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5·18 3년 뒤 해태 우승, "전라도 사람처럼" 기뻐한 이 미국인

전선정 2026. 5. 22.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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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원덕기: 고향 친구들 인터뷰] 좋아하던 노랫말처럼 "자신을 찾아 떠난" 팀 원버그..."일상에서 용기 보여줘"

5·18민주화운동 46주년 및 위르겐 힌츠페터 10주기를 맞아 다큐멘터리 영화 <내 이름은 원덕기>를 제작하기 위한 펀딩을 진행합니다. 엔딩 크레디트에 펀딩 참여자의 이름을 기재합니다. 대한민국, 그리고 광주를 사랑한 팀 원버그(한국 이름 원덕기)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에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펀딩 바로가기 https://omn.kr/2i36q <편집자말>

[전선정, 이진민, 소중한 기자]

 팀 원버그의 고향 친구 케빈 페어뱅크스가 지난 3월 3일 미국 미네소타 덜루스의 자택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팀 원버그의 사진을 내보이고 있다.
ⓒ 이희훈
"한 남자가 있었어. 그는 이렇게 말했지. 난 떠나야 돼. 나 자신을 찾아야 하거든. 내 인생을 찾아야 해. 아프리카든, 뉴욕이든, 리마(페루의 수도)든, 그런 데로 가야 해." - 재니스 조플린(27세에 요절한 미국 로커)의 <크라이 베이비> 라이브 버전 가사

이 노래를 가장 좋아했던 열여섯의 팀 원버그(Tim Warnberg, 만 25세에 5·18민주화운동 경험 후 1993년 작고)는 이 노래의 화자처럼 "나 자신과 내 인생을 찾기 위해" 어디로든 떠나고 싶었다. 대학을 막 졸업한 스물셋의 팀은 평생 터전으로 삼던 미국 미네소타를 떠나 한국으로 향했다.

한국 이름을 '원덕기'로 지은 그는 2년 뒤 1980년 5월 광주에서 "인생을 결정지은 순간"을 맞이했다. 그때 팀은 "자신이 목격한 부정의에 맞서 목소리를 내는" 것을 선택했고 "어른으로 성장"했다.

<크라이 베이비> 속 주인공의 바람처럼, 그는 먼 타국에서 평생 이고 갈 "나 자신과 내 인생"을 찾았다. 우연히 광주에 왔기에 가능했지만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팀은 자신이 마주한 현실과 맞섰기 때문이다. 그의 24년지기 고향 친구는 "분명 많은 사람들이 그 상황에서 등을 돌렸을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고 위르겐 힌츠페터가 5·18민주화운동 중인 1980년 5월 24일 촬영한 인터뷰 영상의 화면을 갈무리한 것. 영상 속 인물은 미국 평화봉사단원 자격으로 광주에 머물던 팀 원버그(한국 이름 원덕기)다. 5·18기념재단이 보관하고 있던 이 영상은 그 동안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으며, 항쟁 한복판에 있던 인물의 현장 인터뷰는 5·18 관련 기록물 중 이 영상이 유일하다.
ⓒ 위르겐 힌츠페터, 5·18기념재단 제공
케빈 페어뱅크스 (팀 원버그의 고향 친구)
"우리가 팀의 인터뷰 영상(5·18 당시 힌츠페터 촬영 - 기자 말)에서 봤던 것처럼, 그는 계엄군을 맞닥뜨린 후, 강제로 버스에서 하차당했을 때, 충분히 안전한 곳으로 피신했을 수도, 자신을 위험에 빠트리지 않기 위해 침묵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팀은 도망치지도,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한가운데로 뛰어들었습니다. 맞섰습니다. 한국을 떠난 뒤에도 계속 진실을 기록했습니다."

