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지 마, 놔버려”…칸도 동감한 명대사

나원정 2026. 5. 21.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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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도라’로 제79회 칸국제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된 정주리 감독이 17일(현지 시간) 첫 상영이 열린 프랑스 칸 크루아제트 극장에서 객석에 앉고 있다. [뉴스1]

10대 여성 캐릭터의 욕망과 광기를 이토록 노골적으로 드러낸 한국영화가 있었던가. 한국 작가주의 영화의 차세대 주자로 꼽히는 정주리(46) 감독의 세 번째 장편 ‘도라’가 17일(현지시간) 제79회 칸국제영화제 감독주간에서 공개됐다. 상영 후 7분간 쏟아진 기립박수 속에 주연 배우 김도연(27, 걸그룹 아이오아이 멤버)과 일본 연기파 스타 안도 사쿠라(40)의 뜨거운 포옹도 주목받았다. 정 감독과 안도 사쿠라를 19일 영화제가 한창인 프랑스 칸 해변의 영화진흥위원회 홍보관에서 만났다. 김도연은 이달 열리는 아이오아이 콘서트 준비를 위해 먼저 귀국했다.

정 감독은 아동 폭력을 다룬 데뷔작 ‘도희야’가 2014년 칸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된 데 이어, 2022년엔 현장실습 고교생의 사망사건을 그린 ‘다음 소희’가 비평가주간 폐막작에 선정된 바 있다. 한국 여성 감독의 장편 3편이 칸에 초청된 건 정 감독이 처음이다.

정 감독은 “이 영화가 완성된 지 불과 열흘 됐다. ‘도라’를 보고 늘 내가 외로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생각했다”면서 “관객들이 진심으로 잘 봤다고 해주셔서 고맙고 용기가 났다”고 소감을 밝혔다.

‘도라’는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치료에 실패한 환자 사례로 기록한 연구서 『도라의 히스테리 분석』(1905)을 현대 한국 무대로 옮겨온 작품이다. 원인 모를 피부병을 앓던 18살 도라(김도연)는 시골 별장에서 요양하며 스스로의 욕망에 눈뜬다. 도라는 아버지(최원영)와 가까운 이웃 화가 연수(송새벽), 그의 일본인 아내 나미(안도 사쿠라)와 관계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봉준호·이창동·연상호 등을 칸에 소개한 감독주간 측은 ‘도라’가 “1900년 프로이트의 사례 연구를 매우 자유롭고 동시대적으로 각색했다” 평가했다.

‘도라’ 해외 포스터. [사진 레드피터]

정 감독이 “중년 남성 의사 프로이트의 시선이 아닌 도라의 입장에서 그 이야기를 내 방식대로 끝내보고 싶었다”고 마음먹고 만든 ‘도라’에는 성적인 긴장감이 가득하다. 2019년부터 영화화를 시도했지만, 투자가 불발됐다.

안도 사쿠라가 합류한 건 ‘다음 소희’를 마치고 나서다. ‘다음 소희’가 칸 상영 후 프랑스에서 개봉해 호평받으며 차기작인 ‘도라’도 다국적 투자 기회를 얻었다. 결과적으로 ‘도라’는 한국·프랑스·룩셈부르크·일본 4개국 공동제작 프로젝트가 됐다. 당시 시나리오를 재정비하며 나미 캐릭터가 가장 크게 바뀌었다. 나미의 공허함, 속을 알기 어려운 면을 보여주기 위해 아예 외국인 설정으로 바꾸었다.

배우 안도 사쿠라가 17일 ‘도라’ 상영 전 무대 인사를 하고 있다. [뉴스1]

안도 사쿠라는 밑바닥 권투선수(‘백엔의 사랑’)부터 소매치기 엄마(‘어느 가족’)까지 연기 반경을 넓혀온 배우다. 감정 표현도 깊다. 한국영화는 ‘도라’가 처음이지만, 재일교포 양영희 감독이 오빠를 북한에 송환당한 자전적 가족사를 그린 일본 영화 ‘가족의 나라’(2012)에서 주인공 리애 역을 빼어나게 소화하기도 했다.

그런 그도 처음엔 ‘도라’를 거절했다. 성적 묘사 수위, 방대한 한국말 대사 탓이다. 최대한 그에게 캐릭터를 맞춰가겠다는 정 감독의 편지가 그의 마음을 돌렸다. 안도 사쿠라는 유방암 수술 후 고독감과 증오, 자유로움을 오가는 나미 캐릭터에 대해 “자연과 조화하는 인물이라고만 상상했다. 중요한 부분만 집중해서 연기하면 그 이후에 나오는 나미의 이질적인 면모는 자연스럽게 따라올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나미가 바다에 몸을 내맡긴 듯 편안한 얼굴로 도라에게 “괜찮아. 안 죽어. 버티지 말고 놔 버리면, 봐. 떠오른다”고 전하는 한국말 명대사가 그렇게 탄생했다.

유방암 수술로 한쪽 가슴이 절제되는 등 재난과 회복을 오가는 여성의 몸을 눈부신 바다, 자연의 신록과 어울려낸 영상미는 프랑스 여성 촬영감독 이리나 룹찬스키의 솜씨다. 정 감독은 “도라와 나미의 정사신은 뭔가 기념비적으로 만들어놓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면서 “여성 감독으로서 제대로 만들지 않으면 ‘다음’은 없다는 각오로 임했다”고 말했다.

정 감독은 ‘도라’ 엔딩 크레디트에 지난해 세상을 떠난 배우 고(故) 김새론(‘도희야’ 주연)의 이름도 추모의 의미로 새겼다. 정 감독은 “우리 영화계와 사회가 끝내 그녀를 잃어버려서 너무나 아프다”면서 이어 “(‘도라’에서) 어린 세대가 어떻게든 살아남고 기어이 회복했으면 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프랑스 칸=나원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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