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욱의 가장자리 읽기] 레테 강, 망각과 기억

2026. 5. 21.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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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욱 서강대 철학과 교수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아이가 태어나던 날 새벽부터 병원 로비를 서성이고 있었다. 여름의 분노를 이긴 10월의 아침은 부드러웠다. 오로지 순한 햇살을 감상하기 위한 극장처럼 창문은 환했고 실내는 중력을 이긴 것처럼 모든 것이 가벼워 보였다. 간호사가 와서 말했다. 지금 태어났다고. 간호사는 작은 플라스틱 캡슐 같은 아기 침상을 밀고 와서 보여줬다. 막 물에서 건져 올린 것처럼 머리가 다 젖은 아기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안녕, 내가 아빠야. 양수의 강을 건너온 아기는 그야말로 막 물에서 나온 조난자였다. 인간은 이런 식으로 ‘레테 강’을 건너 익사 직전 이승의 강변에 겨우 기어오르고, 그날 강변에 나온 사람들은 이 생명을 줍고서 별 준비도 없이 부모가 된다. 신생아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인 것은 과도한 음주 뒤에 깨어난 술꾼이 필름이 끊긴 전날을 기억하지 못하듯, 망각의 강 레테의 물을 너무 많이 마신 까닭이다. 삶의 시작이란 과음 뒤에 깨어난 어떤 아침이다. 아이는 숙취 때문에 생일날부터 운다. 그리고 아기는 자식이 되기 위해, 부모는 부모가 되기 위해 평생의 긴 공부를 시작한다.

「 인간은 전생 망각한 채 태어나
진리란 과거의 앎, 기억하는 것
죄는 뉘우친 후에 잊을 수 있어
망각 거스른 참된 인식이 정의

김지윤 기자

플라톤이 『국가』 마지막에서 이야기하는 레테 강은 저승에 흐르는 망각의 강이다. 아멜레스 강이라고도 부르는 이 강의 물을 마신 영혼은 자기가 배운 것들을 망각한 채 현세로 환생한다. 그러므로 진리를 인식한다는 것은 이 망각으로부터 기억을 되찾는 일이다. ‘진리’를 고대 그리스인들은 ‘알레테이아(aletheia)’라 불렀는데,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는 이 단어를 레테(lethe)에 부정 접두사(a-)가 첨가된 것으로 이해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참된 앎, 진리란 망각(레테)에 맞서 기억을 되찾음으로써 얻어진다는 것이다.

인간은 늦게 배우는 자
‘참된 것을 배운다는 것’은 곧 ‘기억해내는 것’이라는 사상은 고대의 낡은 생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소중히 계승된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잘 보여주듯 말이다. 이 작품에서 반복되는 주제는, 주인공은 뭔가를 경험할 당시에는 그 의미를 모르고, 나중에 기억해냈을 때에야 깨닫는다는 것이다. 사실 모두가 그렇지 않은가? 사람은 나이가 들어 젊었던 시절을 떠올릴 때 후회하거나 안도의 숨을 쉰다. ‘그때 그런 선택을 해서는 안 되었어’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정말 다행이야.’ 이렇게 마음속으로 말하면서 말이다. 인생의 갈림길에서의 중요한 선택은 그 선택을 할 당시에는 잘했는지 못했는지 모른다. 나중에 상기했을 때에야 비로소 안다. 어렸을 때 공포스럽게 바라보던 부모의 부부 싸움 같은 것은 어떤가? 당시에는 그저 무섭고 슬플 뿐이었지만, 커서 회상했을 때야 그 싸움의 사정을 이해하게 된다. 그렇다면, 배운다는 것은 잊어버렸던 것을 기억해내는 일이지 새로운 것을 습득하는 일이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제니바의 다음과 같은 플라톤적인 말은 흥미롭다. “한번 만난 것은 잊지 못하는 거다. 다만 기억해내지 못하는 것뿐이지.” 인간은 어리석어서 망각했다가 뒤늦게야 기억하는 자, 늦게 배우는 자인 것이다.

그러나 망각과 기억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 위해선 플라톤 이후 레테 강의 운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플라톤이 말한 이 그리스의 강 레테는 놀랍게도 기독교의 저승에도 흐른다. 그리스 고전과 기독교를 마구 뒤섞어 레테 강의 족보를 훼손한 죄는 시인 단테에게 있다. 단테의 『신곡』은 지옥과 연옥과 천국에 대한 기록이지만, 기독교에 충실한 작품이라 하기 어렵다. 오히려 이것은 자유로운 판타지이다. 이교도 문학, 즉 그리스 문학의 위대함을 떨쳐내지 못한 이 기독교도의 작품 『신곡』이 그리는 저승에는 미노타우로스와 켄타우로스 같은 그리스 괴물들, 이아손이나 오디세우스 같은 그리스 신화의 인물들이 들끓고 있다. 유명한 게임 ‘진 여신전생’에 동서양의 요괴들이 족보 없이 잡탕으로 출몰하는 것과 같은 격이다. 그래서 ‘연옥편’의 마지막에 가면 우리는 그리스의 저승에서 옮겨온 레테 강마저 만나게 된다.

연옥의 끝자락에 레테가 흐르는데, 단테의 특이함은 이 망각의 강을 ‘도덕적 관점’에서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너는 이 웅덩이 밖에서 레테를 보리라./ 회개한 죄과가 씻기는 날에/ 영혼들이 몸을 씻으러 가는 바로 그곳을.”(한형곤 역) 레테는 ‘죄의 기억’을 씻어내는 망각의 강인 것이다. 그러나 먼저 죗값을 치르고 뉘우쳐야지만 이 망각의 강물을 마실 수 있다. 잘못을 뉘우치지도 않고 그저 망각하려 한다면 하느님의 율법은 깨어지고 만다. “눈물을 흘리는 뉘우침의 어떤 대가를/ 치르지 않고 레테를 건너고/ 그리고 그러한 물을 맛본다면/ 하느님의 지고한 율법이 깨어질 것이오.”

독일인의 망각 비판한 제발트
인간은 과오를 함부로 잊어서는 안 된다. 레테의 축복인 망각은 죄지은 인간이 받기엔 과분한 선물인 것이다. 사실 도덕적 관점에서 인간의 역사란, 허락되어선 안 되는 망각의 강 레테로부터 기억을 되돌리려는 싸움이다. 가령 20세기에 독일이 일으킨 전쟁 및 학살과 싸워온 작가 제발트는 바로 이러한 점, 망각으로부터 기억을 깨워내는 일은 도덕적 의무라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가 쓴 『이민자들』의 한 구절이다. “나를 에워싸고 있는 독일인들의 정신적 빈곤과 기억상실, 그리고 과거의 흔적을 철저히 지워버린 그들의 교묘함으로 인해 내 머리와 신경이 공격받고 있다는 사실을 점점 더 또렷하게 의식할 수 있었다.”(이재영 역)

어디 독일의 경우뿐이겠는가? 죄 많은 현대사를 가진 우리에게도 기억을 일깨우는 것은 도덕적인 일이다. 고대 이래 레테를 건너온 인간은 망각을 거슬러 참된 인식을 얻고자 했는데, 이 참된 인식이란 결국 ‘정의’를 아는 것이다.

서동욱 서강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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