이 친구는 "노래 속 남자도 결국 깨닫는다. '내 삶'은 어딘가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맞닥뜨린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행동하는지에 따라 그저 이어지는 것이라고"라며 "팀이 참 좋아했던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어디서든 자신에게 번개처럼 몰아닥친 일들에 묵묵히 맞섰던 그가 더욱 생각난다"고 회상했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3월 3일, 바다처럼 넓은 호수로 둘러싸인 미국 미네소타주 서쪽 끝에 위치한 덜루스(Duluth)에서 팀의 동갑내기 친구 케빈 페어뱅크스(Kevin Fairbanks, 71)를 만났다. 그는 팀과 함께 청년 시절을 고향 미네소타에서 보낸 단짝으로 지금도 개 네 마리와 함께 미네소타에 살고 있다.
 팀 원버그의 고향 친구 케빈 페어뱅크스가 지난 3월 3일 미국 미네소타 덜루스의 자택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하던 중 고인이 된 친구를 떠올리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 소중한
경계 넘나들던 소년

열네 살 때 팀을 처음 알게 된 케빈은 가장 인상적이었던 그의 모습으로 "내가 학교에서 원주민 혈통이라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할 때마다 항상 나선 것"을 꼽았다.

"우리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운동부 소속이었던 팀의 친구가 원주민 혈통과 관련된 멸칭으로 저를 부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저를 '스콰(squaw, 북미 여성 원주민 혐오 표현)'라고 불렀는데, 팀은 그가 친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말 다시는 하지 마. 그냥 집에 가버려"라고 화를 냈습니다."

케빈은 10대 시절 팀을 두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고, 호기심이 많았다"라고도 말했다. 그는 "한 번은 캐나다에서 재니스 조플린의 공연이 열린대서, 화물열차에 뛰어오른 적이 있다"라며 "나는 좀 망설였는데, 팀은 전혀 그러지 않았다. 늘 '해보자', '같이 하자'고 말했다"라고 전했다.

취재진은 팀의 또 다른 고향 친구 로버트 그라찬(Robert Grotjohn, 71)도 지난 3월 24일 화상으로 인터뷰했다. 팀을 따라 1981년 처음 광주에 왔던 로버트는 2009~2020년 전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광주에서 긴 시간을 보냈다. 여전히 미네소타에 살고 있는 케빈이 팀의 소년 시절을 기억하고 있다면, 로버트는 그의 대학 시절과 광주에서의 삶을 추억하고 있는 친구다.

팀과 함께 미네소타대학교(모리스 캠퍼스)를 다녔던 로버트는 "팀은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reaching across boundaries)"이라며 "문화적 경계를 넘어 다양한 사람들과 친구가 되는 능력이 있었다"라고 강조했다.

로버트 그라찬 (팀의 고향 친구, 전남대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우리가 살던 미네소타의 작은 마을은 당시 백인 중심의 공동체였습니다. 그때 팀은 대학에서 육상 선수로 활동하며, 아프리카계 미국인 학생들과도 친해진 후, 일종의 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흑인 학생 공동체와 백인 학생 공동체 사이에 큰 간극이 있었을 때, 그는 흑인 학생들이 패션쇼를 연다며, 저를 비롯한 다른 백인 학생들에게도 그 패션쇼에 놀러 오라고 했습니다. 그 덕분에 저도 그들과 친해지게 됐는데, 그때는 매우 드문 일이었습니다."
 1968년 고등학생 시절 육상 대회에 나간 팀 원버그. 이때 그는 "하이(high) 허들과 로우(low) 허들 두 종목 모두 준우승을 차지해" 미네소타 주대회 출전 자격을 얻었다.
ⓒ 록산 원버그 윌슨 제공
대학교 3·4학년 시절 팀의 룸메이트이기도 했던 로버트는, 그와 밤마다 맥주를 마시며 역사와 정치 이야기를 하던 기억을 떠올리며 미소를 보이기도 했다. 로버트는 "팀은 정말 다양한 것들에 관심이 많았다"라며 "대학 시절에는 늦은 밤까지 맥주 한 병을 두고 세상의 문제들, 우리 자신의 문제들, 그리고 과제 같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라고 설명했다.

