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도 등 돌린 대본... 왜 '마이클'은 이토록 잔인해졌을까
[박재우 기자]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화면이 열리면 하얀 양말 위로 무대 조명이 빛가루처럼 부서진다. 객석의 숨소리가 멎고 이내 익숙한 베이스 라인이 극장 전체를 흔든다. 안톤 후쿠아 감독의 신작 <마이클>은 영리하고도 잔인한 영화다. 대중이 무엇에 갈증을 느끼는지 본능적으로 안다. 공연이 펼쳐지는 스타디움의 열기를 실물 세트로 재현한 스케일은 압도적이다. 스크린을 통해 마이클의 그때 그 순간을 마주하는 관객들은 경이로움과 그리움의 탄성을 흘린다.
그러나 극장 문을 나서는 평단의 시선은 싸늘하다. 혹평하는 평단과 열광하는 관객 사이의 극단적 차이. 이 기이한 균열은 <마이클>의 실존적 정체를 대변한다. 평단은 이 영화가 잭슨 유산 관리 재단의 검열 아래 탄생한 '정제된 브랜드 서사'라며 의심한다. 아동 성추행 의혹과 사생활의 그늘을 교묘히 우회했다는 지적이다.
이 비판은 결코 가볍지 않으며 이 글 역시 그 무게를 끝까지 내려놓지 않을 것이다. 다만 평단과 관객이 갈라선 그 틈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또 다른 본질이 있다. 영화는 대중이 예상한 자극적인 후반부 사생활, 즉 '네버랜드'로의 도피를 과감히 잘라냈다.
대신 마이클이 독립하기 직전까지의 유년기와 청년기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그리고 그 시간을 따라가다 보면 하나의 잔인한 패턴이 드러난다. 마이클은 단 한 번도 자기 자신을 가져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노래의 기쁨도, 변해 가는 자기 몸도, 삶 전체도 늘 누군가에게 먼저 징발되었다. 그는 흑백의 경계, 어른과 아이의 경계에 서서 평생을 '타자'로서 유랑했다. 그 박탈의 첫 장면은, 가난한 흑인 노동계급 가족이 짊어진 부양의 사슬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 사슬은, 한국의 어떤 세대에게는 낯설지 않은 기억을 건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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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마이클> 스틸컷 |
| ⓒ 유니버설 픽쳐스 |
여기서 가난한 공동체 특유의 생존 논리가 작동한다. 가혹한 환경에서 출구가 막힌 이들에게 가족 중 누군가의 재능은 단순한 개인의 자산이 아니다. '우리 중 한 명이 성공하면, 그가 나머지 전체를 끌어올린다'는 집단적 계약이자 탈출의 마지막 동아줄이다. 자원이 없는 곳일수록 이 동아줄은 더 굵고 질긴 족쇄가 된다.
어린 마이클(줄리아노 발디 분)은 잭슨 파이브의 막내였지만 실질적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소년 가장이었다. 영화는 어린 소년이 모타운 스튜디오에서 노래하는 순간을 클로즈업한다. 놀랍게도 그 얼굴에 서린 것은 공포가 아니라 환희다. 아이는 진심으로 노래가 좋아서 웃는다. 비극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그 순수한 미소조차 시스템 안에서는 가족을 부양하는 자본으로 환수되었다는 것. 마이클이 유희로 부른 노래는, 스튜디오 문을 나서는 순간 온 가족의 생계가 걸린 노동으로 번역되었다. 마이클에게 음악은 천부적인 신의 선물이었으나 그 선물은 누리기도 전에 가족 공동체를 먹여 살려야 하는 무거운 의무로 징발되었다.
같은 희생, 갈라지는 시선
마이클이 짊어진 족쇄의 정체는 '가족의 성공을 위한 개인의 희생'이라는 명제다. "네가 잘되어야 우리 집안이 산다." 개인의 삶과 존엄이 집단의 번영이라는 대의 앞에 기꺼이 뒤로 밀려나는 논리. 조 잭슨은 마이클이 솔로로 독립해 세계적인 슈퍼스타가 된 이후에도 끊임없이 그의 주변을 맴돌며 형제들의 투어 참여를 종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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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마이클> 스틸컷 |
| ⓒ 유니버설 픽쳐스 |
그러나 같은 장면이 누군가에게는 정반대로 읽힌다. 집단보다 개인의 삶이 먼저인 시대를 살아가는 관객에게, '가족을 위한 희생'이라는 정서는 자칫 한물간 신파의 클리셰로 비칠 위험을 안는다. 왜 도망치지 않았는가, 왜 그 굴레를 끊어내지 못했는가. 개인의 선택과 자유를 당연한 전제로 삼는 시선에는 마이클의 순응이 비극이 아니라 답답함으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회의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모든 것을 '희생'으로 설명하려는 영화의 태도가 실은 마이클의 후반기를 둘러싼 스캔들에 미리 깔아두는 면죄부가 아니냐는 의심이다. 가족에게 착취당한 가여운 소년이라는 초상을 충분히 새겨두면 훗날의 어떤 의혹도 '상처받은 영혼의 어쩔 수 없는 그늘'로 미끄러져 들어갈 자리가 생긴다. 희생자 서사는 그 자체로 가장 효율적인 변호가 되는 것이다. 이 시선에서 영화의 따뜻함은 미덕이 아니라 알리바이의 설계로 읽힌다. 평단의 냉대와 관객의 환호가 그토록 벌어진 데에는 어쩌면 이 정서적 시차(時差), 그리고 그 시차가 낳은 의심의 온도차도 한몫했을 것이다.
