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최초 기록자는 독일인이 아닌 한국인이었다
[김정호 기자]
[기사 수정 : 22일 오후 3시 17분]
스타벅스 '탱크데이 이벤트'를 둘러싼 논란이 이어진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을 폄훼하고 그 가치를 훼손하려는 시도가 계속 이어진다는 방증이다. 급기야 이재명 대통령이 "5·18 북한군 개입설 등 가짜 뉴스를 강력히 응징"하고, 역사 왜곡 독버섯의 뿌리 뽑겠다고 공개 천명하기에 이르렀다. 역사를 부정하는 세태에 경종을 울리는 의미에서 5.18 광주를 바깥세상에 알린 한국인 영상 기자를 소개한다.
1980년 5월 광주의 참상을 서방에 최초로 타전한 사람은 독일 제1공영방송(ARD) 소속 특파원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로 알려져 왔다. '푸른 눈의 목격자' 위르겐 힌츠페터는 영화 <택시운전사>를 통해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처음 영상에 담은 외신 기자로 대중에게 각인되었다. 그런데 최근 발굴된 사료와 그 검증 과정을 통해 지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수정할 필요가 생겼다. 독일인 힌츠페터 기자보다 앞서 광주에 들어가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력과 그동안 군이 조직적으로 부인해 온 '착검'의 진실을 제일 먼저 카메라에 담은 기자가 있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미국 CBS 서울지국의 유영길 영상 기자다.
유영길 기자의 광주 도착과 최초 촬영의 증거 '동구청 상황일지'
광주 항쟁은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10일간 진행되었다. 특별히 주목할 기간은 발단이 된 5월 18일 일요일부터 도청 앞 발포가 있었던 5월 21일 수요일까지 나흘이다.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휴교령 소식이 전해지자 전남대학교 재학생들이 5월 18일 오전 일찍부터 학교 정문에 모여서 시위를 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날 새벽 제7공수여단이 미리 전남대와 조선대에 투입된 터라 전남대 정문 앞에서는 오전 10시경 바로 진압에 돌입했다. 뿔뿔이 흩어진 전남대 학생들은 시내 중심가인 금남로에 집결했고 다른 대학 학생들과 청년들이 합세했다. 오후 4시경부터 금남로에 투입된 제7공수여단 병력들은 청년으로 보이는 사람은 남녀를 불문하고 진압봉과 소총 개머리판으로 무차별 구타하고 대검으로 찌르는 등 잔인한 진압을 이어갔다.
둘째 날인 5월 19일 월요일 새벽 1시경 제11공수여단 병력이 광주에 도착했다. 일요일에 있었던 시위에서 계엄군의 잔혹함을 목격한 시민들이 오전 9시경부터 시내로 몰려들었다. 시민들의 가세로 시위 규모는 훨씬 더 커졌다. 가톨릭센터 앞에 2000여 명, 충장로 일대에 2000여 명의 시위대가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공수부대원들에게 격렬하게 저항했다. 한편, 공수부대원들은 금남로 양쪽에서 시위대를 포위하고 안쪽으로 몰아넣으며 잔인하게 진압했다. 이날 오후 청각장애인이었던 구두 수선공 김경철(당시 27세)씨는 시위를 구경하다가 공수부대원에게 붙잡혀 온몸을 구타당해 다음날 새벽 국군통합병원에서 숨졌다. 최초의 희생자였다.
|
|
| ▲ 1980년 5월 19일 광주 동구청 상황일지 오전 10시 25분 미국 CBS 기자 3명이 촬영기 마이크 휴대하고 상공회의소 옥상으로 대기 |
| ⓒ 5.18재단 |
유영길 기자가 5월 19일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촬영한 6분 30초 분량의 원본 영상은 광주 항쟁의 초기 전개 상황을 정밀하게 타임라인 순으로 기록하고 있다.