1981년~1984년까지 전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서 강사로 일한 로버트는 "그 일을 하게 된 것도 팀 덕분"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팀이 광주에서 영어를 가르칠 기회가 있다고 했다"며 "나도 물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지만, 팀이 들려준 한국 이야기들도 광주행에 한몫했다"라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팀이 광주항쟁에 대해 들려줬을 때,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까지 감수한 광주 시민들의 용기와 의지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라며 이렇게 말했다.

"팀은 1980년 여름 (잠시) 한국에서 미네소타로 돌아오고 난 후, 참혹했던 광주에서의 일에 대해 들려줬습니다. 팀은 광주 하숙집 근처 골목에서 한 군인이 노인을 무자비하게 때리는 장면을 목격했고, 그 군인이 팀에게 총을 겨누며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했다고 말했습니다. 또 전남도청 앞에서 택시 기사들이 군인들에게 돌진했던 감동적인 장면도 이야기해 줬습니다."
 팀 원버그의 고향 친구인 로버트 그라찬 전남대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가 지난 3월 24일 <오마이뉴스> 화상 인터뷰 도중 팀 원버그가 5·18 당시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와 인터뷰한 영상을 지켜보고 있다.
ⓒ 이진민
전라도 사람 '원덕기'

미국 평화봉사단원 자격으로 1978년 처음 광주를 찾아 의료 봉사를 하던 팀은 1980년 5·18을 경험한 뒤 의대 진학의 꿈을 접었다. 5·18 직후 잠시 출국했다 다시 한국행을 택한 그는 연세대 어학당에 입학했고 1986년 한국학 전공을 택해 하와이대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한국에 머물렀다.

팀을 따라 5·18 직후인 1981년 광주로 향한 로버트는 "팀은 정말로 전라도 사람이 돼 있었다"라며 "그는 자신과 전라도를 동일시했다"라고 짚었다. 특히 로버트는 팀과 한국에 머물며 막 출범한 프로야구 경기를 보러 다녔던 일화를 소개하며 미소를 내보이기도 했다. "우리는 한국 프로야구의 이정표들을 함께 보기도 했다"며 "해태 타이거즈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팀이었다. (후신인) 기아 타이거즈도 그만큼 잘하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팀과 저는 1982년 광주의 무등경기장에서 해태 타이거즈의 첫 홈경기를 봤습니다. 또 1983년 한국시리즈에서 해태 타이거즈의 첫 우승도 봤습니다. 당시에 김성한 선수(해태 타이거즈 창단 멤버이자 스타 플레이어)와 함께 술을 마신 적도 있습니다. 해태 타이거즈가 첫 우승을 했을 때 팀은 전라도 사람처럼 기뻐했습니다. 광주가 전국적인 무대에 설 수 있어서 더 기뻐했던 것 같습니다."
 지난 17일 광주 북구 광주기아챔피언스필드에 설치된 'V13' 조형물. 1983년 해태 타이거즈 시절 첫 우승 후 현재까지 기아 타이거즈는 12번 우승했고(한국 프로야구 최다), 이제 'V13'을 열망하고 있다.
ⓒ 소중한
로버트는 "팀이 전남대병원에 나를 데리고 가 5·18의 흔적 중 하나인 창문 총탄 자국을 보여주고, 이와 관련한 이야기를 들려줬다"는 점도 또렷이 기억했다. 또 팀과 부상 당한 시민과의 일화를 소개하며 "팀은 정말 지역 사회에 깊이 들어가 있었다"고 덧붙였다.
"한 번은 팀과 제가 광주 금남로를 걷고 있었는데, 길가에서 꽃을 팔던 한 남자가 우리를 불러 세워 팀을 가족 모임에 초대했습니다. 그 남자는 항쟁 초기에 팀이 진료소로 옮겨줬던 부상 당한 사람 중 한 명이었습니다. 이를 기억한 남자는 팀에게 '당신이 내 목숨을 구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인상적이었고 감동적이었습니다. 그 남자가 여전히 살아있었다는 점과 팀에게 그렇게까지 고마워하고 있었다는 점 때문입니다."

