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잇에서 피켓으로... 강남역 10번 출구가 다시 증명한 것

서울여성회 2026. 5. 20.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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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개 단체 결집, 10년 추모 넘어 행동 선언, 여성폭력 해결 의지 한목소리

[서울여성회]

▲ 강남역 10번출구 앞에 붙은 "살아남은 우리가 세상을 바꾼다" 강남역 10번출구 앞에 수백개의 추모 포스트잇과 함께 "살아남은 우리가 세상을 바꾼다"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 서울여성회
2026년 5월 17일 오후, 서울 지하철 강남역 10번 출구 앞은 또다시 수백 개의 포스트잇으로 가득 찼다. 10년 전인 2016년 5월 17일, 인근 공용 화장실에서 한 여성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무참히 살해당했던 그날로부터 정확히 10년이 흐른 날이다.
10년 전, 여성폭력에 대한 국가 통계조차 부재한 현실 속에서 강력범죄 중 하나로 묻힐 뻔했던 이 사건을 대한민국 사회의 흐름을 바꾼 거대한 '정치적 사건'으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평범한 여성들의 추모와 행동이었다. 그리고 10주기를 맞이한 지난 5월 17일, 강남역 광장에 모인 여성들은 더 이상 추모에만 머무르지 않겠다는 단단한 의지를 온몸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10주기 추모행동 참여자들의 모습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10주기 추모행동이 진행되는 강남역 10번출구 앞 도로에서 500여 명의 참여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서울여성회
전국을 돌고 모인 연대의 힘... 강남역에서 폭발하다

이날 현장은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10주기 추모행동인 동시에 지난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부터 시작된 젠더폭력해결페미니스트연대의 '3.8에서 5.17까지 여성폭력 해결을 위한 집중행동'의 피날레였다.

서울을 비롯해 경기, 강원, 대구, 전남, 제주 등 전국 각지에서 총 20회에 걸쳐 진행된 '전국 순회 여성폭력 다이인' 및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10주기 릴레이 토론회'를 이끈 주역들이 마침내 강남역으로 집결한 것이다.

특히 이번 10주기를 맞아 진행된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10주기, 추모를 딛고 행동하는 여성선언'에는 무려 6765명의 시민이 동참하며, 10년이 지나도 사그라지지 않는 강력한 연대의 의지를 증명했다.
▲ 강남역 10번출구에 추모 포스트잇을 붙이는 장면 한 시민이 강남역 10번출구에 "나에게 강남역이란 우리가 다시 쓰는 역사이다"가 적힌 추모 포스트잇을 붙이고 있다.
ⓒ 서울여성회
행사 시작 전부터 강남역 10번 출구 벽면은 시민들이 직접 쓴 포스트잇으로 빠르게 채워졌다. 포스트잇의 문구는 "강남역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문구부터 강남역의 의미를 되새기는 "나에게 강남역이란 OOO이다"와 "살아남은 우리가 세상을 바꾼다"는 다짐까지 다양했다.

안티페미니즘 단체의 맞불 집회나 무분별한 불법 촬영 등 지난 수년간 이어져 온 백래시의 위협이 여전한 상황이었지만, 현장의 분위기는 위축되기보다 오히려 안전하고 체계적이었다. 주최 측인 '젠더폭력해결페미니스트연대'는 참가자들의 안전을 위해 마스크를 배포하고 안전 스태프를 촘촘히 배치했다.

특히 현장 참여자들은 주최 측이 제시한 '모두의 안전과 평등을 위한 약속' 가이드라인에 따라 서로의 나이나 직책에 상관없이 상호 존댓말을 사용하고, 촬영 시 타인의 얼굴이 노출되지 않도록 배려하는 등 성숙하고 평등한 광장 문화를 직접 만들어냈다.

