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발해야 신약 준다?… 희망고문에 두번 우는 희귀질환자
희귀질환 고가 신약
까다로운 급여 기준

반복적 재발해야 투약 가능 '모순'
X염색체 연관 저인산혈증 건보는
18세 미만만 적용 다수 환자 소외
"재발을 해야지만 약을 준다고요?" "장애인이 돼야만 효과 좋은 신약을 쓸 수 있습니까?" "재발을 기다리는 치료는 환자의 삶을 빼앗는 제도입니다."
희귀질환인 시신경척수염 환우들은 지난달 중순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서울사무소 앞에서 이런 문구가 적힌 팻말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휠체어를 탄 환자들, 보는 것이 불편한 환자들이 직접 나서 외치고 싶었던 것은 뭐였을까. 일반적으로 희귀질환은 환자 수가 적고 사회적 관심도가 낮아 치료제를 구하기 매우 어렵다. 다행히 고가의 신약에 건강보험까지 적용됐는데, 까다로운 급여 기준으로 써 보지도 못한다면 이 또한 환자들에게 희망고문일 수밖에 없다. 시신경척수염 범주질환(NMOSD)과 전신 중증근무력증, X염색체 연관 저인산혈증(XLH) 등이 대표적이다.
중추 신경계 자가면역질환인 시신경척수염 범주질환은 시력 저하, 보행 장애, 경직, 방광 기능 이상, 호흡 부전, 하반신 마비 등 다양한 신경학적 증상을 특징으로 한다. 선행 연구에서 환자의 40~60%가 1년 안에, 약 90%는 3년 이내에 재발을 경험하는 것으로 보고됐다. 이 질환에 널리 쓰이는 일반 면역억제 요법은 70~80%의 재발률 감소를 보이지만 불충분한 치료 효과와 부작용으로 인해 약물 중단 비율이 높다는 한계가 있다. 전통적 치료제 중 하나인 리툭시맙도 한 연구에서 13%의 비율로 치료가 중단됐다는 내용이 보고됐다.
이런 상황에서 근래 시신경척수염 범주질환 발병 핵심 기전을 표적으로 한 혁신적 치료제들이 잇따라 허가되면서 치료 환경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 특히 지난해 11월 급여화된 ‘라불리주맙’은 반복적 재발로 어려움을 겪는 환자들에게 ‘재발 없는 삶’에 대한 희망을 제시했다. 이 치료제는 임상 연구에서 재발 위험을 약 98.6% 감소시키는 것으로 확인됐다.
문제는 건보 적용 조건이 매우 엄격해 치료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현행 급여 기준은 기존 치료 이후에도 최근 1년 이내에 두 번 이상 재발을 겪어야 해당 치료제를 쓸 수 있도록 설정돼 있다. 해당 약으로 치료받기 위해선 반복적이고 심각한 재발을 경험해야 하는 구조적 모순이 있는 셈이다. 건국대병원 신경과 오지영 교수는 25일 “시신경척수염 범주질환은 재발할 때마다 신경 손상이 누적될 수 있는 만큼 재발 예방을 치료 목표로 하는 질환 특성을 고려해 치료 접근 시점과 급여 기준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라불리주맙은 지난해 12월 희귀자가면역질환인 전신 중증근무력증에도 급여가 인정됐지만 적용 조건이 제한적이다. 전신 중증근무력증은 환자의 4분의 3 이상이 눈꺼풀 처짐이나 복시 등 안구 증상을 호소하고, 약 절반은 6개월 이내에 전신형으로 진행된다. 말하기·삼킴 장애, 사지 근력 저하 등이 나타나고 호흡 근육을 침범하면 스스로 호흡이 어려워져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다.
기존 스테로이드와 면역 억제제 치료 효과는 제한적이고, 장기 사용 시 부작용 위험이 따른다. 신약 라불리주맙은 이런 문제점을 보완하지만 급여 기준이 최근 1년 내 근무력증 위기를 경험하고 고용량 면역글로불린 등 중환자 치료를 받은 경우에만 접근할 수 있도록 돼 있다. 환자들이 질환 악화나 위기 상황을 겪은 후에야 치료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일본이나 프랑스, 스페인 등에선 근무력증 위기 경험을 치료 접근의 필수 조건으로 요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해외 주요 국가들은 질환의 활성도, 재발 위험, 비가역적 장애 예방 필요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혁신 치료제의 조기 접근성을 강화하는 추세다.
오 교수는 “전신 중증근무력증 치료의 목표는 응급 상황 이후 생존을 유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증상 악화를 예방해 환자의 기능과 삶의 질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있다”면서 “하지만 현행 급여 구조에서는 근무력증 위기 같은 상황을 겪은 후에야 치료 접근이 가능해 치료 시점이 늦어지고 질환 악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몸속 인 흡수에 문제가 생겨 뼈 관련 합병증을 겪는 ‘X염색체 연관 저인산혈증’의 경우 2023년 5월부터 만 18세 미만 소아에 한해 새 치료제인 ‘부로수맙’에 건보를 적용받고 있다. 하지만 해외 주요국 대비 급여가 한정적이어서 성인은 물론 성장판이 닫힌 청소년 등 치료가 필요한 환자가 소외되는 상황이 3년째 지속되고 있다. 특히 만 18세를 앞둔 환자에 대해선 급여 중단 이후 수술이나 합병증 위험이 증가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역시 해외 주요국에선 XLH를 성인기까지 지속되는 질환으로 보고 연령 제한 없이 모두 급여를 적용하고 있다.
국내에선 건보 재정의 지속 가능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구조적 특성상 기존 표준 치료의 반응 여부를 단계적으로 확인한 후 신약 사용을 허용하는 순차적 급여 체계를 고수하고 있다. 또한, 급여 적용 시에도 대상 환자 수 제한, 중증도 기준, 치료 반응 평가 및 중단 기준 등을 상대적으로 엄격하게 적용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 유지현 회장은 “희귀질환 치료 접근성은 단순히 약제 비용의 문제가 아니라 환자의 남은 삶 전체를 좌우하는 제도 설계의 문제”라며 “질환 특성상 치료의 골든타임을 놓치면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기능 저하나 장애로 이어지는 만큼 환자들이 적절한 시기에 치료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제도적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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