로버트는 "팀은 정말 광주를 사랑했다"라며 "처음 그 일(5·18)에 연루된 건 우연이었지만, 당시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의) 인터뷰에 응하고, 이후 5·18 논문을 집필하는 등 목소리를 낸 건 자신이 사랑한 도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세상에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5·18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 5월 19일, 들것에 실린 환자를 옮기는 미국 평화봉사단원 팀 원버그(체크무늬 셔츠)와 광주 시민들. 전일빌딩에 있던 나경택 당시 <전남매일> 사진기자가 건너편 YMCA 인근을 지나는 이들을 촬영했다.
ⓒ 나경택 제공
5·18로 그는 깊어졌다

취재진은 올해 초 고 위르겐 힌츠페터(2016년 작고)의 미공개 테이프(5·18기념재단 보관)에서 팀의 육성 인터뷰를 발견했고 케빈과 그라찬에게도 이를 보여줬다. 두 사람은 "그를 다시 보니 좋다"면서도 그의 증언에 담긴 참혹함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로버트는 "팀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정이 북받친다"라며 "그의 목소리에서 진실을 증언하겠다는 열정목격한 것에 대한 충격이 느껴진다"라고 말했다. 또 "광주 사람들을 향한 그의 연민과 존경이 느껴진다"라며 이렇게 말했다.

"그의 충격이 느껴집니다. 또 이 모든 상황에 분노하고 있다는 점도 그의 목소리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광주 사람들을 향한 연민과 존경도 느껴집니다. 광주 사람들이 도시를 어떻게 운영하고 있었는지를 설명할 때 말입니다(팀은 인터뷰에서 계엄군이 잠시 물러간 뒤 시민들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증언 - 기자 말). 저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가 (인터뷰에서 말한 것처럼) 이 시기에 사람들이 서로를 어떻게 돌봤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줬던 것을요."

로버트는 "한 사람이 이토록 거대하고 부당한 고통, 죽음을 목격하면 반드시 변할 수밖에 없다"며 "5·18로 인해 광주와 한국인들을 향한 팀의 헌신은 더욱 깊어졌다"라고 말했다. 특히 팀이 원래 목표였던 의대 진학 대신 한국학을 공부하기로 마음 먹은 것을 언급하며 "항쟁이 없었다면, 팀이 그토록 명확하고 확고하게 자신의 진로와 삶을 한국과 한국인들에게 연결시키지 않았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 평화봉사단 자격으로 한국에 머문 팀 원버그(맨 왼쪽)가 한국인 동료들과 식사하는 모습. (AI로 화질 개선)
ⓒ 록산 원버그 윌슨 제공
고인이 된 친구의 46년 전 인터뷰 영상을 본 케빈 또한 잔혹했던 국가폭력에 큰 충격을 받은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겨우 입을 뗀 그는 "정말 충격적"이라고 운을 뗐다. 케빈은 "팀은 정말 용감하디 용감했던 사람"이라며 "(학창 시절에도) 그는 항상 저를 위해 나서줬다. 그래서 팀이 한국 사람들을 위해 나섰다는 점이 한편으로 전혀 놀랍지 않다"고 말했다.

취재진은 케빈에게 팀의 이름이 곳곳에 새겨진 '외무부 기밀문건' 또한 내보였다. 팀은 평화봉사단 동료 데이비드 돌린저와 5·18 직후 서울로 이동해 또 다른 동료들에게 증언과 자료를 건넸고 이 자료를 받은 이들은 1980년 7월 스웨덴으로 건너 가 외신보도를 이끌었다. 이 때문에 신군부가 장악한 한국 정부의 반응은 마치 "폭탄"(제임스 메이어 당시 평화봉사단장의 표현)과 같았고 이러한 상황이 문서 곳곳에 남아 있다. 특히 한국 정부는 팀이 증언을 부인하도록 평화봉사단 본부 측을 압박하기도 했다.

케빈은 "46년 전 그런 식으로 행동한 한국 정부의 모습을 보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지만, 지금 우리 (미국) 정부도 그러고 있다"며 "역사를 다시 쓰려고 한다. 자신들이 들려주고 싶은 방식대로 역사를 바꾸려는 것이다. 정말 두렵고 무서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케빈이 살고 있는 미네소타는 올해 초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에 의한 국가폭력으로 1980년 5월 광주와 비슷한 참상을 겪었다. 케빈은 자신과 팀의 고향인 미네소타와 팀의 또 다른 고향인 광주를 연결 짓기도 했다.