10년 전의 각성, "여자라서 죽었다",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
▲ 강남역 10번출구 앞에 붙은 "여자라 살해당했다" 포스트잇 2016년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발생 당시, 강남역 10번출구에 "여자라 살해당했다" 포스트잇이 붙어있었다. ⓒ 서울자치신문 강남역 10번출구 앞에 붙은 "여자라 살해당했다" 포스트잇 2016년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발생 당시, 강남역 10번출구에 "여자라 살해당했다" 포스트잇이 붙어있었다.
ⓒ 서울자치신문
이날 오후 2시,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10주기 추모행동 '강남역! 다시! 추모를 딛고 행동하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발언대에서는 10년 전의 '각성'과 오늘날의 현실을 잇는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강남역 사건 당시 대표 구호였던 "여자라서 죽었다",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다"는 문장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광장을 관통하는 핵심 화두였다.

여는 발언에 나선 박지아 젠더폭력해결페미니스트연대 공동대표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슬픔이 묻어났다. 박 공동대표는 "강남역으로부터 10년이 지나는 동안 우리에게는 기억해야 할 장소가 늘어났다"며 신당역, 인하대, 진주, 부산, 남양주, 대구, 광주 등 지난 10년 동안 끊이지 않은 여성폭력의 잔혹한 역사를 짚었다.

그는 "2026년 치안 1위라는 대한민국에서 여성들은 여전히 매일 전쟁 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다"고 규탄했다. 이어 박 공동대표는 "우리는 서로에게 가장 큰 용기와 힘이 되는 존재"라며 "여성폭력과 젠더폭력에 분노하고 변화를 만들고자 하는 바로 우리를 믿고, 서로를 지키며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고 힘주어 외쳤다.
▲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10주기 추모행동 <강남역! 다시! 추모를 딛고 행동하라!> 여는 발언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10주기 추모행동 <강남역! 다시! 추모를 딛고 행동하라!>에서 젠더폭력해결페미니스트연대 박지아 공동대표가 여는발언을 하고 있다.
ⓒ 서울여성회
당시 수사기관과 재판부는 '여성혐오 범죄'라는 본질을 부정했고, 언론은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하며 구조적 문제를 지우려 했다. 이에 맞서 발언대에 선 민선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는 10년 전의 기억을 소환했다.

그는 "저마다의 경험을 끄집어내고 일상에서, 일터에서 겪어온 숱한 차별과 폭력이 결코 개별적인 게 아니라 여성이라는 이유로 이 사회에서 겪는 보편적인 문제임을 확인했던 시간이었다"며 강남역 사건이 성차별 사회가 만든 폭력의 표적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한 '뼈아픈 자각'이었음을 리마인드했다.

이날 광장에서는 지역, 학내, 일터, 시민사회, 정당을 망라한 각계각층의 연대 발언이 이어지며 '강남역'이 오늘날 여성들의 일상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했다.
▲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10주기 추모행동 <강남역! 다시! 추모를 딛고 행동하라!> 발언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10주기 추모행동 <강남역! 다시! 추모를 딛고 행동하라!>에서 페미위키 시카 대표가 발언을 하고 있다.
ⓒ 서울여성회
가장 먼저 시민사회단체의 결연한 발언이 이어졌다. 한국여성의전화 도경은 활동가, 인권운동사랑방 민선 활동가, 서대문은평시민연대 김황경산 사무국장, 한국성폭력상담소 유랑 활동가, 정의기억연대 도담 활동가, 여성환경연대 안현진 활동가, 페미위키 시카 대표는 지난 10년간 무수한 백래시에 맞서온 연대의 역사를 짚었다.
▲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10주기 추모행동 <강남역! 다시! 추모를 딛고 행동하라!> 발언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10주기 추모행동 <강남역! 다시! 추모를 딛고 행동하라!>에서 목포여성의전화 김영란 공동대표가 발언을 하고 있다.
ⓒ 서울여성회
이어 지역과 대학가에서 연대 발언이 이어졌다. 목포여성의전화 김영란 공동대표, 경기페미행동 임소연 활동가를 비롯해 최근 발생한 광주 여성살해사건을 기억하고자 나선 광주여자대학교 페미니즘 동아리 '파동', 서울여성회 페미니스트 대학생 연합동아리(서페대연) 강나연 운영위원이 발언대에 올라 평등한 일상을 향한 청년·지역 여성들의 의지를 전했다.

