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부인'이 자초한 역사 왜곡,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이인혜 2026. 5. 22.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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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집단 지성이 능동적인 '문화 감시 권력'으로 진화

[이인혜 기자]

K-콘텐츠가 글로벌 플랫폼을 타고 전 세계로 실시간 송출되는 시대다. 수백억 원의 제작비가 투입되고 한류 스타들이 포진한 대작들이 연일 쏟아진다. 하지만 겉보기엔 화려한 이 산업의 이면에는 위태로운 모래성이 자리 잡고 있다.

최근 종영한 MBC 드라마 <21세기 대군부인>의 역사 왜곡 논란은 지금 한국 미디어 산업이 안고 있는 시스템의 부재를 적나라하게 노출한 뼈아픈 사건이 아닐까.

'21세기 대군부인' 논란의 본질
 MBC 금토드라마 '21세기 대군부인'
ⓒ MBC
가장 먼저 짚어야 할 지점은 논란이 촉발된 구체적인 장면이다. 이 드라마는 대한민국이 '21세기 자주적 입헌군주제'라는 대체 역사 설정을 내세웠다. 그러나 정작 방송 장면을 채운 것은 심각한 역사적 오류였다. 이를테면 11회의 왕 즉위식 장면에서, 왕(변우석)의 머리에는 제후국 군주가 쓰는 '구류면류관'이 씌워졌고, 신하들은 제후국에서 쓰는 '천세'를 외쳤다. 설상가상으로 극 중 인물들이 한국 전통 방식이 아닌 중국식 다도법을 따르는 장면까지 등장하며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이에 대해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글로벌 OTT를 통해 전 세계 시청자들이 함께 보는 역사물 콘텐츠라면 정확한 고증뿐만 아니라 주변국의 역사 왜곡 상황도 유심히 체크해야만 하는데 이 부분을 놓친 것이 가장 뼈아프다"며 "중국 동북공정에 빌미를 제공했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K-콘텐츠 스스로 국가의 지위를 제후국으로 격하시키는 연출은 단순한 고증 실패를 넘어 치명적인 지정학적 리스크를 내포한다. 최근 주변국이 한복, 김치 등 한국의 고유문화를 자국의 것이라 억지 주장하는 '문화 공정'을 노골화하는 상황에서, 전 세계로 송출되는 한국 드라마가 스스로 제후국의 상징을 덧씌우는 것은 그들의 왜곡된 논리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위험한 빌미가 될 수 있다. 역사란 굳건한 역사적 사실이라는 토대 위에서 변주될 때 비로소 설득력을 얻는 법이다. 기초적인 역사적 팩트조차 지켜내지 못한 상상력은 창작의 자유가 아니라 역사적 자해 행위에 불과하다.

이와 관련해 한국사 강사 최태성은 "배우들의 출연료는 몇 억을 아낌없이 지불하면서 역사 고증 비용은 몇십만 원으로 퉁치려 한다"며 매서운 일침을 가했다. 글로벌 스탠다드를 외치며 화려한 CG와 세트장 구축에는 돈을 쏟아부으면서, 정작 콘텐츠의 뼈대이자 국가적 정체성을 지키는 고증 작업에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은 '불필요한 지출'로 취급하는 제작 환경의 척박함을 이번 사태의 본질로 꼬집은 것이다.

논란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하자 주연 배우들이 먼저 자필 사과문을 올리며 진화에 나섰다. 천문학적인 출연료를 받으며 작품의 얼굴 역할을 하는 주연 배우로서, 논란에 대해 가장 먼저 도의적 책임을 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문제는 정작 콘텐츠의 뼈대를 짠 실질적 창작자들의 대처가 한발 늦었다는 점이다. 배우들의 사과가 이어진 뒤에야 집필을 맡은 유지원 작가가 "조선 예법을 현대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철저한 자료조사와 고증이 부족했다"며 불찰을 인정했고, 제작진 역시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문제가 된 장면의 오디오와 자막을 수정하겠다고 밝혔다. 팩트를 체크하고 오류를 걸러내야 할 제작진이 배우들의 인지도 뒤에 숨어 수습을 지연시키는 행태는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다.

고장난 시스템에 브레이크 건 대중

흥미롭고도 다행스러운 점은 이 고장 난 시스템에 가장 먼저 강력한 브레이크를 건 주체가 다름 아닌 대중이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의 시청자는 TV가 주는 대로 수동적으로 받아먹지 않는다. 방송 직후 시청자들은 화면 속 면류관의 줄 개수를 세고, 대사의 상징성을 즉각적으로 파악해 팩트 체크에 나섰다. 나아가 반크와 같은 사이버 외교 사절단과 연대하여 조직적으로 항의하고, 글로벌 플랫폼을 통해 이 드라마가 잘못된 역사를 전파할 위험성을 경고했다. 이는 대중의 집단 지성이 능동적인 '문화 감시 권력'으로 진화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대중의 감시망이 팩트 체크에 대한 제작진의 직무유기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논란이 터진 후에야 부랴부랴 사과문을 올리고 영상을 덧칠하는 '사후약방문' 식의 미봉책이 반복되어서도 곤란하다. 시청자의 사후 검증에 기대기 전에, 제작 단계에서부터 치명적인 오류를 걸러내는 내부 장치가 선행돼야 하다.

이제 우리는 사과와 VOD 수정을 넘어 실질적인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제작사들은 역사 자문과 팩트 체크를 단순한 외주 작업이 아닌 필수 인프라로 인식해야 한다. 최태성 강사가 제안한 것처럼, 대본과 복장, 세트장 고증을 전문적으로 교차 검증할 수 있는 시스템 마련이 시급하다. 외형의 팽창 속도를 잠시 늦추더라도, 뼈대와 뿌리를 단단하게 다지는 기초 공사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때다. 그것이 전 세계 시청자를 마주하는 K-콘텐츠 창작자들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책임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칼럼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글쓴이(이인혜)는 12년차 대중문화 에디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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