▲ 오전 10:00~10:20 (금남로 거리) : 차량 통제 직전의 긴박한 거리 상황과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대를 추격하는 과정을 지상에서 촬영했다. 계엄군이 이때부터 착검하고 있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 오전 10:25~10:35 (광주상공회의소 5층 옥상) : 금남로 일대의 시민들이 군 병력이 배치되는 것을 지켜보는 긴장된 순간을 기록했다.
|
|
| ▲ 1980년 5월 19일, 광주상공회의소 건물 5월 19일 오전, 유영길 기자가 계엄군과 시위대의 출동을 촬영한 장소는 광주상공회의소 5층 옥상이었다. |
| ⓒ 5.18재단 |
|
|
| ▲ 광주 항쟁을 처음으로 보도한 1980년 5월 19일 CBS EVENING NEWS 5월 19일 CBS Evening News의 광주 항쟁 관련 보도 첫 화면. 유영길 기자가 5월 19일에 촬영한 영상을 토대로 한 보도였다. |
| ⓒ CBS |
| ▲ CBS Evening News 19 May 1980 Bruce Dunnings report on the start of the1980 Kwangju Uprising 광주 항쟁 두 번째 날인 5월 19일의 상황을 보도한 CBS Evening News다. 영상은 유영길 기자가 촬영한 것이고, 전화로 상황을 설명하는 사람은 도쿄 특파원 브루스 더닝이다. ⓒ MUKSRH Research |
|
|
| ▲ 계엄군과 투석전을 벌이는 광주 시민들 광주 시민들이 공수부대원을 향해 돌을 던지고 있다. 5월 19일 오전 10시 50분 상황으로 CBS Evening News에 포함된 장면이다. |
| ⓒ CBS |
5월 21일 저녁 서울로 돌아왔는데 영상을 본국으로 보내기 위해 바로 도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검문을 피하고자 신라호텔에서 팔던 로열 단스크 버터 쿠키 통을 구해 필름을 넣고, 일부러 일등석도 이용했다. 나리타 공항에는 도쿄 지국의 다른 기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필름은 대기하던 기자 편에 바로 독일 본사에 전달되었다. 힌츠페터 기자가 촬영한 영상은 5월 22일, 북부독일방송 저녁 8시 뉴스에서 전파를 탔다. 후속 보도가 한 차례 나왔고, 1980년 9월에는 힌츠페터 기자의 영상을 종합한 다큐멘터리가 <기로에 선 한국(Südkorea am Scheideweg)>이란 제목으로 방송되었다.
정리하면 유영길 기자의 영상은 5월 19일 오전부터, 힌츠페터 기자의 영상은 5월 20일 늦은 오후부터 촬영되었다. 신군부는 5월 19일 오후에 제11공수여단 병력을, 5월 20일 새벽에 제3공수여단 병력을 각각 증파했다. 공수부대원들의 만행을 똑똑히 목격한 광주 시민들이 대거 시위에 참가하면서 진압에 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시위대의 규모가 적었던 5월 19일에는 수적 우세가 있던 공수부대원이 더욱 잔인하게 학생과 시민들을 진압했다. 그 장면은 유영길 기자의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다. 힌츠페터 기자가 하루 뒤에 도착했을 때는 진압 군 병력을 압도할 만큼 시위대의 규모가 커져 있었다.
유영길과 힌츠페터: 영상 저널리즘의 결정적 차이
유영길 기자의 영상과 힌츠페터 기자의 영상은 다음 4가지 측면에서 구별된다.
첫째, 보도의 신속성과 매체의 특성이다. 유영길 기자는 당시 최첨단 장비였던 컬러 ENG(Electronic News Gathering) 카메라를 사용했다. ENG는 필름 현상 과정 없이 전자 신호로 기록되기에 빠른 송고가 가능했다. 덕분에 유 기자의 영상은 미국 현지 시각 5월 19일 저녁(한국 시각 20일 오전) CBS EVENING NEWS를 통해 전 세계에 최초로 보도될 수 있었다. 반면 힌츠페터 기자는 16mm 컬러 필름 카메라를 사용했기에 일본으로 건너가 현상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래서 5월 22일에야 독일 ARD 뉴스에 방영될 수 있었다.
