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게 닿았거나, 닿지 않았거나
[한별 기자]
현재 우리는 인터넷의 발달로 멀리 떨어진 사람과도, 서로 다른 시간대에 있는 사람과도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내 곁에 있는 사람과는 대화조차 나누지 않는, 묘하게 뒤틀린 세상이기도 하다. 인스타그램으로 친구들의 삶을 샅샅히 엿보고 있지만, 당장 오늘 저녁 술 한 잔 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는 망설이게 된다. 매일매일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어딘가 외로운 삶을 살고 있다.
김혜진 작가 역시 지난 20일 창비서교빌딩 50주년홀에서 열린 단편집 <달걀의 온기>(2026년 4월 출간) 출간 기념 북토크에서 "SNS 등 교류는 많아졌지만 개인이 고립되고 있지 않나라는 고민을 했다"고 말했다. 호의와 적의가 구분되지 않는 사회 속에서 누군가에게 관심이나 호감을 표현할 때 어떤 방식으로,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취해야 하는가를 고민했다고도 덧붙였다.
그런 고민 끝에 쓰인 소설은 자신의 삶에 충실한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삶의 태도가 확고해 쉬이 흔들리지 않고, 주관과 생각, 경험이 뚜렷한 인물들이다. 각 단편의 제목은 직관적인 인상을 준다. 특히 '관종들', '하루치의 말' 같은 제목은 처음엔 궁금증을 불러일으키지만, 이야기를 읽고 나면 이보다 잘 어울리는 제목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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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 <달걀의 온기> 표지 창비에서 출간된 김혜진 작가의 소설집 <달걀의 온기> 표지. |
| ⓒ 창비 |
타인과 함께하는 삶,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
살다 보면 세상은 평가하고 평가당하는 일의 연속임을 알게 된다. 학교, 회사 그 어디서든, 심지어 친구들 사이에서도 우리는 서로를 관찰하고 인식하는 것을 넘어 생각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지 떠올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내 모습이 부정적으로 보일 게 분명함에도 바꿀 수 없는 삶의 태도들이 있다.
'관종들'의 정해와 그 남편이 대표적이다. 어릴 적 딸이 주변의 부주의로 사고를 당한 뒤, 이들은 세상의 크고 작은 실수에 예민해졌다. 문 앞에 짐을 치우지 않는 이웃, 아이를 홀로 기다리게 하는 어른 등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지적한다. 이들 부부가 사람들과 계속 부딪히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건, 그 태도가 바꿀 수 없는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관계 안에서 서로가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있는 경우도 있다. '하루치의 말'에 등장한 애실은 우연한 계기로 만나 친구가 된 현서와 우정을 쌓지만 그가 사기꾼이라는 게 밝혀진 후에도 그를 믿는다. 그러나 정작 현서에게는 애실이 매번 힘든 일을 쏟아내는 관계였다는 것이 드러난다. 누군가에게 나쁘게 대하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결론적으로는 힘든 상대가 되어버린 셈이다.
반면 타인과 선을 정하고 그 밖의 사람으로 남는 '우연의 직조' 속 우나가 있다. 화가 안지일의 전시에서 관람객의 평가를 기록하는 일을 하게 된 우나는 안지일과도, 관객들과도 한발짝 거리를 둔 상태에서 지낸다. 표절 논란에 휩싸인 전시에 분노한 관객들이 조롱을 내뱉어도 우나는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기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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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걀의 온기> 출간 기념 북토크 현장 5월 20일 창비서교빌딩에서 <달걀의 온기> 출간 기념 북토크가 진행됐다. 사회는 최진영 작가가 맡았고 김혜진 작가가 직접 독자들의 질문에 답하기도 했다. |
| ⓒ 한별 |
타인과의 닿음으로 생각과 태도를 바꾼 주인공들도 있다. '푸른색 루비콘'의 경수가 그렇다. 아내와 사별하고 이런저런 일을 해보던 경수는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호의와 편견에 떠밀려 교회로 오게 된다. 새 신자 교육을 받던 중 훈식을 만나게 되고, 그의 부탁을 들어주며 동정이나 배려가 아닌 부탁을 주고받는 대등한 관계를 쌓는다.
'달걀의 온기' 속 선희는 투자 실패로 돈을 날리자 아버지가 살던 시골집을 팔기 위해 귀향한다. 원하던 학교에 가지 못하고 방황했던 과거를 아버지 탓으로 돌려온 선희는 집을 팔아 돈을 마련하려 하지만, 시골집은 좀처럼 팔리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만난 민지는 부모님이 모두 떠난 상황에서도 열심히 닭을 돌보며 청란을 판다.
그런 민지의 청란을 계란을 좋아하지 않던 아버지도, 옆집에 살던 이웃도 계속 구매해왔다는 것을 알게 된 선희는 병원에 간 고씨 할머니 대신 그 청란을 구매한다. 아마 돌봄을 받지 못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과 민지의 모습이 겹쳐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경수도, 선희도 자신을 대하던 여느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의 이들을 거절하거나 내치지 못한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서 스스로도 몰랐던 변화에 대한 갈망이 보인다. 타인과의 사소한 닿음이 생각과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김혜진 작가 역시 이 지점을 소설의 핵심으로 짚었다. 북토크에서 그는 '푸른색 루비콘'의 결말 부분을 낭독했다. 이 소설들이 타인에 대한 이야기이며, 결말 장면이 타인과의 접점에서 시작되는 감정을 담고 있다고 말했다.
북토크 사회를 맡은 최진영 작가는 소설 속 인물들이 저마다 달걀 껍질만큼의 막을 두르고 있지만 그 안에 온기가 있으며, 지금 뭔가를 깨고 나오기 직전의 상태인 것 같다는 감상을 나누기도 했다.
이 소설을 읽으며 앞으로 맺어갈 수많은 인연들에 대해 생각했다. 변화를 앞두고 새로운 관계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한 이 순간, 소설의 인물들을 마주하며 나를 돌아봤다. 나 역시 크게 관련이 없어도 불의라고 생각하는 일에 분노하기도, 누군가의 말을 버겁게 느껴본 적이 있다. 그렇기에 소설의 인물들이 낯설지 않았다.
이런 감상은 나만의 것이 아닐 것이다. 담담한 서술인데도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대사들이 여러 번 곱씹히고, 다 읽고 난 후에도 쉽사리 책을 덮지 못하게 된다. 매일 수많은 사람을 스쳐 지나면서도 외로운 시대에, 타인과의 사소한 닿음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조용히 일깨운다는 점에서 <달걀의 온기>는 한국 문학이 할 수 있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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