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사막’ 흥행의 이면…“핵심 엔진” 게임산업, 지원은 뒷전 [데스크 창]

벌써 4년 전 일이다. 펄어비스는 2022년 11월 부산에서 열린 국내 최대 게임쇼 ‘지스타(G-STAR)’ 현장에서 기자들을 대상으로 신작 ‘붉은사막’ 플레이 영상을 공개했다. 방대하다 못해 광활한 ‘오픈 월드’와 상상을 초월하는 자유도, 빼어난 그래픽과 액션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정말 이대로 출시할 수만 있다면 엄청난 작품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몇 차례 출시 연기를 거듭하던 펄어비스는 당초 지난해 연말 ‘붉은사막’을 출시할 예정이었으나 그해 2분기 실적 발표 컨퍼런스 콜에서 재차 연기를 선언했다. 기대감이 날로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출시 일정을 뒤로 계속 미루면서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붉은사막’이 베일을 벗자, 모든 염려가 기우였음을 인정하게 됐다.
지난 3월20일, ‘붉은사막’이 전 세계에서 동시 출시됐다. ‘붉은사막’은 기존 ‘검은사막’ IP를 앞세워 북미와 유럽 시장에서 한국 게임으로는 전례가 없는 최고 수준의 흥행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는 게임사 펄어비스의 후속작이다.
이 게임은 출시 첫날 200만장을 팔아치우면서 높은 관심을 입증했고, 한 달이 채 안 된 시점에 이미 500만장을 돌파했다. 5월 현재는 600만장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만약 올해 안에 글로벌 1000만장 기록을 달성하게 된다면 전 세계 게임 ‘글로벌 메가 히트작’ 클럽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실적 견인에도 톡톡한 역할을 했다. ‘붉은사막’ 효과로 펄어비스의 1분기 매출은 3285억원, 영업이익은 2121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각각 419.8%, 2584.8% 증가했다. PC 온라인과 모바일 게임이 대세인 한국과 달리, 북미와 유럽에서는 여전히 콘솔이 강세다. 한국 토종 IP로 북미‧유럽 시장을 공략해 매출 반등을 이뤄낸 펄어비스의 이번 성과는 K-게임이 여전히 글로벌 무대에서 통한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붉은사막’ 흥행 소식이 전해지자 정치권도 박수를 보냈다. 김민석 국무총리는 4월24일 소셜미디어에 글을 올려 ‘붉은사막 500만장 판매’ 소식을 직접 공유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들의 기술로 만들어낸 살아있는 게임 세계, 실사와 같은 그래픽, 적극적인 소통으로 전 세계 이용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강조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이던 지난해 5월17일 광주 e스포츠경기장을 찾은 바 있다. 이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한때 우리는 세계 게임산업의 선두였지만, 보수 정부 시절 게임을 중독과 동일 선상에 놓고 규제하면서 성장세가 꺾였다”고 짚었다. 취임 이후인 지난해 10월15일에는 서울 성수동 크래프톤 ‘펍지 성수’에서 K-게임 현장간담회를 직접 주재하며 “게임은 중독 물질이 아니다”라고 못 박았다.
대통령이 게임산업 간담회를 주재한 건 유례가 없는 일이라 이날 간담회는 더욱 관심을 모았다. 이 대통령은 “과거 정부가 게임을 마약과 함께 4대 중독으로 규정하고 억압하는 바람에 중국보다 앞서 있던 경쟁력이 뒤처지게 됐다”면서 “게임산업을 청년 일자리와 수출을 견인하는 핵심 문화산업으로 키워야 한다”고 피력했다.
그러나 현실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게 없다. ‘지원하겠다’는 선언은 여전히 공허하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해 12월 ‘2026년 업무보고’에서 게임을 영화·음악·웹툰과 함께 문화창조산업의 핵심 성장엔진으로 규정했다. 그럼에도 2026년 문체부 전체 예산이 7조8555억원으로 전년 대비 11.2% 증가한 상황에서 게임 분야 예산 비율은 1123억원으로 전체의 1%대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직접 제작과 개발에 투입되는 예산은 인디 게임 지원 93억원, 현지화 지원 24억5000만원 등으로 쪼개져 있다.