네버랜드가 없기에 더 짙은 고독
영화 <마이클>에는 우리가 아는 그 화려하고 기괴한 저택 '네버랜드'가 나오지 않는다. 흥미로운 역설은 바로 이 침묵에서 발생한다. 영화가 사생활의 도피처를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관객은 마이클이 '가족'이라는 가장 일상적인 울타리 안에서 얼마나 철저하게 타자화되었는지 목격하게 된다.
그는 흑인 사회로부터는 변절했다는 비난을, 백인 사회로부터는 기괴한 구경거리라는 멸시를 받았다. 영화 속에서 마이클이 백반증으로 하얗게 변해 가는 피부를 바라보는 장면은 잔인할 정도로 상징적이다. 그의 탈색은 질병이 강제한 불가항력이었으나 세상은 그것을 '인종을 버린 선택'으로 읽었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변해 가는 몸조차 타인의 해석에 점령당했다. 그는 어디에도 속할 수 없었다. 흑인도 백인도, 어른도 아이도 될 수 없었던 이방인이었다.
도망칠 '네버랜드'조차 없던 시절, 마이클의 유일한 도피처는 오직 무대 위뿐이었다. 영화 속에서 무대를 준비하는 마이클의 뒷모습은 쓸쓸하게 그려진다. 화려한 조명이 켜지기 직전, 그의 실루엣은 철저히 홀로다. 가장 높은 왕좌에 올랐으나, 가장 철저하게 고립되었던 인간의 외로움이다.
여기서 비장미가 발생한다. 마이클에게 고향은 '평범한 유년기'였으나 그는 그것을 태생적으로 박탈당했다. 노래의 기쁨을 노동에 빼앗긴 아이는, 이제 자기 몸과 소속될 자리마저 빼앗긴다. 흑인일 권리도 백인일 권리도, 어른일 권리도 아이일 권리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 가족의 생계와 인종의 벽이라는 사슬에 묶인 채, 하얀 양말을 신고 발끝으로 서서 세상을 내려다보던 그 순간. 그는 지상에 안착하지 못한 채 공중에 뜬 외로운 신(神)이자, 가족의 무게에 짓눌린 슬픈 가장이었다. 가진 것이 그토록 많았으나 정작 자기 자신만은 단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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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마이클> 스틸컷 |
| ⓒ 유니버설 픽쳐스 |
그러나 영화가 끝난 뒤 밀려오는 허기짐은 지울 수 없다. 이 허기짐은 마이클이 가족과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희생자인 동시에 또 다른 누군가에게 가해의 의혹을 받는 존재일 수 있다는 사실을 화려한 조명으로 덮어 버린 데서 온다. 영화는 마이클의 고독을 포착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 고독이 가린 사각지대까지 응시할 용기는 끝내 내지 못했다.
그리고 이 사각지대는 스크린 밖에서 더 노골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이 영화를 기획하고 통제한 주체는 마이클의 유산을 관리하는 재단이며 정작 그를 가장 가까이서 사랑했던 딸 파리스 잭슨은 대본을 두고 '정직하지 않다'며 등을 돌렸다. 그를 추모한다는 사람들은 반대하고, 그의 이름으로 수익을 기대하는 쪽이 영화를 밀어붙인 셈이다. 마이클을 둘러싼 의혹의 묘사를 막은 오래된 법적 합의의 존재가 뒤늦게 드러났고 이미 찍은 분량을 들어내고 다시 촬영해야 했다. 이 '정제'가 우연이 아니라 설계였다는 증거다. 살아서 가족에게 노래를 징발당한 소년은, 죽어서는 자신의 얼굴과 이야기마저 유산이라는 이름의 자본에 징발당하고 있다. 박탈은 그의 사후에도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마지막으로 정직해져야 할 대상은 다름 아닌 이 글 자신이다. '모든 것을 박탈당한 인간'이라는 이 애잔한 서사조차 실은 마이클에게서 또 하나를 빼앗는다. 복잡한 인간일 권리다. 빼앗기기만 한 순결한 희생자에게는 가해도 모순도 그늘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렇게 우리는 그를 동정하는 바로 그 손길로 그를 다시 납작하게 만든다.
영화는 그를 성역으로 박제했고, 평단은 그를 스캔들로 환원했으며, 이 글은 그를 박탈의 피해자로 빚었다. 살아서도 자기 자신을 가져본 적 없던 그는, 죽어서도 여전히 저마다의 마이클로 징발되는 중이다. 어쩌면 그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를 끝내 다 알 수 없는 사람으로 남겨 두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성역도 괴물도 희생자도 아닌, 모순으로 가득한 한 인간으로. 경계선 위에서 끝내 내려오지 못한 그를, 우리는 함부로 정의하는 대신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필자의 브런치(@4indie)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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