이어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김지연 부위원장, 공공운수노조 이윤희 부위원장 등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일터 내 안전과 젠더 평등을 요구하며 힘을 보탰다.

마지막으로 정당의 발언이 이어졌다. 노동당 서울시당 윤정현 부위원장, 기본소득당 윤원정 여성본부장, 녹색당 김지윤 대외협력국장, 더불어민주당 김한나 서울시당 여성위원장, 정의당 권영국 대표, 진보당 홍희진 공동대표는 구조적 성차별을 부정하는 정치를 규탄하고 제도적 변화를 이끌어내겠다고 약속했다.

공포를 용기로 바꾼 10년의 결집... "우리는 반격을 시작한다"
▲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10주기 추모행동 여성폭력 다이인 퍼포먼스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10주기 추모행동 <강남역! 다시! 추모를 딛고 행동하라!>에서 대규모의 인원이 여성폭력 다이인 퍼포먼스를 진행하며 여성폭력 피해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 서울여성회
이날 추모행동의 하이라이트는 참가자들이 뜨거운 아스팔트 바닥에 일제히 누워 여성폭력으로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고 구조적 대책을 촉구하는 '여성폭력 다이인 퍼포먼스'였다.

매년 5월 17일마다 다른 구호로 이어져 온 추모행동은 2017년 1주기 "우리의 두려움은 용기가 되어 돌아왔다"를 시작으로, 미투 운동, n번방 시위, 그리고 작년 대선에서 여성폭력 해결을 촉구하며 대한민국 페미니즘 행동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왔다.

특히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정치권은 '양성평등'이라는 미명 하에 정책령에서 '여성폭력'과 '젠더폭력'이라는 단어를 지우고 여성가족부 폐지를 추진하는 등 거센 백래시를 이어왔지만, 여성들의 연대는 오히려 단단해졌다.

2023년 37개 단체에서 시작된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추모행동의 공동주최 단위는 지난해 95개 단체로 확대되었고, 올해는 157개의 공동주최단체와 수많은 개인 참여자로 역대 가장 단단한 결집을 보여주었다.

강남역! 다시! 추모를 딛고 행동하라!
▲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10주기 추모행동이 끝나고 추모를 위해 강남역 10번출구 앞으로 행진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10주기 추모행동 <강남역! 다시! 추모를 딛고 행동하라!>가 끝나고 참여자들이 함께 피해자를 추모하기 위해 강남역 10번출구로 행진하며 이동하고 있다.
ⓒ 서울여성회
본 행사가 끝난 뒤, 참가자들은 행렬을 이루어 강남역 10번 출구 앞으로 향했다. 10년 전 무수한 포스트잇이 붙었던 그 역사적인 공간에 선 이들은 숨진 피해자를 기리며 엄숙한 추모의 시간을 가졌다. 침묵 속에서 추모를 마친 참가자들은 일제히 "강남역 10주기! 추모를 딛고 행동하라!"가 적힌 피켓을 높이 들고, "강남역, 다시! 추모를 딛고 행동하라!"며 대규모 함성을 외쳤다.
10년 전 강남역 10번 출구를 고유명사로 만들고 대한민국 사회에 균열을 낸 것은 국가도, 정치권도 아닌 광장에 모인 평범한 여성들이었다. 뿐만아니라 10년 동안 무수한 백래시와 무기력에 맞서며 강남역을 사회적 주체들의 공간으로 만들고 의미를 부여한 것 역시 오직 여성들이었다.
▲ 강남역 10번출구 앞에서 추모 묵념을 하는 참여자들의 모습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10주기 추모행동 <강남역! 다시! 추모를 딛고 행동하라!>가 끝나고, 참여자들이 강남역 10번출구 앞으로 이동하여 추모 묵념을 하고 있다.
ⓒ 서울여성회
10년의 추모를 딛고 다시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 선 여성들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살아남은 우리가 세상을 바꾼다" 여성들은 언제나 그랬듯, 서로의 손을 잡고 연대하며 세상을 바꾸는 행동의 주체로서 여성폭력에 맞서 끝까지 싸워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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