같은 업무보고에서 영화 산업은 ‘긴급 처방’이 필요한 분야로 분류됐다. 영화 제작 지원 200억원, 독립영화 제작·유통 지원 205억원 등 직접 투자 항목이 명시됐다. 공연 분야 역시 창작 뮤지컬 육성과 해외 진출을 목표로 대규모 제작 지원이 이뤄진다. 정부가 제작 리스크를 직접 부담하는 구조다.
반면 게임산업에 대한 처방은 결이 다르다. 문체부는 차세대 IP 발굴을 위해 정책금융과 민간 자본을 연계한 펀드 확대를 대안으로 내세웠다. 실질적인 예산 증액 대신 외부 자금 유치에 기대는 방식이다. 게임을 ‘핵심 엔진’으로 치켜세우면서, 정작 엔진을 돌릴 연료를 직접 공급하는 데에는 인색하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 있다.
K-콘텐츠 수출 성장을 게임산업이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살펴보면 이와 같은 정부의 처사가 더욱 불합리하게 느껴진다. 게임산업은 전체 수출의 60.4%에 달하는 85억347만달러(한화 약 12조8342억8727만원)를 수출했다. 이어 음악산업(2조7194억6892만원), 방송 및 영상산업(1조8978억3892만원) 순이다. 2위 음악산업과 3위 방송 및 영상산업의 수출액을 합해도 게임산업보다 3배 이상 적다.
‘붉은사막’ 개발 기간은 7년이다. 펄어비스는 7년의 시간 동안 흑자와 적자를 오가며 투자자들의 의심과 시장의 냉소를 버텼다.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건 ‘검은사막’이라는 캐시카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펄어비스의 대표 IP ‘검은사막’이 북미와 유럽 시장에서 큰 성과를 거두고 꾸준한 수익을 내면서 7년짜리 장기 프로젝트의 양분을 공급했다.
게임을 개발하는 긴 기간 동안 게임사의 매출은 발생하지 않는다. 개발 단계에서 프로젝트가 중단되는 경우도 셀 수 없이 많다. 이 초기 위험 구간이 게임사에게는 가장 중요한 시기다. 그런데 정부 예산은 이 단계에서 투입하기보다 성과가 검증된 뒤 투자를 하는 방향에 무게를 두고 있다. 영화와 공연 등 다른 분야에서는 실패 리스크를 국가가 일정 부분 분담하면서, 게임에서는 그 부담을 고스란히 민간과 개발사에 넘기는 셈이다.
‘검은사막’ 같은 캐시카우가 없는 개발사, 7년이라는 긴 시간을 버틸 여력이 없는 중소 게임사는 시장을 흔들 신작을 만드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단순하게 ‘붉은사막’처럼 만들면 된다’, ‘붉은사막’ 같은 K-게임을 또 만들라는 말이 얼마나 공허하게 들리는지 현장에서는 이미 뼛속 깊이 느끼고 있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간담회에서 “게임을 바라보는 인식을 바꾸겠다”고 했고, 김민석 총리 역시 “정부도 책임감을 갖고 적극 뒷받침하겠다”고 했다. 문체부는 게임을 문화창조산업의 핵심 엔진으로 격상했다. 인식 전환은 반갑다. 그러나 인식이 바뀐다고 해서 생태계가 바뀌지는 않는다. 문체부 스스로 “정책의 관점을 지원에서 투자로 전환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정작 예산 구조는 수십 년 동안 제자리다.
‘붉은사막’ 흥행 이후 게임 업계에서 “이제 한국 게임도 세계 무대에서 통한다”는 말이 나온다. 펄어비스가 이를 증명했다. 하지만 그것이 K-게임 시스템이 완성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한 명의 천재 감독이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고 해서 한국 영화산업의 구조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듯이, ‘붉은사막’ 한 편의 성공이 한국 게임 생태계를 바꿀 수는 없다. 오히려 그 성공이 구조적 문제를 가리는 화려한 포장지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우려를 내려놓기 어렵다. ‘붉은사막’이 증명한 건 ‘가능성’이다. 우리가 아직 만들지 못한 건 그 가능성이 현실에서 다시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는 ‘시스템’이다.
이영재 기자 youngjae@kukinews.com
Copyright © 쿠키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