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선거 반대했던 대통령의 변심... 수상한 꿍꿍이가 있다?

김종성 2026. 5. 20.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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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시대별곡] 이승만 시대의 제1회 지방선거

[김종성 기자]

윤석열 정권은 김건희 특검 실시를 막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김건희 특검법이 2023년 12월 28일, 2024년 9월 19일 및 11월 14일에 국회를 통과하자, 윤 정권은 그때마다 거부권(재의요구권)으로 응수했다.

12·3 내란 실패로 윤 정권이 위기를 맞은 그달 12일, 제4차 김건희 특검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윤 정권은그 와중에도 거부권을 날렸다. 2025년 6월 10일, 제5차 김건희 특검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때는 특검을 막아줄 '윤 정권'은 존재하지 않았다.

윤 정권이 김건희 특검 실시만큼은 어떻게든 막고자 했듯이, 이승만 정권은 지방선거 실시에 대해 그런 모습을 보였다. 1949년 6월 17일 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그해 3월 19일 국회를 통과한 지방자치법은 이로부터 두 달도 안 되는 동안에 정부의 1차 거부권 행사, 국회의 재의결, 정부의 2차 거부, 국회의 재재의결, 정부의 3차 거부를 거치다가 폐기됐다. 지방자치법 속의 지방의회 선거 규정에 대한 이승만 정권의 거부감이 초래한 사태였다.

지방선거 반대했던 이승만
 1952년 지방의회의원선거 선거사무소의 모습.
ⓒ 국가기록원
1948년 7월에 제정된 헌법의 제97조 제2항은 "지방자치단체에는 각각 의회를 둔다"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라 국회는 정부수립 닷새 뒤인 그해 8월 20일부터 지방자치법 제정을 논의했다.

지방선거가 일찍 실시되면 이승만의 참패 가능성이 농후했다. 국회 간선제로 치러진 1948년 7월 대통령 선거 때만 해도 이승만은 친일세력인 한국민주당(한민당)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내각 구성 과정에서 한민당이 소외됨에 따라 이들의 관계는 적대적으로 바뀌었다. 국내 기반이 없는 이승만은 이로 인해 정치적으로 위축됐다.

정부수립 2개월 뒤인 그해 10월 19일에 제주 4·3 진압을 반대하는 군인들이 궐기해 여수·순천을 확보했다가 27일에 잃었다(여순항쟁·여순사건). 이승만 정권은 이를 지방선거 연기의 명분으로 내걸었다. 이로 인한 치안 불안이 해소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이에 더해, 남북통일이 먼저라는 것도 명분으로 내세웠다.

지방자치법이 국회를 통과한 뒤인 1949년 3월 30일에 국무회의에서 나온 지방자치법 재의요구 사유가 그해 4월 1일 자 <동아일보>에 보도됐다. 위의 두 명분이 이렇게 언급됐다.

"현하(現下) 혼란한 치안상태하에서 이를 실시한다면 본지(本旨)에 반대되는 결과를 초래할 염려가 있다."
"아직 공석으로 되어 있는 이북 국회의원 보충이 되지 못하고 있는 이때, 지방자치법을 시행함은 법리적으로나 도의적으로 올치 못하다."

지방의회 구성이 시기상조라는 이승만의 태도는 완강했다. 지방자치법이 다시 발의돼 또다시 국회를 통과하고 그해 8월 15일부터 시행된 뒤에도 지방의회 구성만큼은 어떻게든 미루려 했다. 그해 12월 15일에는 지방선거 연기를 공식화했고, 1950년 6월 25일 이후에는 한국전쟁(6·25전쟁) 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윤석열 정권은 김건희 특검 실시를 필사적으로 저지하던 중에 몰락했다. 이승만 정권은 좀 달랐다.지방선거 실시만큼은 어떻게든 막겠다는 입장을 고수하던 이승만 정권은 전쟁 중에 갑자기 입장을 바꿨다. 지방선거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허정 국무총리서리는 1952년 1월 15일 국회에서 시정방침을 발표했다. 그달 17일 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이때 그는 개헌에 대한 희망을 피력하면서 지방선거 실시를 약속했다. 같은 신문의 18일 자 2면은 그가 16일 기자회견에서 '3월 말 지방선거 실시'를 약속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그해 4월 25일과 5월 10일에 지방의회 선거가 실시됐다. 시·읍·면 의회 선거를 먼저 실시하고, 보름 뒤에 도의회 선거를 실시했다. 이에 따라 시의원 378명, 읍의원 1115명, 면의원 1만 6066명이 선출되고, 도의원 306명이 선출됐다.

시정방침 발표 때 허정은 지방의회 선거 실시를 약속하면서 개헌 문제를 언급했다. 자유당 정권이 입장을 바꾼 속사정은 여기에 들어 있다. 발언 내용은 이렇다.

