피요가 전작들에서 효과적으로 구사해 온 퀴어 코드의 사회정치적 연결 역시 적재적소에서 빛을 발한다. 아직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하지 못한 16살 주인공은 좌충우돌하며 동경과 욕망이 뒤섞인 관계를 이어간다. 때론 관계의 파국으로 연결될 위험을 자초하고, 소중한 이를 향한 뒤틀린 갈구가 화근을 양산한다. 꽤나 주위에 민폐를 끼치긴 하지만, 청소년기에 자아를 찾는 시행착오를 사회가 얼마나 용인해주느냐 시험 격이다. 큰일 날 위기를 용케 모면하지만, 그 아슬아슬한 찰나는 바깥 세계와 전쟁의 공포를 상기하는 은유로 제 몫을 다한다.
얼핏 사고뭉치 도련님의 위태로운 성장기로 읽힐 <엔조>는, 하지만 어느 16살 소년의 사춘기 방황을 통해 프랑스 사회 내 계급 분리와 유럽 전체를 위태롭게 하는 외부의 격랑을 피부로 와닿게 만드는 복합적 작업이다. 복잡한 전후 사정 굳이 다 꿰지 않아도 더없이 섬세한 주인공의 심리 상태와 충동을 피부로 느끼는 체감 효과만으로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만, 행간에 감춰둔 함의를 포착할 때, 마치 우주 공간을 도약하듯 다른 단계로 진입히는 작업이 될 테다.
<작품정보>
엔조
Enzo
2025 프랑스 드라마
2026.05.27. 개봉 103분 15세 관람가
감독 로뱅 캉피요
각본 로랑 캉테, 로뱅 캉피요
제작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마리 앙주 루치아니, 자크 오디아르
출연 엘로이 포후, 막심 슬리빈스키, 피에르프란체스코 파비노, 엘로디 부셰즈
수입/배급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공동배급 ㈜스튜디오 산타클로스엔터테인먼트
2025 78회 칸영화제 감독주간 개막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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