"팀이 (광주에서의) 잔혹함을 직접 겪고 그 기억을 가진 채 집(미네소타)으로 돌아왔다니 마음이 아픕니다. 이런 일은 (올해 초 미네소타의) 미니애폴리스에서도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정부에 의해 살해당했죠. 우리는 실수와 역사를 통해 배워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네요."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 의해 국가폭력의 희생자가 된 광주 시민들(오른쪽)과 2026년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에 의해 연행되고 있는 미네소타 시민들.
ⓒ 5·18기념재단, 벤 루먼 제공
"영웅 아닌 용감한 시민들 속 한 명"

로버트 또한 참극에 맞선 미네소타의 연대와 46년 전 광주에서의 연대를 함께 이야기했다. 그는 "지난 1월 (미네소타에서 시민 2명이) 총격으로 피살된 이후 벌어진 아이스(ICE) 반대 시위나, 중동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에서도 1980년 광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이 뭉쳐 서로를 지지하는 모습이 그것"이라며 "이런 연대는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더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적인 용기를 갖고, 서로의 인간다움을 바라보며 함께할수록 세상은 더 나아질 것"이라며 "그것이 바로 팀이 보여준 길"이라고 짚었다.

"팀은 특별히 영웅처럼 용감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항쟁에 참여한 수많은 시민들 한가운데서 역시 용감히 행동했던 한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은 이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함께하기로 결정할 때 바뀝니다. 군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변화를 결정해야 바뀌는 것이 아니라요. 1980년에도, 지금 미네소타에서도 우리는 평범한 시민들이 함께할 때 얼마나 비범한 일을 해낼 수 있는지 보고 있습니다."
 한국에 머물던 팀 원버그의 모습.
ⓒ 록산 원버그 윌슨 제공
취재진은 두 사람에게 '팀에게 하고 싶은 말'을 청했다. 그러자 모두에게서 "친구가 돼줘 고맙다"는 말이 돌아왔다. 로버트는 "이렇게 말할 사람은 저만이 아닐 것이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그렇게 말할 것"이라며 "팀은 정말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줬다"라고 말했다. 더해 "(뿐만 아니라) 그가 많은 사람들의 삶을 건드렸던 것처럼, 광주도 팀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라고 덧붙였다.

다음은 항쟁을 겪은 이후, 미국 하와이대학교 대학원의 한국학 석·박사과정에 입학했지만, 끝내 박사학위를 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팀의 유별난 한국 사랑에 대한 로버트의 설명이다.

"팀은 한국, 그리고 한국인들과 함께해야 한다고 결심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팀이 세상을 떠났을 때 한국이 그들의 문화와 민주주의를 세계에 알리고 이를 지지할 아주 중요한 사람을 잃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제 추측이지만, 그의 미래는 한국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랑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동료 시민들을 향한 사랑 말입니다."

<내 이름은 원덕기> 제작을 위한 펀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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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소중한 취재 소중한·전선정·김화빈·이진민·유지영
촬영 강상우·이희훈 편집 콘텐츠팜 호미 CG·타이틀 아모리
펀딩 기획 장유정·이기종·봉주영
영상 제공 5·18기념재단·루먼 형제(Ben&Sam Luhmann)
영상 번역 자문 로버트 그라찬
사진·자료 제공 고진석·나경택·서나래·유경남·변재원·안영주·록산 원버그 윌슨·데이비드 돌린저·폴 코트라이트·캐롤린 투르비필·케빈 페어뱅크스·로버트 그라찬·5·18기념재단·5·18민주화운동기록관·외교사료관·박지원 의원실
촬영 협조 5·18기념재단·5·18민주화운동기록관·전남대병원·전일빌딩245·국가보훈부·별밭·필로스팅하우스
제작 지원 광주광역시·광주광역시 동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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