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럭저럭 어른 행세] 감정 변화 큰 중학생 아이들의 글 속에 담긴 것
서울, 부산, 경기도 가평, 제주, 미국에 흩어져 사는 6인이 쩨쩨하지만 울고 웃고 버티며, 오늘도 그럭저럭 어른 행세하며 살아가는 삶을 글로 담습니다. <편집자말>
[박순우 기자]
오랜만에 하는 장시간 출퇴근이었다. 하는 일이 프리랜서와 비슷한 데다 아이 둘을 키우는 엄마다 보니, 웬만하면 집 근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잡는 편인데 이번에는 좀 무리를 했다. 꼬박 한 시간 십 분이 걸리는 거리를 운전해야 도착할 수 있는 곳에 새 일터가 있다. 오래 운전해야 하고 4~5월 잠시 하는 일이지만, 제주의 푸르른 봄날을 만끽하며 오가는 출퇴근길이 나쁘지 않다.
열심히 운전해 도착한 곳은 서귀포에 있는 한 중학교. 한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문집 만들기 프로그램에 선정된 학교 중 하나다. 나는 그 문집 만들기 수업을 진행하기로 단기 계약된 강사고. 각 반마다 주어진 시간은 4시간. 아이들에게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준 뒤 시와 수필 중 선택해 글을 쓰게 한다. 시가 얼마나 어려운 장르인지 잘 모르는 아이들은 글의 길이만으로 시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각자 정한 글감을 가지고 이리저리 생각을 떠올리며 글을 쓰는 아이들. 글을 작성하는 스타일이 제각각이다. 쓸 게 확실히 있다며 거침없이 글을 써내려 가는 아이, 한두 줄 쓰고는 더 채울 게 없다며 고민에 빠진 아이, 대충 시 한 편을 짓고는 옆 사람 뒷 사람에게 자꾸 말을 거는 아이, 글은 적당히 적고 옆에 넣을 그림을 온갖 정성을 다해 그리는 아이까지.
시나 수필을 주문했지만 꿋꿋이 판타지 소설을 쓰는 친구도 있고, 한 문장 쓸 때마다 손을 들어 나를 호출하고는 더 이상 쓸 게 없다며 한탄하는 친구도 있다. 자신이 가장 잘 쓴 것 같다며 손을 번쩍 들고 발표를 자처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글은 절대 읽으면 안 된다며 격하게 손사래를 치는 학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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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이들의 이런 내면은 글 속에 고스란히 담긴다. |
| ⓒ benmullins on Unsplash |
쉬는 시간의 풍경도 다채롭다. 여럿이 한데 어울려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는 아이, 서로의 몸을 부여잡고 레슬링을 하는 아이, 이리 기웃 저리 기웃대는 아이, 십 분이라도 공을 차기 위해 운동장으로 뛰어 나가는 아이, 자리에서 조용히 책을 읽는 아이까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시끄러운 아이들은 시끄러운 대로, 조용한 아이들은 조용한 대로 그저 사랑스럽다.
"중고등학교 강사를 찾기가 쉽지 않아요. 다들 어려워하시더라고요. 작가님께 전화 드릴 때도 긴장했어요, 거절하실까 봐."
약속한 수업을 모두 마친 뒤 나를 섭외한 도서관 관계자분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비슷한 이야기를 다른 데서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중고등학생은 절대 못 맡아."
십 대 아이들을 대하는 게 다들 그리 어렵다고 하는데, 나는 아이들이 그저 예쁘기만 하다. 어린이도 어른도 아닌 존재.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지만, 치열하게 몸도 마음도 자라며 부침을 겪는 시기, 청소년.
사실 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오래전 나를 떠올린다. 해맑게 웃고 있지만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과 그리고 다가올 세상과 싸우던 나. 또래집단에서 멀어지지 않기 위해 언행을 조절하며 관계의 줄타기를 하던 나. 눈에 들어오지 않는 책 속 활자와 씨름을 하다 결국 잠을 이기지 못해 꾸벅꾸벅 졸던 나.
청소년기 아이들은 갑자기 분비되는 호르몬에 진폭이 큰 감정 변화를 겪지만, 아직 전두엽이 다 발달하지 않은 탓에 감정의 표현과 소화 방식이 서툴다. 자신이 속한 학교가 온 세계라고 느끼기에 친구의 미세한 목소리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누구보다 나를 알아가야 할 시기이지만, 목숨만큼 중요한 또래 문화에 쉽게 휩쓸리고 동요돼 정작 나를 깊이 알아가기 어렵다.
아이들의 이런 내면은 글 속에 고스란히 담긴다. 가볍게 툭 써내려 간 글 같지만 그 속엔 학교에서 느끼는 수만 가지의 감정과 아늑한 집에 오래 머물고 싶은 소박한 소망과 친구에 대한 우정과 관계의 불안, 이성에 대한 호기심 등이 빼곡하다. 동시에 미래에 얽매여 현실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아쉬움과 학교와 학원에서 쳇바퀴 같은 삶을 보내며 느끼는 답답함도 실려 있다.
자유롭지 못한 환경 속에서도, 갑자기 요구하는 글쓰기를 거절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글을 써내려 가는 아이들이 아름답다. 진지하게 나의 삶을 돌아보고 그 속에서 글감을 건져내 한 문장 한 문장 적어 보는 성실함이 감사하다. 친구가 쓴 글에 진심으로 감동하고 박수를 보내는 순수함이 어여쁘다. 그렇게 아이들은 저마다의 글에서 단 하나의 주인공으로 반짝인다.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풀꽃
- 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시 쓸 때 참고하라며 읽어줬던 짧은 시 한 편을 아이들에게 바친다. 풀꽃이라는 이름 모를 작은 꽃 하나. 풀숲을 한참 뒤져야만, 자세히 보고 오래 보아야만 진가를 알 수 있는 작은 꽃. 장미나 해바라기처럼 선명하게 존재를 드러내지는 않지만, 다른 식물들과 어우러지면서 아름다운 하나의 풍경을 완성하는 작지만 소중한 존재. 시 어디에도 풀꽃이란 단어는 들어 있지 않지만, 시인은 제목으로 한 편의 시를 완성한다.
교실 안 수십 명의 아이들 역시 처음에는 한 명 한 명의 모습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자세히 보고 오래 보아야만 한 명 한 명의 고유성이 드러난다. 생김도 체격도 피어나는 시기도 제각각이지만, 모두 한데 어우러져 한 반이 되고 한 학교가 된다. 그렇게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꽃으로 피어나며 하나의 풍경을 완성한다. 똑같은 일상 속에서도 친구들과의 작은 순간들을 추억으로 쌓아가며 저마다의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처음 이 길에 들어섰을 땐 분명 연분홍빛 벚꽃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어느새 그 꽃은 다 지고 이파리들이 연두를 지나 초록을 머금고 있다. 꽃의 계절이 너무도 짧다. 푸르른 계절도 아름답지만 긴 겨울을 지나 마침내 피어난 꽃만큼 사랑스럽고 반가운 것이 있을까. 찬란한 계절이 점점 짧아진다. 지금이 얼마나 아름다운 연분홍빛인지 모른 채 결실의 날만 기다리지는 않기를. 짙어지는 계절을 내달리며 짧았던 아이들과의 만남을 떠올린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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