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권력 독점 막아야" 교황 레오 14세, 첫 회칙 화두로 AI 거론
AI 독점·전쟁·노동 착취 비판
교황 레오 14세가 즉위 후 처음 발표한 회칙에서 인공지능(AI) 시대의 인간 존엄을 지키기 위해 "AI를 무장을 해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AI 기술을 거부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기술과 알고리즘이 인간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공적 통제와 윤리적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는 취지다.
25일 연합뉴스는 바티칸 공식 홈페이지를 인용해 레오 14세가 바티칸 교황청 시노드 강당에서 회칙 '마니피카 후마니타스'(Magnifica Humanitas·위대한 인간성)를 발표했다고 전했다. 그는 회칙에서 "단순한 규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며 "AI를 무장해제함으로써 더 개방적이고 모두가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교황은 "무장해제는 기술이 인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라며 "AI는 이미 우리가 깊이 잠겨 살아가는 하나의 환경이자, 반드시 상대해야 하는 힘이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더 강력한 알고리즘과 방대한 데이터셋을 확보해 지정학적 또는 상업적 우위를 차지하려는 경쟁을 막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시장 자율에만 맡겨서는 AI 시대의 공공선을 지킬 수 없어이번 회칙은 AI를 단순한 기술 문제가 아니라 인간 존엄, 노동, 평화, 정치 책임의 문제로 다뤘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교황은 "AI를 도덕적으로 중립적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며 "AI에 관한 윤리적 틀을 공개적으로 논의하고, 사회 정의의 공통된 기준에 따라 평가해야 한다"고 했다. AI 시스템을 기획하고 개발하는 단계부터 실제 의사결정에 활용되는 과정까지 책임 소재가 명확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교황은 "AI 도입에 신중함과 엄격한 평가, 때로는 더딘 속도를 요구하는 것은 진보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를 위한 책임감 있는 배려"라고 밝혔다.

디지털 권력의 집중에 대한 우려도 회칙의 핵심 내용이다. 교황은 알고리즘, 디지털 플랫폼, 기술 인프라, 데이터 등을 '보편적 재화'에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디지털 혁명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의 불균형을 줄이기 위해서다. 그는 "디지털 환경에서 플랫폼·데이터·인프라는 국가가 아닌 경제·기술 주체들이 통제한다"며 "이런 권력이 소수에 집중될 때 불투명해지고 의존·배제·불평등으로 왜곡될 위험이 커진다"고 지적했다.
시장 자율에만 맡겨서는 AI 시대의 공공선을 지킬 수 없다는 메시지도 담겼다. 교황은 "AI와 로봇 시대에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만 의존하는 것은 더는 가능하지 않다"며 정치가 노동의 존엄성, 사회적 포용, 혁신 혜택의 공정한 분배를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디지털 경제 이면의 노동 착취 문제도 거론했다. 교황은 데이터 라벨링, 모델 훈련 등 보이지 않는 작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과 희토류 등 자원 채굴 과정의 가혹한 노동을 언급하며 이를 "새로운 형태의 노예제"라고 비판했다. 이어 "새로운 노예제와의 싸움은 윤리적인 AI를 위한 결정적 시험"이라고 했다.
산업혁명 이어 AI 시대 사회교리 제시반전과 평화에 대한 메시지도 회칙에 포함됐다. 교황은 AI 시대의 전쟁이 단순한 무력 충돌에 그치지 않고, 기술이 만들어낸 허위 정보와 단순화된 서사, 이분법적 사고를 통해 문화적으로도 형성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모든 종류의 전쟁을 합리화하는 데 너무 자주 사용돼 온 '정당한 전쟁' 이론은 이제 시대에 뒤떨어졌다"며 "무력과 폭력, 무기의 사용은 관계의 빈곤을 반영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회칙은 총 82페이지, 약 4만 단어, 245개 항으로 구성됐다. 회칙은 교황이 전 세계 가톨릭 신자와 주교들에게 전하는 최고 권위의 사목 교서로, 교황 문헌 가운데 가장 구속력이 강한 형식으로 꼽힌다. 통상 회칙은 교황 명의로 공표되지만, 이번처럼 교황이 직접 발표 행사에 나서는 것은 이례적이다.

발표 행사에는 교황청 부서 장관인 추기경들과 신학자, 전문가들이 참석했다. AI 기업 앤스로픽의 공동 창업자 크리스토퍼 올라 역시 자리를 함께했다. 앤스로픽은 AI 기술의 감시·무기 개발 활용에 반대해온 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레오 14세는 지난 15일 이 회칙에 서명했다. 이날은 레오 13세의 회칙 '레룸 노바룸' 공표 135주년이 되는 날이다. '레룸 노바룸'은 산업혁명 시기 노동자의 권리와 자본주의의 한계를 다룬 대표적 사회교리 문헌이다. 교황이 자신의 이름을 '레오 14세'로 정한 것도 이 같은 계승 의식과 맞닿아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교황청은 레오 14세 즉위 당시 새 교황 명이 노동권과 사회 정의를 강조한 레오 13세를 계승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레오 14세는 사제 훈련을 받기 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빌라노바대에서 수학을 전공했다. 이번 회칙은 자연과학 전공자로서의 문제의식과 가톨릭 사회교리를 결합해 AI 시대의 기술 권력과 인간 존엄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문헌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방제일 기자 zeilis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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