둘째, 사건의 국면과 기록의 관점이다. 힌츠페터의 영상은 주로 계엄군의 폭력 이후 발생한 시민들의 피해 상황, 시신 안치 모습, 그리고 시민들의 결속과 저항에 집중되어 있다. 반면 유영길 기자의 영상은 계엄군이 광주 시내로 진입하여 폭력을 시작하는 초동 진압 과정을 포착했다. 이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의 발단이 '악성 유언비어' 때문이 아니라 계엄군의 초기 강경 진압에 있었음을 입증하는 근거가 된다.
|
|
| ▲ 착검한 계엄군 유영길 기자의 영상은 광주 항쟁 초기인 5월 19일부터 공수부대원들이 착검한 M-16 소총을 소지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
| ⓒ CBS |
'광주 비디오'의 뿌리와 유영길 기자의 유산
1980년대, 해외에서 역수입되어 광주 항쟁을 경험하지 못한 시민들에게 진실을 보여준 이른바 '광주 비디오'의 핵심 재료는 유영길 기자의 영상이었다. 특히 천주교 광주 정평위가 제작한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1987) 등 다양한 지하 비디오들은 유 기자의 CBS 보도 영상을 이용해 제작되었다.
한편, 유영길 기자는 평생 한(恨)을 품고 살았다. 5월 21일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의 순간을 카메라에 담지 못했다는 자책이었다. 무거운 카메라 배터리를 들어주던 시민과 혼란 중에 헤어지는 바람에 여분의 배터리를 구하러 장성으로 가야만 했다. 외부와의 통신이 다 두절되고 장성우체국에만 회선이 살아있었다. 기사 송고를 위해 기자들은 다 그곳에 모여 있었다. 유 기자 광주를 비운 사이에 비극적인 발포가 일어났다. 그는 훗날 영화 <꽃잎>을 통해 당시의 참상을 스크린에 재현했는데, 끝까지 현장을 지키지 못한 자신이 "허구로 그날을 다시 찍는다"며 회한을 드러냈다.
기억해야 할 이름, 유영길
1980년 5월, 외부 세계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광주의 상황을 전 세계에 최초로 알린 영상 보도의 영광은 독일인 힌츠페터 기자의 몫이었다. 한국 기자들은 일신의 안위를 위해 광주의 참상을 외면하거나 권력의 보도 통제에 침묵했다고 비판받아 왔다. 하지만 광주 항쟁 최초 영상 기록자의 타이틀은 이제 유영길 기자에게 돌려주어야 마땅하다. 그날 광주에는 외국인이 아닌 한국인 기자가 누구보다 먼저 비극의 현장을 카메라에 담았다.
유영길 기자의 공적은 오랫동안 힌츠페터라는 거대한 상징 뒤에 가려져 있었다. 그런데 힌츠페터 기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힌츠페터 국제보도상이 그를 과거로부터 소환했다. 유 기자는 2021년 제1회 힌츠페터 국제보도상 '오월광주상' 수상자로 선정되면서, 41년 만에 광주의 진실을 세계에 알린 '최초의 영상 기자'로 공식 인정받았다.
심사위원회는 "유영길 기자는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었다. 그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우리 역사의 가장 아픈 비극을 가장 먼저 기록한 용기 있는 저널리스트였으며, 그가 남긴 6분 30초의 영상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어떤 기록의 투쟁 위에 세워졌는지를 보여주는 영원한 유산이다"라고 평가했다.
이제 우리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첫 목격자로 힌츠페터와 함께 유영길이라는 이름을 나란히 기억해야 한다. 그의 카메라 렌즈가 포착한 것은 단순한 사건의 기록이 아니라, 결코 덮을 수 없는 역사의 정의이자 우리 민주주의의 뿌리였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딴지일보에도 실립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특집] 5·18 3년 뒤 해태 우승, "전라도 사람처럼" 기뻐한 이 미국인
- 항쟁의 한복판에서 안식처 제공한 사찰... 두 스님의 간절한 호소
- 전세사기 뉴스에 술렁인 세입자 단톡방...결국 HUG에 '트럭'을 보냈다
- 당당한 홍장원 "아무리 생각해도 걱정시켜 드릴 일 안 했다"
- 배달의민족 주인이 바뀐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 "탱크는 액체 담는 용기"·"보수 아지트"... 국힘 의원들의 황당한 스벅 옹호
- 유가족 상처만 더 키운, 앞뒤 안 맞는 아리셀 항소심 판결
- [오마이뉴스·STI 예측] 경기 추미애 51.5% - 양향자 26.8%
- 전쟁은 끝내고 싶고 성과는 얻고 싶고... 제 욕심에 발목 잡힌 트럼프
- [오마이포토2026] 오세훈 "정원오 당선되면 '박원순 시즌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