"정부도 민의를 행정부와 국회에 보다 더 직접적이고 광범하게 반영시키게 하기 위하여 제헌 당시부터 숙제 중이던 대통령 직접선거제와 상하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여 여러분의 의결 통과를 요망하는 바이며, 지방 치안의 복구를 기다리여 가급적 조속한 시일 내에 하급 지방단체의 자치적 선거를 시행하고저 하는 바입니다."

'지방선거'와 함께 언급된 '개헌'은 이승만 정권이 지방선거에 대한 태도를 바꾼 동기를 설명해 준다. 그동안 금기시했던 지방선거에 대한 입장을 바꾼 것은 개헌을 관철시키기 위해서였다.

1950년 5·30 총선에서 참패한 이승만 정권은 국회 간선제하에서 치러질 1952년 대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희박했다. 그래서 직선제 개헌을 희망했지만, 여소야대 상황하에서는 개헌이 여의치 않았다. 여당이 제출한 직선제 개헌안은 허정이 시정방침을 발표한 지 사흘 뒤인 1952년 1월 18일 국회에서 부결됐다.

국회를 통한 개헌 가능성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이승만 정권이 정국을 돌파할 목적으로 생각해 낸 것이 지방선거 실시다. 마치 직선제처럼 전 국민이 참여하는 전국적 지방선거를 승리로 이끌어 낸 뒤 지방의회를 통해 개헌과 국회 해산의 목소리를 내고자 했던 것이다.

<역사와 경계> 2022년 제124집에 실린 전성현 동아대 교수의 논문 '이승만 정권기 지방선거 결과를 통해 본 지방자치제의 의미'는 지방선거 실시 방침이 "대통령 직선제를 둘러싼 정치적 승부수 중 하나였다"라며 "대통령 직선제를 둘러싼 진짜 민의를 다시 묻기 위해서는 또 다른 선거(지방선거)가 필요했던 것"이라고 말한다.

정치적 기반이 취약한 이승만 정권이 1952년 시점에 이르러 전국 규모의 선거에 자신감을 갖게 된 이유가 있다. 한국전쟁 발발 전후의 민간인 학살과 부역자 처벌을 통해 남한 전역의 진보진영은 일대 타격을 받았다. 반면, 1951년 12월 23일 창당된 자유당의 기반은 지방조직이 튼튼한 대한청년단·대한부인회·농민조합연맹·대한노총이었다. 거기다 행정조직과 경찰도 정권의 편이었다.

허울뿐인 선거 승리
 1952년 시·읍·면 의회의원선거 선거운동 모습
ⓒ 국가기록원
그런 상황 속에서 자유당과 범여권은 4월 25일과 5월 10일의 지방선거에서 대승을 거뒀다. 위 논문에 따르면, 범여권 당선자는 시·읍·면 의회에서 각각 49%, 59%, 57%를 차지했다. 야당은 거의 전멸했고, 무소속이 각각 46%, 39%, 43%를 차지했다. 도의회 선거에서는 범여권이 70%에 육박했다. 여기서도 야당은 거의 전멸했고, 무소속이 28%였다.

여당이 압승을 거뒀으므로, 그 여세를 몰아 합법적 방법으로 국면을 돌파할 수도 있었다. 지방선거 뒤에 친여 성향의 지방의회들이 직선제 지지 및 국회해산 촉구 결의를 한 것은 자유당이 이런 방법으로 정국을 돌파할 계획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직후에 이승만 정권은 앞뒤가 맞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도의회 선거 보름 뒤인 5월 25일에는 임시수도 부산에서 비상계엄을 통해 사실상의 내란을 일으키고 7월 4일에는 불법개헌(발췌개헌)을 강행했다(부산정치파동). 지방의회를 앞세워 개헌을 추진하는 것과 군·경을 동원해 불법 개헌을 강행하는 것은 차원이 전혀 다른 일이었다. 뒤의 것을 계획했다면, 앞의 것은 굳이 벌일 필요가 없었다.

이승만 정권이 모순된 행동을 취한 것은 지방선거 승리가 실은 허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여야만 놓고 보면 여당이 압승한 것이지만, 46%·39%·43%와 28%인 무소속을 감안하면 반드시 그렇지 않았다. 실제로 이 무소속들이 단합된 힘을 발휘함에 따라 자유당의 계획은 틀어지고 말았다.

위 논문에 따르면, 지방선거로 구성된 총 1404개의 시읍면 의회 및 도의회 중에서 직선제를 지지하고 국회를 비판하는 결의를 낸 지방의회는 659곳에 불과했다. 지방의회의 절반 이상이 이 결의에 동참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로 인해 이승만의 직선제 개헌을 지지하지 않는 것이 민의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지방선거를 전격 실시한 이승만 정권의 의도가 물거품이 됐던 것이다. 이 때문에 정상적 방식으로는 개헌 여론 몰이를 할 수 없게 된 것도 이승만이 군과 경찰에 의존하게 된 한 가지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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